브런디지의, 브런디지를 통한 확인
한반도의 선수들이 런던올림픽에서 태극기를 들고 참가할 수 있다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을 흥분시킨다(
Chosun Ilbo, 1946. 12. 24.). 전경무의 브런디지와의 타진에서 그 가능성을 인지한 올림픽대책위원회는 더욱 희망에 부푼다. 여기에 1947년 보스톤 마라톤에서 서윤복의 세계신기록 경신 우승은 올림픽 참가를 위한 인준 가능성의 기대를 더욱 상승시킨다. 서윤복의 우승은 한국인들에서는 물론 미국과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들의 관심까지 집중시킨다. 서윤복을 통해 혹시라도 있을 한국청년들의 육체적 실력과 운동능력에 대한 의심을 해소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IOC 인준은 미군정에서도 관심을 가진 사안이었다. 비록 비정치군사적 사안이었고 미군정이 직접적으로 개입할 수 없었을 현안이었으나, 한국인들의 스포츠에 대한 열정과 올림픽 출전을 위한 적극적 노력은 미군정도 익히 알고 있었다. 실제로 서윤복의 보스톤 마라톤 참가를 위한 여행경비 또한 미군 병사들의 후원금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전경무와의 만남, 보스톤 마라톤 우승, 한반도에서의 미군정과 정세 등, 브런디지도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Brundage Collection, KOC-01). 이러한 상황은 IOC 총회가 개최되기 약 한 달 전인 1947년 5월 17일, 미군정의 하지 장군이 브런디지에게 보낸 전보에서 나타난다(Brundage Collection, KOC-01).
(하지장군이 브런디지에게, 47. 5. 17.) ‘현재까지 보고된 한국의 올림픽참가에 대한 당신의 노력에 감사하며, 서윤복의 세계기록 우승은 한국인의 자부심을 크게 자극했음. 한국 주둔 미군의 서윤복 교통비 후원은 우리에 대한 좋은 인상을 무한정으로 심어주었음. 이와 같이 미국이 한국의 올림픽 참가를 도울 수 있다면 이는 또 다른 미국의 희망의 손길이며 민주주의 구축에 도움이 될 것임. 심심한 감사들 드리며 한국선수가 올림픽에서 경기하는 것에 대한 노력을 승인하겠음.’
위에서 인용한 1947년 5월 17일 전문을 통해 하지 장군은 브런디지에게 한국의 분위기와 열정, 미군의 관심과 후원 그리고 군정 사령관으로서 자신의 한국인 지원 의사를 명학하게 전달한다. 브런디지의 도움이 IOC 인준에 절대적임을 알았을 것이고, 이를 사령관인 자신이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는 것이었다.
당시 올림픽대책위원회와 전경무는 민간 수준에서의 단체였고 개인이었다. 이는 정부나 정치적 단체가 아니었으며, 그래서 브런디지는 한국을 대표하거나 신뢰를 배경으로 연결될 수 있는 지점을 찾으려했을지 모른다. 또는 최소한 전경무로 내세워지는 대책위원회의를 지지하고 지원하는 이들의 다양한 견해를 듣고자 했을지 모른다. 하지 장군의 전신 며칠 후인 1947년 5월 20일 미국 워싱턴의 한국위원회 회장 임씨는 브런디지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쓴다.
(림씨가 브런디지에게, 47. 5. 20.). ‘5월 15일 편지 잘 받았음. 뉴욕에서 마호니판사(Judge Mahoney)와 댄 페리씨(Mr. Dan Ferris)와 나눈, 한국팀의 48년 올림픽 참가 기회에 대한 대화도 즐거웠음. 두 분과 또 다른 많은 미국 스포츠 관계자들이 함께 한, 한국 마라톤 팀 기념 점심에서도 모두 한국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함. 이 모든 것이 당신의 손에 달렸음에 우리 모두 공감함. 아직 비독립국이지만 다음 달 열릴 총회에서 당신이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어 다행임. 당신의 편지에서처럼 한국이 IOC 규칙을 준수할 수 있기를 여기서도 모든 노력을 다 하겠음.’
