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연구는 ‘체육인’이라는 개념이 한국 사회와 스포츠 세계 속에서 매개하고 발산해 온 사회·문화적 의미의 역사성에 주목하여, 그것이 언어 및 담론의 지형 속에서 사용, 이해, 소통되어온 특정한 맥락과 양상을 ‘개념사(槪念史, conceptual history)’라는 역사연구의 접근을 통해 해석적으로 탐구하였다.
자료 수집 및 방법과 관련해서,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에서 제공하는 데이터베이스에서 ‘체육인’으로 검색하여 총 338편의 기사(1945-1961)를 수집하였다. ‘체육인’이 등장하는 1945년 이전의 기사는 단 3건에 불과하였으며, 그것이 사용되는 맥락 역시 체육과 관련된 주체들을 단순하게 지시하는 경우라 분석 대상에 포함하지 않았다. 수집된 자료 중 ‘체육인’의 기표가 단순히 ‘체육과 관련된 주체’ 혹은 ‘체육에 종사하는 사람’ 등을 지시한 기사들을 배제하였고, 최종적으로, ‘체육인’의 개념이 특정한 서사 구조 속에서 의미 작용을 하는 140편의 칼럼형 기사들을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
필자들의 주장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해방공간과 건국 초기 당시의 한국 사회는 국가건설의 주체로서 ‘국민’이라는 새로운 주체를 호명하고 있었는데, ‘체육인’의 개념은 그러한 주체화의 담론이 ‘체육’이라는 특정한 문화적 실제 속에서 매개되어 구성, 형성된 민족-국가적 주체의 ‘체육적’ 표상이다. 둘째, ‘민족/국민’에 대한 호명이 곧 그들에게 정체성을 부여하면서 주체를 구성해내는 과정이듯이, ‘체육인’의 등장과 그것의 호명 역시 특정한 집단적 주체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특정한 내용과 방식으로 구성하고 형성하는 자기-재현의 언어이다. 셋째, 이러한 ‘체육인’의 지배적 의미/이데올로기는 두 가지 대립적 감정이 공존하는 서사적 구조와 패턴으로 강화되었다. 한편으로, ‘체육인’의 개념은 체육과 관련된 주체들의 빛나는 성과와 업적을 표현, 확인하는 서사 속에 등장하면서 ‘자부심과 긍지(pride)’의 감정을 공유하는 과정을 통해 집합적 정체성을 정의하고 구축한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체육과 관련된 주체들의 부정적이고 불미스러운 사건과 행태들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서사 속에 등장하면서 ‘수치와 부끄러움(shame)’의 감정을 성찰하는 수사적 의식을 통해 다시금 ‘체육인’의 (긍정적인) 집합적 정체성을 재결속하고 재강화한다.
‘체육인’의 개념이 탄생하게 된 양상과 맥락의 내용과 성격 등을 요약함과 동시에, 아울러 한국의 역사 속에 자리하고 있는 체육과 관련된 다양한 개념과 언어에 대한 ‘개념사’적 탐구가 필요하다는 점, 그리고 과거 속의 체육·스포츠를 역사화하는 방식에는 비단 성공과 업적을 찬양하고 기념하는 자부심/긍지의 ‘(스포츠) 역사하기’ 뿐 아니라, 실패와 잘못을 되새기며 성찰하는 수치/부끄러움의 ‘(스포츠) 역사하기’도 필요하고 또 가치 있다는 점을 제언하였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was to explore cultural meanings of the concept of ‘Che-Yuk-In’ through a critical examination of how it was described, portrayed, and represented in the narratives of the mainstream newspapers in the early days of the nation(1945-1961).
As for the data collection and method, a total of 338 articles were collected by searching of "Che-Yuk-In" through the database provided by the Naver News Library. Sorting out them with the point of whether the concept simply denotes the number of players or the majority of athletes, for example, we select 140 column-type articles and analyzed how it serves as a linguistic element and what discourses were involved in the narratives.
Our argument is twofold: 1) the concept of ‘Che-Yuk-In’ is a kind of self-representative terminology with which a particular group of people, who call themselves ‘Che-Yuk-In’, construct their collective identity into a particular type of the idealized subject, so-called sporting citizen, and 2) this construction consists of two functions: one is to share the emotion of pride by celebrating success and achievements of the sporting figures, and the other is to collectively reflect shame by criticizing negative incidents and controversies such as corruption, factional disputes, violent behaviors, which broke in the sporting practices.
With a brief summary, this paper concludes with some suggestions for future studies, in terms of how the shameful past should be embraced within the field of Korean sport history, and why a conceptual history of the ‘Che-Yuk-In’ might need to be further expanded.
이 연구는 ‘체육인’이라는 개념 혹은 단어가 한국 사회와 스포츠 실제 속에서 출현, 형성, 변화해 온 사회·문화적 의미의 역사성에 주목하고, 그것이 언어 및 담론의 지형 속에서 사용, 이해, 소통되어온 특정한 성격의 유의미성을 ‘개념사(槪念史, conceptual history)’라는 역사연구의 한 접근을 통해 탐구하는 조그만 작업이다. 구체적으로, ‘체육인’의 기표가 한국 사회 속에서 처음 등장하여 사회적 대표성을 형성해나갔던 해방 정국과 건국 초기에 주목하고,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배경 속에서, 그것의 의미가 어떻게 매개되고 소통되었는지, 누가 그리고 왜 그러한 의미(상징)생산에 관여한 것인지, 나아가 그러한 의미 형성의 역동성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어떠한 함의와 시사점을 제공할 수 있는지 등을 논의하는 것이다.