위에서 제시한 1947년 5월 20일 편지는 미국 스포츠계에서도 당시 미국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이었던 브런디지의 IOC 에서의 역할과 역량을 충분히 알았던 것을 보여준다. 동시에 브런디지의 결심과 적극적 도움은 한국의 IOC 인준을, 비록 비독립국일지라도, 가능하게 할 것이라는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브런디지는 이러한 다양한 경로를 통한 지지와 지원의 의사를 총체적으로 점검했을 것이다. 1947년 5월 21일 브런디지는 하지 장군에게 편지한다.
(브런디지가 하지장군에게, 47. 5. 21.) ‘한국의 다양한 아마추어 스포츠관계자에게 들은 바로 나는 한국의 인준에 긍정적이며 아마추어 선수들이 올림픽에 갈 수 있기를 바람. 몇 가지 문제는 한국이 지금 독립국이 아니라는 것임. 나는 이것이 해결되리라 믿음. 이는 다음 달 IOC에서 논의 될 것임. 당신이 승인하였으며, 당신의 인준이 IOC 의 관심이 될 것임.’
위에서 제시한 1947년 5월 21일 브런디지의 편지는 자신이 인준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임을 결정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1947년 6월 4일 하지 장군은 곧바로 답신한다.
(하지가 브런디지에게, 47. 6. 4.) ‘5월 21일 편지 감사드림. IOC 회의에서 한국이 인준을 확실하게 받도록 모든 가능한 일을 할 것을 믿음. 당신의 관심과 노력에 감사함.’
위에서 제시한 1947년 6월 4일 인용문은 하지장군의 이전 전신에서처럼 브런디지의 결심과 노력은 한국 NOC의 결정적이며 안정적인 인준을 가능하게 할 것이라는 믿음을 보여준다. 전경무가 스톡홀름으로 가기 위해 출발한 후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 5월 29일 이후에 보내어진 하지 장군의 이 편지는 전경무의 죽음으로 인해 혹시나 IOC의 결정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이전되지 않기를 바라는 확인의 편지일 수도 있다.
한국 NOC의 예비인준과 브런디지의 역할
전경무의 사망으로 미국에 있던 사업가인 이원순이 그 임무를 받는다. 전경무가 소지한 자료들은 미군이 수습하여 이원순에게 전달한다(
Lee, 1989). 이원순은 바쁘게 준비하여 스톡홀름에 도착하고 1947년 6월 15일에 개최되는 IOC 총회에 참가한다. 그리고 한국의 NOC는 인준을 받는다. 1947년 6월 19/21 총회 의사록은 회장과 25명의 위원이 참여하고 17번째 논의 사항으로 한국 인준 건이 상정됨을 적고 있다. 회의록은 불어로 기록되어 있다(
IOC Stockholm session, 1947).
(총회의사록, 47. 6. 19-21) ‘한국올림픽위원회 대표인 이씨는 앞무대로 소개된 후 자기 올림픽위원회의 신청을 발표함. 조직에 대한 상세한 연대기적 설명을 하고 여정 중에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 전경무 한국 대표위원을 대신해 참석한다고 발표함. 이씨는 총회에게 자기 위원회의 올림픽에 대한 헌신을 보장한다고 했음. 에드스트롬은 감사를 표하고 내일 결정이 나온다고 발표함. 이씨는 자리를 뜸.’