강조하건대, 이 연구의 목적은 ‘체육인’이 과연 누구인지 그리고 그것이 정확하게 어떤 주체와 대상을 지칭하는지를 규명하는 것이 아니다. 다음 장에서 논의하겠지만, 우선, ‘체육인’이라는 개념/단어의 의미를 법·제도·정책적 차원에서 ‘정의’하여 ‘합의’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하고 또 시급한 일이라는 점을 밝힐 필요가 있겠다. 그래서 아마도, 그러한 시도와 작업으로 ‘확립’ 가능한 체육인의 ‘의미’가 존재하거나 혹은 존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체육인’이라는 개념/단어의 법적, 제도적, 혹은 정책적 ‘의미’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성격의 작업과는 달리, 우리의 연구는 ‘체육인’이라는 개념/단어
특히, 필자들은 ‘체육인’의 개념/단어가 본격적으로 등장하여 일종의 사회적 대표성을 얻게 되는 시기로 광복 이후부터 제3공화국이 출범하기 이전까지의 시기(1945-1961)에 주목하였다. 그리고 본 연구의 제목이 시사하듯, 우리는 그러한 시대적 조건과 배경 속에서 ‘체육인’의 개념이 사용되고 소통되며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 언어적 현상의 유의미성을 이른바 ‘체육인’의 개념이 ‘탄생’한 국면으로 틀 지어 개념화하였다. 개념史를 창안하여 확산시킨 선도적 학자 Reinhart Koselleck이 주장하였듯이, 모든 개념은 특정한 사회적 집단들의 정치적, 사회적 관점과 입장 및 함의에 따라 만들어지는 것이며, 또한 그들이 처한 “현실을 통합시기고 각인시키며 폭발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필자들의 주장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체육인’의 개념이 본격적으로 출현, 사용, 소통하게 된 ‘맥락’으로, 해방공간과 건국 초기 이른바 새로운 민족적-국가적 주체로서 ‘국민’을 호명하기 시작한 ‘주체화 담론’의 지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시의 한국 사회는 국가건설의 주체로서 ‘국민’이라는 새로운 주체를 다양한 영역과 분야에서 호명하고 있었는데, ‘체육인’의 개념은 그러한 민족적-국가적 주체의 호명이 ‘체육’이라는 문화적 실제 속에서 매개되어 구성, 형성된 ‘체육적’ 표상이다.
둘째, ‘체육인’의 개념은 집합적 정체성의 형성에 관여하는 언어적 기능을 수행한다. ‘민족/국민’에 대한 호명은 곧 그들에게 정체성을 부여하면서 주체를 구성해내는 과정이듯이, ‘체육인’으로 호명하는 것 역시 특정한 집단적 주체들의 정체성을 특정한 내용과 방식으로 구성하고 형성하는 자기-재현의 언어이다. 구체적으로, 그러한 ‘체육인’ 개념의 사용 속으로 유입되는 지배적 의미는 주로 ‘체육’ 혹은 ‘스포츠’야말로 세계와 공정하게 경쟁하여 승리함으로써 한국을 알릴 수 있게 되는 문화의 효자라거나, 또는 ‘체육인’(들)이야말로 건강한 신체와 건전한 정신의 소유자를 상징하는 순수하고 비정치적이며 강직한 사람들이라는 자기-정의의 메시지이다.
셋째, 이러한 ‘체육인’의 지배적 의미/이데올로기는 두 가지 감정이 대조되는 서사적 패턴을 통해 강화된다. 한편으로, ‘체육인’의 개념은 체육 관련 개인, 집단 및 조직의 성과나 업적을 치하하고 확인하는 서사 속에 등장하면서, ‘자부심과 긍지(pride)’의 감정을 공유하는 과정을 통해 ‘체육인’의 집합적 정체성을 긍정적으로 강화한다. 다른 한편으로, ‘체육인’의 개념은 비도덕적이며 불미스러운 사건과 행태들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서사 속에 등장하면서, ‘수치와 부끄러움(shame)’의 감정을 반성하고 성찰하는 교감을 통해 다시금 ‘체육인’의 (긍정적) 정체성을 회복하거나 재강화한다.
이상의 주장을 구체화하는 이하의 본론은 크게 다섯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개념史란 것이 무엇이며, 왜 ‘체육인’의 개념을 개념史의 접근과 관점에서 분석, 해석할 필요가 있는지에 대한 문제의식을 피력하였다. 이어서, ‘체육인’의 개념을 해석하는 틀과 방법으로, 왜 민족-국가적 주체를 호명하는 담론에 주목하는지를 설명하고, 아울러 이 연구가 개념史의 유형 중에서 ‘공시적 분석’에 해당한다는 점과 함께 연구의 시기와 대상 자료의 선정 및 수집 방법 등에 대해서도 간략히 언급하였다. 다음으로, ‘체육인’의 개념이 등장하는 신문 기사의 내러티브를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하여 정리하였는데, 하나는, 긍정적인 담론으로, ‘자부심/긍지’의 감정을 집합적으로 공유하는 양상의 내용과 성격이며, 다른 하나는, ‘수치/부끄러움’을 통한 성찰을 통해 정체성을 회복하고 재확인하는 양상의 내용과 성격을 정리하였다. 끝으로, 결론에서는 연구 전반에 대한 요약과 함께 몇 가지 제언을 담았다.
이 장에서는, ‘체육인’이라는 어휘/용어를 ‘개념’으로 인식하는 구성주의적 관점의 개념史적 문제의식을 간략히 소개하고, 그러한 해석적 접근이 개념/단어를 ‘정의’하는 작업과 구별된다는 점을 설명한 다음, 왜 ‘체육인’의 개념을 ‘정의’가 아니라 ‘해석’할 필요가 있는지, 그리고 이러한 작업은 어떻게 의미 있고 또 가치 있는 것인지를 서술한다.