KOC의 인준을 알리는 편지는 1947년 7월 18일 작성되어 보내졌다. 작성자는 IOC 사무총장인 오토 마이어이며, 수신자는 총회 대표로 참가했던 이원순이었다(
OSC Archive, 1947). 수신자인 이원순의 주소는 미국 뉴욕시 이스트 휴스턴가 105번지(East Houston St. 105)로 되어 있으며, 이는 이원순의 사무실이었다. 이는 아마도 한국에서 편지를 안정적으로 받아보기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보다 확실한 이원순의 미국 주소를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KOC 인준 편지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오토 마이어가 이원순에게, 47. 7. 18.) ‘1947년 6월 20일 스톡홀름에서 열린 IOC 총회에서 귀 NOC가 공식적으로 인준된 것을 확인 드리려 함. 올림픽이상의 확산을 위해 앞으로 소중한 협력을 해 주실 것에 감사드림. 귀 위원회의 성공을 기원함. 런던과 생모리츠로부터 1948년 경기 공식 초청을 받을 것임.’
IOC 총회 회의록과 1947년 7월 18일 오토 마이어의 편지에서 보듯이, 한국의 인준은 이원순이 발표한 다음 날 결정된 것으로 보이고, 그 날짜를 오토 마이어는 6월 20일로 적고 있었다. 총회 발표 이후 이원순은 긴장된 상태에서 IOC의 부름에 응했고, 인준 결정을 통보받게 된다(
Lee, 1989). 아마도 이원순이 인준 사실을 바로 대책위원회에 전신 등으로 통보했을 것으로 추측되나 이에 대한 어떠한 자료도 찾아 볼 수 없다. 그리고 오토 마이어의 인준 통보 편지에는 한국 NOC 인준의 조건이나 또는 책무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단순히 인준의 사실을 알리고, 잘 해 주기를 바라며, 조만간 생모리츠(St. Moritz)와 런던에서 공식적으로 초청을 받을 것이라는 내용만 적혀있었다. 통보 편지는 7월 18일자로 되어 있으나, 이원순으로부터 인준 사실을 전해 들었을 조선체육회 여운형 회장은 1947년 6월 30일 브런디지에게 정중히 편지한다.
(여운형이 브런디지에게, 47. 6. 30.) ‘앞으로 있을 올림픽에 참가할 수 있도록 당신의 귀중한 지원에 마음속의 감사를 표함. 우리는 모든 종목에서 올림픽 신기록을 위해 선수들이 훈련에 힘 쏟고 있음. 우리는 한국을 위해 자신을 바친 전경무를 위해 기념체육대회를 열려고 함. 우리 대표인 이원순에게 당신의 조언과 좋은 지도 감사드림.’
스톡홀름 총회 이후 한국으로 보낸 브런디지의 첫 번째 편지는 1947년 7월 10일 여운형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이 편지는 물론 오토 마이어의 인준 통보 편지보다 먼저 작성된 것이지만 통보 편지와는 더 구체적인 인준의 내용이 적혀있었다.
(브런디지가 여운형에게, 47. 7. 10.) ‘전보로 언급하였듯이 전경무의 사망에 충격적임. 미국올림픽위원회와 내 이름으로 명복을 빔. 이원순이 스톡홀름에서 한국의 경우를 아주 잘 설명했음. 그와의 몇 번의 대화도 즐거웠음. 이미 연락받았겠지만, 한국은 런던에서 열린 국제육상연맹 회의와 스톡홀름 IOC 총회에서 인준(recognition) 되어, 내년 런던올림픽에 참가 할 수 있게 됨. 성공을 빌며 큰 대표단이 오기 기대함. 한국은 아직 국가가 아니라 승인은 특별한 것(rather unusual)이었음. 그러나 미국 관계자들의 지원(국무부(the State Department)와 하지 장군으로부터 들었음)이 있었고, 나 또한 강하게 인준을 주장했음(I strongly urged recognition). 그러나 이 인준은 어떤 의미에서 조건부(in a sense provisional)이며, 한국 정부가 수립되면 다시 검토될 것임. 한 국가에서는 한 조직만 인준되니 북쪽의 아마추어 스포츠 또한 포함시킬 수 있기를 희망함(It will be highly desirable for you to obtain control of amateur sport in the northern zone.).’