이 연구는 ‘체육인’이라는 개념/단어를 사회·언어적 구성물로 인식하고 그것을 역사적 해석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개념사(槪念史, conceptual history)’라는 학문적 이름으로 형성되어 있는 ‘역사하기(doing a history)’의 한 방식(historiography)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요컨대, 개념史 연구는 ‘개념’이라는 렌즈를 통해 역사 속의 사람들과 세상을 이해해보는 것을 지향한다. 사람들이 주고받으며 소통하는 어휘, 단어, 개념 그 자체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에 집중하기보다는, 한 개념을 통해 누가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주고받으며 소통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즉 ‘개념’의 문화적 사용에 관심을 두고, 그것의 언어적 의미와 효과 그리고 사회적 영향력 등을 읽어내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史 연구의 해석적 접근에는 ‘개념’을 일종의 ‘사회적 구성물(social construct)’로 인식하는 관점이 깔려있다. ‘개념’이라는 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항상 고정적으로 존재하는 특정한 객관적 실체가 아니라, Koselleck이 주장하였듯이, “역사적 변화과정 속에서 부단히 의미[의] 변화를 겪는 유연하고 유동적인 언어적[·사회적] 구성물”이라는 것이 개념사학자들의 개념관(觀)이다(
중요한 것은, ‘개념’에 대한 구성(주의)적 관점의 해석적 탐구가 그것을 ‘정의’하는 지적 작업과 구별된다는 점이다. 사회적 구성물로서의 ‘개념’은 해석해야 할 대상인 것이지 ‘정의’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 핵심이다. 어휘/단어/개념 등이 지시하는 외연의 경계를 구분하는 ‘정의’와 달리, 그것이 내포하고 함의하는 의미와 상징의 맥락적이고 관계적인 역동성을 이해하고 읽어내는 것이 곧 해석이다. 이러한 ‘정의’와 ‘해석’의 구별에 대해, 개념사학자들은 Friedrich Nietzsche가 『도덕의 계보학』에서 언급한 내용을 자주 인용하여 설명하곤 하는데, 그것은 오직 비역사적인 개념들만이 ‘정의’될 수 있으며, 역사성을 가진 개념은 ‘정의’가 아니라 ‘해석’이 필요하다는 역사적 통찰이다(
이러한 ‘정의’와 ‘해석’의 구별을 통해, 개념史 연구는 ‘단어’를 해석의 대상에 포함하지 않는다. 간단히 말해, ‘개념’을 ‘단어’와 구별하는 가장 큰 차이점은 그것의 ‘‘다의성’에 있다. Koselleck의 개념史를 연구하여 소개한
개념史를 개척한 학자 Koselleck은 ‘단어’와 구별되는 ‘개념’의 해석적 지위와 위상을 ‘기본 개념’이라는 용어로 설명하였는데,
기본 개념이란 한 단어 속으로 이것이 지칭하는 수많은 정치적 사회적 의미의 맥락들과 경험의 맥락들이 한꺼번에 유입된 채 일정한 의미의 장을 형성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코젤렉의 말을 빌리자면 한 단어 속으로 ‘이 단어가 그 속에서 사용되면서 지칭해 온 수많은 정치적 사회적 의미와 경험의 맥락들이 한꺼번에 유입’되어 있어야 비로소 단어는 개념이 된다.
풀이하자면, ‘개념’은 시대와 상황의 맥락에 따라 다양한 사람에 의해 사용되면서 개인이나 집단의 경험, 기대, 이해관계 등에 따라 항상 다의적으로 존재하는, 그래서 항상 그것이 품고 있는 의미들 사이의 경합과 충돌을 항상 내포하고 있는 논쟁적 단어이다.
이 지점이 바로, 필자들이 ‘체육인’의 개념, 단어, 혹은 어휘를 ‘개념史’적 관점의 개념관(觀) 속으로 포진시켜 놓고 생각해보는 출발점이다. 질문해보건대, ‘체육인’이라는 어휘 혹은 용어는 ‘단어’인가 ‘개념’인가? 다시 말해, 그것은 ‘정의’해야 하는 대상인 것인가, 아니면 ‘해석’이 필요한 것인가? 체육·스포츠학의 학술지형과 실제 속에서 우리는 그것을 ‘정의’와 ‘해석’의 스펙트럼 사이에 놓아두고 어떻게 접근하여 탐구할 필요가 있는가? 이하에서는, 이러한 질문들을 염두에 두고, 필자들이 ‘체육인’을 왜 ‘개념史’적 관점의 ‘개념’으로 파악하여 해석적으로 탐구하는지에 대한 문제의식을 피력한다.
사실, ‘체육인’의 개념은 무엇보다 ‘정의’가 필요하고 또 시급한 것이 현실이다. 특히 인권과 복지의 이슈를 중심으로 ‘체육인’ 개념에 대한 명확한 정의가 요청되고 있지만, 정작 법적 차원의 정의는 너무나 포괄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다. 또한 학계에서도 ‘체육’이라는 개념의 복잡함과 다의성으로 인해 ‘체육인’이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논의도 거의 없는 실정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최근 체육인 개념에 대한 ‘정의’를 시도한 유의미한 작업을 찾아볼 수 있는데, 한국스포츠정책과학원이 2019년에 수행한 「체육인 생활실태조사를 위한 기초연구」가 대표적이다.
우리의 연구는 이렇게 ‘정의’의 필요성으로 촉발, 점화되고 있는 학술적 지형 위에, ‘해석’이라는 또 다른 성격의 지적 안목을 보태고자 하는 것이다. 물론 ‘체육인’이란 개념이 무엇인가를 질문하고 그것을 조사하고 정의하여, 체육인이 누구이며 또 누가 체육인의 대상과 자격이 되는지를 분간하여 가려내는 일은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체육인’의 개념을 정의하는 것은 ‘체육인이라는 것’과 ‘체육인이 아니라는 것’ 사이의 경계를 가르는 것이기도 하다. 아마도 ‘개념’이라는 것을 이러한 시각으로 접근하여 탐구하는(스포츠) 역사학자들은 (스포츠) 역사 속에서 항상 일정한 법칙과 패턴처럼 존재하고 작동해온 ‘체육인’이라는 개념의 의미와 성격을 발견하고, 그것이 올바르게 사용됐는지를 규정하고 확인하는 학술적 작업에 관심이 있을 것이다.
필자들의 입장은, 그러한 시각으로 적확한 ‘정의’를 추구하는 학문적 시도와 ‘함께’, ‘체육인’이라는 개념/단어의 ‘의미’와 ‘쓰임새’에 대해서도 한번 관심을 가져보자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체육인’이라는 개념은, 문자 그대로, ‘체육(體育)’이라는 분야 혹은 직종의 의미와 ‘인(人)’이라는 주체 혹은 대상이 연결된, 딱히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 별로 없는 그런 쉬운 ‘기표’이다. 그러나 ‘체육인’이라는 개념/단어의 ‘의미’와 ‘쓰임새’는 우리의 현실 속에서 ‘체육과 관련된 사람들’로 단순하게 표현하면서 소통하기에는, 다소 허전하면서도 밋밋한, 아니 조금 더 부연하여 이야기하자면, 그것이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너무나 아리송하고 모호하기 그지없는 그런 복잡하고 오묘한 개념/단어가 아닐 수 없다. 마치, 우리가 ‘자유’, ‘정의’, ‘평등’, ‘국가’, ‘사회’, ‘보수’, ‘진보’ 등의 개념을 아무런 불편함 없이 자유롭게 사용하고 있지만, 정작 그것의 의미가 정확하게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면, 금방 말문이 막히게 되는 경우처럼 말이다.
이처럼, ‘체육인’의 개념 역시 그것 속으로 유입되어 묻어 있고 배어있는 의미의 유동성, 다의성, 중첩성 등으로 인해, 그것을 이해해보고 해석해볼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체육인’의 개념이 존재하여 작동해온 의미와 쓰임새의 역사, 즉 시대적 조건과 사회적 맥락 속에서 누가 ‘체육인’이라는 개념/단어를 누구에게 어떻게 사용하고, 또 그것에 대해 사람들이 어떠한 의미로 이해하고 소통해왔는지 한번 들여다보고 이해해보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취지가 ‘체육인’ 개념의 실체와 정의를 밝히고 드러내는 학술적 작업이 무의미하다는 주장으로 오인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체육인’의 개념의 역사성에 주목하되, 그것이 한국 사회와 언어 담론의 세계 속에서 관계, 매개, 구성, 형성된 다의적이고 역사적인 의미와 상징의 역동성 등을 해석해보는 지적 작업도 그것 나름의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것이다.
단언컨대, ‘체육인’ 개념의 역사적,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의미를 해석해보는 작업이 중요하고 또 가치 있는 이유는, 그것을 통해 ‘체육인’이 어떠한 사람인지 그리고 그 ‘체육인’이 속한 사회가 어떠한 사회인지에 대해 잘 이해할 수 있는 영감과 계기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언어라는 것은 서로가 주고받는 교환의 산물이듯이, 한 개념/단어가 어떻게 사용되고 또 어떠한 의미로 소통되는지의 ‘맥락(context)’을 짚어보면, 그 개념/단어가 지칭하는 바로 그 ‘대상’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이야기하는 ‘화자’에 대해서도 잘 알 수 있게 되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우리가 ‘미국인’이라는 개념/단어를 ‘개인주의’와 관련된 특정한 맥락 속에서 자주 사용한다는 점을 생각해보자. 그렇다면, 우리는 그렇게 주고받는 우리의 이야기들로부터, 그들이 어떠한 개인주의적 사람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지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개인주의적인 것과 관련된 우리의 마음과 태도 그리고 입장에 대해서도 성찰할 수 있다. 우리가 ‘미국인’이라는 개념/단어를 사용하면서 주고받는 이야기들 속에는, ‘우리’가 ‘미국인’(들)과 관계하는 다양한 의미 및 상징의 흔적들이 묻어있기 마련이고, 그것들은 또한 우리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필자들의 문제의식 또한 이와 같다. ‘체육인’이라는 개념/단어는 ‘체육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으로 소통되는 흔한 ‘기표’(記表, 시니피앙, denotation)이지만, 그것이 존재해 온 쓰임새의 역사 속에는 그 기표의 사회·문화적 ‘기의’(記意, 시니피에, connotation) 즉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매개하고 관계해온 삶의 의미와 무늬들도 고스란히 묻어있고 스며 있다. 따라서 우리는 ‘체육인’이라는 개념/단어에 대해 어떤 감정을 느끼고 또 부여하는지, 그것에 스며 있고 묻어있는 사람들의 살냄새는 무엇인지, 나아가 그것이 한국의 체육계와 사회 속에서 어떠한 문화적 의미들로 만들어지고 빚어지며 매개되고 소통되는지 등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다. 요컨대, ‘체육인’ 개념/단어의 한국적 의미를 읽어내고, 나아가 그러한 ‘체육인’들로 구성된 ‘한국 체육계’를 돌아보는 동시에, 바로 그 ‘체육계’와 관계해 온 우리 사회의 과거와 역사까지도 함께 성찰해볼 수 있는 것이다. 필자들은 이러한 역사적이고 해석적인 접근이, ‘체육인’ 개념/단어를 ‘정의’하는 작업 못지않게 ‘체육인’에 대해 잘 알 수 있게 되는 또 하나의 유의미한 방식이라고 믿는다.