위에서 제시한 1947년 7월 10일자 브런디지의 편지는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전해준다. 먼저 한국 NOC의 인준이 ‘예비인준(provisional recognition)’이라는 점이다. 이는 정식, 가입, 승인, 회원국 등의 단어들이 의미적으로 내포할 수 있는 제약 대상적 주체로서의 인정이 아닌, IOC가 요구하는 자격을 갖추고 올림픽 정신과 운동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는 일종의 독립적인 주체를 인정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두 번째는, 독립된 정부가 없었던 한반도의 현실에서 독립이 이루어질 때까지 유예된 인준을 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는 매우 특별한 것이란 점이다. 그러나 이후의 어떤 자료들에서도, 한국의 NOC ‘예비인준’이 추가적 검토를 통해 ‘인준’으로 변신하였는지는 찾을 수 없다.
세 번째는, 브런디지와 미국의 역할이다. 브런디지는 괄호를 사용하여 미국무부와 하지장군의 지원이 있었다고 썼으며, 하지 장군의 지원은 아마도 총회 한 달 전 주고 받은 서신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자신도 강하게 인준을 밀어붙였음을 적고 있다. 미국무부의 지원 또한 브런디지의 결정에 역할을 한 것을 보이나 이에 대한 자료는 현재까지 찾지 못하였으며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 브런디지의 강한 밀어붙임과 예비인준은 아마도 연계되어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아마추어 선수들에게 올림픽 참가의 기회를 최대한 부여하고자하는 올림픽 정신과 아직 독립국이지 않은 자격의 문제가 상충하는 상태였다. 그리고 아마도 북쪽의 아마추어 청년선수들에 대한 문제도 추가적으로 고려되었을 것이다. 이 모든 문제는 누군가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설득했어야 했을 것이고, 브런디지는 이를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총회 마지막까지 다양한 경로에서 한국의 올림픽 참가를 지지하는 움직임과 노력도 브런디지의 결심과 확신을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편지에 미국무부와 하지장군을 특별히 명명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네 번째는, 북쪽의 선수들을 포함시키라는 것이었다. 한 국가에서는 한 NOC만을 인준한다는 올림픽 규정을 따르기 위해서는 한반도에서 더 이상의 NOC 인준은 없을 것이고 없어야 했다. 비록 현재 남북이 군사적으로 경계를 가지고 있지만 조만간 한반도에는 통일된 정부가 수립될 것으로 믿었을 것이고, 이는 IOC 총회에서도 위원들 간에 공감적으로 전제되었을 것이다. 이는 IOC가 한반도의 국가를 하나로 본다는 관점을 명확하게 하고 있는 점이다. 그리고 어떠한 이유든 북쪽의 청년들이 올림픽 참가의 기회에서 배제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편지는 적고 있다. 브런디지는 이를 믿었을 것이고 위원들을 설득했을 것이다. 그러나 추후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하면서 이는 중요한 사안으로 부각된다. 이를 두고 남한과 북한은 최소한 15년 이상을 다투게 된다. 예를 들어, 북한의 IOC 인준 신청은 1956년 멜버른 총회에서 처음으로 시도되며, 결국 1963년 한반도에서 남한과는 다른 독립적 인준을 받게 된다(Brundage Collection, KOC-01).
브런디지가 여운형에게 보낸 편지에 하루 앞서, 이원순도 뉴욕에서 브런디지에게 감사의 편지를 쓴다.
(이원순이 브런디지에게, 47. 7. 9.) ‘IOC 회의에서 잘 대해주셔 감사함. IOC 가입(Korea’s entrance)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름. 한국인들도 매우 기뻐함. 런던에 잠시 머문 후 뉴욕으로 돌아왔음. 1948 런던올림픽 조직위원장 홀트씨(Mr. Holt)를 만났으며 내년 있을 대회에 대한 필요한 정보들을 받았음. 사람을 동행시켜 경기장도 구경했음. 나도 내년에 선수들과 함께 참여할 수 있으면 함. 회원국인준(Korea’s membership)에 다시 감사드림.’