개념史 연구는 ‘개념’의 역사성을 크게 두 가지 차원으로 구분하여 인식한다. 하나는 공시적 차원이고, 다른 하나는 통시적 차원이다. 결국, ‘개념’이라는 것은 특정한 시대의 특정한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소통되는 ‘공시적’ 산물임과 동시에, 역사적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그 의미의 변화를 겪게 되는 ‘통시적’ 산물이다.
개념의 ‘역사적’ 의미를 탐구하는 작업도 두 가지 차원으로 구분하여 진행할 수 있다. 먼저, 공시적 분석은 한 개념의 시대적 의미를 파악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이 특정한 시대적 조건과 배경 속에서 어떠한 언어적 기능을 수행하고 또 어떠한 사회적 힘과 영향력을 발산하며 매개되는지를 탐구하는 것에 초점을 둔다. 반면에, 통시적 분석은 개념의 역사적 유의미성을 보다 긴 시간적 범위 속으로 위치시켜놓고, 그것의 의미가 어떠한 흐름과 양상으로 변화, 굴절, 전환, 전복, 지속, 혹은 (재)강화되는지 등을 종단적으로 추적하여 조사, 정리하는 작업이다(
간단히 말해, 이 연구는 ‘체육인’ 개념의 개념史 프로젝트를 만들어가는 출발점으로 기획한 하나의 공시적 분석이다. 구체적으로, 필자들은 광복 이후부터 제3공화국이 출범하기 이전까지의 시기(1945-1961)
자료 수집 및 방법과 관련해서,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에서 제공하는 데이터베이스를 통해 ‘체육인’으로 검색하여 총 338편의 기사(1945-1961)를 수집하였다. ‘체육인’의 어휘/단어/개념이 등장하는 1945년 이전의 기사는 단 3건에 불과하였으며, 그것이 사용되는 맥락 역시 체육과 관련된 주체들을 단순하게 지시하는 경우로 판단하여 분석 대상에 포함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총 338편의 기사 중에 ‘체육인’의 기표가 단순히 ‘체육과 관련된 주체’ 혹은 ‘체육에 종사하는 사람’ 등을 지시하는 경우, 예컨대 ‘체육인 다수’, ‘연희 체육인’ 등의 표현으로 기술되어 있는 기사들 또한 배제하였다. 최종적으로, ‘체육인’의 개념이 특정한 서사 구조 속에서 의미 작용을 하는 언어적 요소로 기능/역할하고 있는 칼럼형 기사 140편을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
필자들이 신문 기사들을 읽고 해석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점을 둔 사항은, ‘체육인’의 개념이 어떠한 언어적 ‘맥락’과 사회·문화적 ‘상황’ 속에서 언급, 사용, 활용되고 의미화되어 전송되는가의 쟁점이다. 특정한 개념의 의미와 역사성을 해석하는 데 있어 이러한 ‘맥락’과 ‘상황’을 고려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하나의 개념/단어도 그것이 어떠한 ‘맥락’과 ‘상황’에서 사용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언어학의 관점에서, 특정한 대상(text)을 ‘해석’한다는 것은 그것의 객관적인 실체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나타내거나 묘사하여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해석’의 작업은 대상(text) 그 자체가 지시하는 내용에만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배태하거나 혹은 그것과 다양한 방식으로 관련되어 있는 ‘맥락(context)’을 고려하여 그것이 매개하고 내포하는 상황적이고 관계적인 의미, 상징, 효과, 영향력 등도 함께 읽어내는 것이다.
이 ‘맥락적 해석’이야말로 개념사학자들이 개념史 연구의 요체로 지목하여 강조하고 있는 핵심 아이디어이다. 예컨대, Koselleck은 “텍스트 전체의 문맥, 저자와 독자의 상황, 그 시대의 정치, 사회적 상황, 언어 공동체를 이루는 동시대인들과 이전 세대의 언어 관행과 용법 등이 고려되어야 하며, 나아가 더 구조적인 경제학적, 사회학적, 정치학적 문제제기들이 수반”되어야 함을 피력했다. Koselleck의 제자이기도 한 Rolf Reichardt 역시 “개념의 사회적 대표성, 다시 말해 개념에 담긴 의미체계의 사회적 영향력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필자들이 진행하는 해석의 작업 역시 ‘체육인’ 개념에 대한 언어적 사용과 그 효과 등을 사회적 실재를 구성하는 다양한 맥락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이해해보는 것이다. 즉 과거를 살아간 사람들이 ‘체육인’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면서 표현하고자 했던 여러 의미의 행간이 무엇인지, 또한 그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그들의 경험, 기대, 욕망, 희망 등을 그 개념 속으로 유입시키며 의미 부여했는지, 아울러 ‘체육인’의 개념을 활용하는 서사 속에 어떠한 가치관, 심성 및 태도, 사고방식, 세계관 등이 흐르고 있는지 등을 사유하면서 해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해석적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 파악하고 고려해야 하는 구체적인 맥락은 무엇인가? ‘체육인’의 개념은 어떠한 언어적 맥락과 사회·문화적 상황 속에서 사용, 활용되었으며, 그 언어적 의미와 사회적 효과 및 영향력은 어떠했는가? 조금 더 구체적으로, 광복 이후부터 제3공화국이 출범하기 이전까지의 시대적 배경과 조건 속에서 사람들이 말하고 이야기하며 소통한 ‘체육인’의 의미는 어떠한 상징과 표상을 담지하고 있는 것이었는가? 또한, 그것은 당시의 한국 사회와 스포츠 세계에 어떠한 언어적 효과와 사회적 영향력을 제공하거나 매개하는 것이었는가?