이원순의 편지에 브런디지도 1947년 7월 14일 답장한다.
(브런디지가 이원순에게, 47. 7. 14.) ‘스톡홀름에서 만나 반가웠음. 내가 런던과 스웨덴에서 한국의 참가를 조율할 수 있어서 기쁨. 그러나 이 인준은 한국의 정치적 상황 때문에 조건부임을 명심하기 바람(Bear in mind this recognition is, of course, only provisional because of the political status of Korea). 이번 인준은 독립정부 이전에 승인이 된 첫 사례임. 한국이 독립국이 되면 다시 평가될 것임. 그래서 남북 선수를 모두 관장하는 단체가 되길 매우 희망함(It will, therefore, be highly desirable for the existing Korean Olympic Committee and the existing amateur sport governing bodies to include the athletes in Northern Korea as well as the southern section.). 한 국가에 한 단체만 승인되기 때문임. 다음에 한국 팀이 런던에 올 것이고 성공을 빔.’
위에서 제시한 두 편지는 이원순과 브런디지 간의 KOC 인준과 관련한 시각의 차이를 보여준다. 이원순은 가입이나 회원이란 용어를 사용한 반면, 브런디지는 이 편지는 물론 모든 서지 사료에서 지속적으로 인준(recognition)을 사용한다. 총회가 열린 스톡홀름에서 인준을 통보하면서 브런디지가 편지에서 언급한 내용을 모두 이원순에게 전달했을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브런디지가 이원순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적었듯 ‘명심(Bear in mind)’은 이미 브런디지가 해당 내용을 한번쯤 언급했을 것이고 이를 다시 명확하게 하고자 편지에 적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원순이 회원이란 용어를 사용한 것은 이원순의, 또는 그리고, KOC의 IOC 운영방식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서 비롯되었을 수도 있다. 이는 이후의 자료에서 유추된다. 이원순이 에드스트롬에게 보낸 1949년 4월 18일 전신은 다음과 같다.
(이원순이 에드스트롬에게, 49. 4. 18.) ‘KOC는 로마 IOC 회의에 참가 초청을 간절히 바람(KOC beg to request invitation to attend and participate your IOC meeting in Rome). 답장 기다리겠음. KOC 대표 이원순.’
위에서 제시한 1949년 4월 18일 전신에 대해 에드스트롬은 로마 회의가 IOC 위원만 가능하며, NOC 대표가 참석하는 자리는 아님을 알려준다. 실제 로마회의는 1949년 4월 26일 열리며 이는 IOC 위원들의 이사회의 자리였다. 이 전신의 내용으로 봐서, 이원순과 KOC는 NOC 인준으로 회의에 참석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된 것으로 이해했을 수도 있다(
OSC Archive, 1949).
다시 브런디지가 이원순에게 보내는 1947년 7월 14일 편지에서, 브런디지는 여운형에게 보냈던 내용을 이원순에게 반복적으로 적지 않았으나, 예비인준이라는 점, 독립정부 후 다시 평가할 것이라는 점, 북한 선수들을 포함시키라는 점은 반복적으로 다시 명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이는 예비인준의 조건이었으며, 이와 관련된 쟁점들이 위원들 사이에서 불거졌을 것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한국과 관련한 스포츠계 대표들에게 이를 모두 명확하게 한 것이다.
런던에서와 스웨덴에서 한국의 참가를 조율할 수 있어 기쁘다는 것은 아마도 런던에서 열린 국제육상연맹 회의와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IOC 총회를 일컫는 내용으로 보인다. 브런디지는 IOC 인준에만 역할을 한 것이 아니며, 한국의 국제육상연맹 인준도 도와주었을 것이 추정된다. 그리고 여기에 이원순이 함께 참가하여 브런디지의 역할을 목격했을 것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