필자들이 주목하는 핵심 ‘맥락’은, 해방공간과 건국 초기의 시대적 배경과 조건 속에서, 한국 사회가 새로운 주체로서의 ‘국민’을 호명하여 구축하던 이른바 주체 형성의 담론적 실제가 등장하기 시작한 국면이다. 꿈과 희망 그리고 혼란과 소요가 동시에 존재하고 있었을 당시, 한국 사회는 안으로 새로운 국가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면서, 밖으로 냉전체제의 국제질서에 적응해가던 시기였다. 이러한 과업을 수행하는 민족적/국가적 개인으로서 ‘국민’이라는 이름의 주체가 다양한 영역과 분야에서 호명되기 시작하였는데, 특히, 신문 및 잡지와 같은 출판 미디어는 이러한 ‘국민’ 주체의 형성을 추동하고 견인하는 이른바 주체화의 담론이 생산, 전송, 수용되는 지배적 공론장이었다(
단언컨대, ‘체육인’의 개념이 본격적으로 등장하여 소통, 정착된 흐름과 과정을 이해하는 것 역시, 이러한 민족적-국가적 차원의 새로운 주체가 호명되던 ‘맥락’ 속으로 위치시켜놓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당시의 체육·스포츠계는 새로운 국가 건설과 사회적 기반의 기틀이 조성되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체육’의 이상과 가치를 꿈꾸고 상상하며 실천하는 염원을 담아, 새로운 ‘체육 한국’의 출발을 위해 기지개를 켜는 상황이었다(
‘체육인’의 개념은 이러한 체육 관련 조직 및 경기의 실제와 관련된 사건과 현상 등을 보도하거나 탐사하는 기사들 속에서 자주 등장하고 있는데, 그것이 언급되는 양상과 패턴에는 크게 두 가지 기술적(descriptive) 특징이 두드러짐을 알 수 있다. 첫 번째 특징으로, ‘체육인’이라는 개념이 ‘사회적 대표성’을 띠는 수준의 대중적 어휘/용어로 ‘정착’되었다는 점을 감지할 수 있다. 예컨대, 한국 전쟁 기간 중 진행된 “체육인 등록”(
다른 하나의 패턴은, ‘체육인’의 개념이 포함된 서사가 항상 특정 주체들의 ‘집단적’이고 ‘집합적’인 성격을 의미하고 논의하는 특징을 띠고 있다는 점이다. ‘체육인’이라는 어휘/용어 자체가 특정한 사람을 지칭하는 대표성을 띠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특수하고 개별적이며 개인적인 사건과 현상도 ‘체육인’이라는 개념이 함께 사용되어 연결되는 순간, 서사의 구조는 즉시 집단화되면서 집합적인 차원의 정체성을 띠는 국면으로 전환된다. 이 지점이 바로, 필자들이 ‘체육인’ 개념의 쓰임새를 한국 사회 전반에서 일어나고 있던 주체 형성의 담론과 연결하여 맥을 짚어보고자 하는 곳이다. 즉, 해방공간과 건국 초기, 한국 사회가 호명하여 주조하고 있던 새로운 민족적-국가적 주체 형성의 담론이 ‘체육’을 포함한 다양한 분야의 실제 속으로 스며들어 지역적이고 미시적인 통치성을 행사하는 언어적 현상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이러한 판단과 접근방식을 토대로 필자들이 진행한 해석의 주요 골자는 다음과 같다. 먼저, ‘체육인’의 개념은 해방 공간과 건국 초기의 시대적 조건 아래 역사·정치·사회·문화적으로 호명되어 형성되던 새로운 민족적/국가적 주체의 표상이 ‘체육’이라는 실제 속에서 관계되고 매개되어 구현된 하나의 담론적 산물이다. 다시 말해, 자신들의 집합적 전문성과 집단적 소속감을 공유하는 특정 주체들이 당시의 한국 사회가 요구하고 있던 새로운 주체의 표상을 그들이 몸담아 관여하고 있는 분야인 ‘체육’의 실제 속으로 투영하여 상상하면서 공유한 언어적 구성물이 바로 ‘체육인’의 개념이다. 일제 강점기 시절의 고통과 아픔을 극복하고, 건국의 사명에 부합하는 발전의 초석을 다지고 이행하는 새로운 민족적-국가적 주체의 체육적 이상형(ideal type), 즉 체육적 주체로서의 ‘국민’이 바로 ‘체육인’이라는 개념이 탄생한 공시적 차원의 사회·문화적 맥락이다.
‘체육인’의 탄생, 즉 새로운 ‘체육 한국’의 건설을 주도하고 견인하는 민족적/국가적 주체로서 ‘체육인’이 호명되는 것은 곧 집합적 정체성의 본질과 실체를 규정하는 성격을 담고 있다. ‘국민’이라는 새로운 주체를 호명하는 담론의 실제가 사회 구성원들의 집합적 정체성을 부여하고 형성하여 결속하는 과정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듯이, ‘체육인’이라는 주체화된 개념 역시 특정한 사회적 집단의 주체들이 함께 이야기하고 소통하면서 공유하고 결속하게 되는 집합적 정체성의 (상상된) 표상이다.
여기에서 잠시, 누가 ‘체육인’의 개념을 선점하여 발화하는지에 대한 쟁점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다. 그들은 바로, ‘체육인’이라는 집합적 표상을 사용, 소통, 공유함으로써 자신들의 집단적 정체성을 특정한 방향으로 이끌어나가는 것을 선점, 기획, 추진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다시 말해, ‘체육인’이라는 개념 속으로 집어넣을 수 있는 지배적 의미(혹은 이데올로기)를 직접 생산, 전송하거나 개입하여 유인, 전환, 대체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결국, 담론 생산의 헤게모니를 가지고 있고 또 그것을 행사할 수 있는 특정한 집단적 주체들이 그들의 집합적 정체성을 특정한 방향으로 구성/형성해나가는 언어적 전략으로 활용하는 담론의 핵심적인 요소가 바로 ‘체육인’의 개념이다.
필자들이 해석한 결과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체육인’의 개념은 특정한 (체육 관련) 사회적 집단의 주체들이 자신들의 집합적 정체성을 특정한 방식으로 규정하고 정의하는 자기-재현의 언어이다. 구체적으로, ‘체육인’의 개념 속으로 유입되는 지배적 의미는 주로 ‘체육’ 혹은 ‘스포츠’야 말로 세계와 공정하게 경쟁하여 승리함으로써 한국을 알릴 수 있게 되는 문화 부문의 효자라거나, ‘체육인’(들)이야말로 순수하고 비정치적이며 강직한 사람들이자 건강한 신체와 건전한 정신의 소유자가 되어야 한다는 내용이다.
둘째, 이러한 ‘체육/인’의 지배적 의미/이데올로기는 다시 두 가지 감정이 교차, 대립하는 패턴의 서사 구조를 통해 강화된다. 한편으로, ‘체육인’의 개념은 체육인 집단 및 체육계 조직(실제)의 빛나는 성과와 업적을 표현하고 확인하는 서사 속에 등장하면서 ‘자부심과 긍지(pride)’의 감정을 공유하는 과정을 통해 ‘체육인’의 집합적 정체성을 긍정적으로 강화한다. 다른 한편으로, ‘체육인’의 개념은 부정적이고 불미스러운 사건과 행태들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서사 속에 등장하면서 ‘수치와 부끄러움(shame)’의 감정을 성찰하는 과정을 통해 다시금 ‘체육인’의 정체성을 복원 혹은 재인식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종합하자면, 이른바 자부심/긍지와 수치/부끄러움의 정치학(politics of pride/shame), 즉 두 가지 대립적 감정이 연속적으로 교차하면서 집합적 정체성을 관리, 구축, 강화하는 (자기) 재현의 정치학이 곧 ‘체육인’의 개념이 사용되고 활용되면서 만들어내는 수사적 효과이자 언어적 힘이다.
이상의 주장을 구체화하기 위해, 이하의 장에서는 먼저 ‘체육인’의 개념이 자부심과 긍지의 감정을 집합적으로 공유하는 서사들 속에 등장하여 기능하는 양상부터 서술하고자 한다.
‘체육인’의 개념이 사용, 이해, 소통되는 지배적 방식은, 그것이 새로운 민족-국가적 주체의 체육적 표상을 재현하고 구성하는 서사의 핵심어로 등장하여 기능한다는 것이다. 해방공간과 건국 초기, 한국 사회는 한편으로 국가 발전의 기틀을 마련함과 동시에, 또 다른 한편으로 그러한 과업을 추진하는 ‘국민’이라는 새로운 주체를 다양한 영역과 분야에서 호명하고 있었다. 체육 분야 역시 ‘체육계’라는 이름 아래 이러한 주체화 담론들이 양산되었는데, ‘체육인’의 개념은 그러한 서사와 담론 속에서 다양한 의미/상징/가치 등과 연결되고 결합하면서 특정한 주체의 모습을 표상하는 핵심어로 등장한다.
필자들은 이러한 서사적 패턴을 새로운 건국 주체로서의 ‘체육적’ 주체가 만들어지고 구성되는 일종의 주체화 담론으로 틀 짓는다. 이러한 담론 속에서, ‘체육인’의 개념은 크게 두 가지 의미의 주체를 표상한다. 하나는, 국가적 차원의 표상으로, ‘체육인’의 개념은 민족의 강인한 체위와 우수성을 상징하고, 세계를 향해 대한민국의 건재함을 알리며 국위선양에 앞장서는 주체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사회적 차원의 표상으로, “체육 정신”, “운동 정신”, “스포츠맨십” 등으로 표현되는 자유·민주적 시민으로서의 행동 양식, 태도, 가치관, 품성 등을 체화하여 실천하는 모범적 시민으로서의 주체이다.
종합하자면, ‘체육인’의 기표는 국가적 차원의 (체육적) 주체와 사회적 차원의 ‘체육적’ 주체를 동시에 접합하고 있는 표상이다. 즉 특정한 집단의 주체들이 해방공간과 건국 초기의 시대적 조건 속에서 그들의 집합적 정체성을 ‘국가적’이고 ‘사회적’ 차원을 고려하여 구성, 형성해나가는데 활용한 주체화의 언어적 산물이 곧 ‘체육인’의 개념이다.
이하에서는, 먼저 ‘체육인’의 개념이 민족-국가적 주체의 표상으로 서사화되는 내용과 양상부터 살펴보고, 이어서 사회적 차원에 대한 논의를 진행한다.
‘체육인’의 개념이 국가적 차원의 표상으로 서사화되는 주요 골자는, 1) 일제 강점기 시절 손기정 선수의 활약으로 대표되는 빛나는 체육 전통을 계승하고, 2) 전 민족의 강인한 체위 향상과 우수성을 상징하고 대변하며, 3) 세계를 향해 대한민국의 건재함을 알리는 국위선양의 주체가 바로 ‘체육인’이라는 의미이다. 특히, 이러한 아이디어와 메시지는 ‘체육인’의 개념을 통해 마치 구호처럼 사용되고 있으며, 집합적 주체의 사명, 결의, 책무 등으로 연결되는 감정적 어조를 드러낸다.
무엇보다, ‘체육인’의 개념은 삼천만 동포들의 자랑이기도 했던 손기정 선수의 직속 후예들을 의미한다. 예컨대, 당시, 조선빙상경기협회 이사 최용진의 칼럼, “강인성을 보이라”에서는, 해방을 맞이하고 새롭게 출발하는 ‘체육인’의 희망을 손기정 선수와 같은 이전 체육인의 업적을 되살리는 것에서 찾고 있다.
우리
바꿔 표현하자면, 건국과 함께 찾아온 ‘체육인’의 희망은 손기정 선수의 ‘슬픈 승리’이자 자랑스러운 과거를 다시 이 땅 위에 되살리는 것이며, 그것이 곧 ‘체육인’의 사명이자 책무라는 것이다.
이러한 ‘희망’의 서사가 ‘체육인’의 개념을 통해 표출되고 확인되는 것을 잘 살펴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사례는 1947년 제51회 보스턴 마라톤대회에서 서윤복 선수가 우승한 사건이다. 대회 한 달 전, 유수의 “애국단체”들은 한국을 대표해서 보스턴으로 가게 될 손기정, 남승룡, 서윤복의 출국을 축복하고 격려하는 메시지와 성금을 담은 공동성명을 ‘체육인’의 이름 아래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세계마라톤대회에서 손, 남, 서 세 선수를 특별히 초청한 것은
‘체육인’의 희망과 염원은 서윤복 선수의 승리로 큰 결실을 거두게 되었는데, 당시의 사람들이 이 사건에 대해 어떠한 의미부여를 했는지는 그동안 여러 연구와 대중 미디어를 통해 익히 알려진 바 있다.
예컨대, 동아일보는 체육 관련 주요 인사들의 감격이 담긴 목소리들을 실어서 보도하였는데, 당시의 문교부장이었던 유억겸은 “서[(윤복)]선수의 우승은 우리 관계자만의 기쁨이 아니다. 삼천만 전부의 것이다”라고 치하했다(
이러한 민족적, 국가적 경사를 자축하고 기념하는 다양한 목소리들 속에서, ‘체육인’의 개념은 서윤복 선수의 승리가 상징하고 표상하는 집합적 정체성의 의미를 다시금 확인하고 결속하는 구호로 제시된다. 예컨대, 경향신문은 “체육 조선의 진로”라는 제목 아래, 서윤복 선수의 승리가 “마라톤 왕국의 대의와 명분을 만천하에 뽐내”게 된 것임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체육인’의 개념을 ‘체육도(道)’라는 개념과 함께 언급하고 있다.
투지와 나라에 충성하고 동족을 사랑하는 단결력과 의협심을 생명으로 하는
비슷한 어조로, 동아일보의 한 칼럼도 서윤복 선수의 승리를 통해 국가건설과 민족 외교의 주체로서 ‘체육인’을 호명하고 있다.
건전한 국가는 건강한 국민에 재(在)하고 건강한 국민은
‘체육인’의 개념이 민족-국가적 주체로 호명되는 언어적 담론의 실제는, 3년 후 1950년 제54회 보스턴 마라톤대회에서 함기용, 송길윤, 최윤칠 세 선수가 각각 1, 2, 3위를 휩쓴 사건을 보도하고 이야기하는 서사 속에서도 자주 등장하였는데, 특히 국제관계와 외교적 측면에서 큰 의미를 부여하는 기사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대표적 예로, 경향신문은 ” 대외선전과 마라톤선수”라는 제목의 장문의 칼럼을 상, 하편으로 구분하여 2회에 걸쳐 게재하였는데, 그 칼럼은 세 선수의 승리를 “대외선전의 금자탑”을 쌓은 것으로 비유하면서, 이러한 국제외교의 선봉 역할을 하는 것이야말로 민족국가적 주체로서 ‘체육인’이 짊어지고 가야 할 책무라는 점을 다음과 같이 피력하고 있다.
우리의 스포츠는 보스턴 대회에 그칠 것이 아니다. 앞으로도 민주세계의 우방 국가 사이에 스포츠의 진출과 초빙이란 교환행사가 있어야 한다. [...]
이처럼, ‘체육인’의 개념은 “체육계”, “체육도(道)”, “스포츠도(道)”, “스포츠맨” 등의 개념/단어들과 연동하여 결합하면서 민족주의적이고 국가주의적인 성격의 서사와 담론을 구성하는 핵심어로 등장한다. 다시 말해, ‘체육’의 실제가 민족주의와 국가주의 담론으로 포섭되는 맥락 속에서, ‘체육’의 의미와 가치 그리고 민족-국가의 이념과 위상을 서로 연결하는 상징적 개념이 바로 ‘체육인’의 개념이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자주독립’의 이상과 ‘국위선양’의 과업을 체육의 실제 속에서 몸소 실행하고 구현해내는 투사로서의 집합적 주체이다. 그러한 개념 사용은 주로 그것을 발화하는 주체를 포함한 “우리”라는 수식어와 함께 동반되는데, 이러한 집단적 주체화의 개념은 ‘체육인’의 기표 안으로 집합적 정체성을 공유하는 주체들의 사회적 공헌을 공표하여 확인하고, 또 그들의 결속을 도모하는 자기-재현의 정치적 구호이다.
‘체육인’의 개념이 국가적 차원의 주체를 표상하는 내용은 이 정도로 갈무리하고, 지금부터는, 사회적 차원으로 주체로 의미화되는 양상을 서술하고자 한다. 간단히 말해, ‘체육인’은 건전한 정신과 건강한 신체를 소유한 이상적 주체인데, 구체적으로 두 가지 의미를 표상한다. 하나는, 1) 체육의 ‘대중화’를 견인하며 민족 체위의 향상에 앞장서는 리더이자 교육자이며, 다른 하나는, 2) 체육 정신”, “운동 정신”, “스포츠맨십” 등을 체화하여 실천하는 순수하고 긍정적이며 강인한 국민이다. 이러한 서사 속에서, ‘체육·스포츠 정신’은 자유민주주의 사회를 이끌어가는 민주적 시민 정신의 메타포로, 그리고 그러한 민주주의(=스포츠) 정신을 소유하여 실천하는 ‘체육인’은 이상적이고 바람직한 자유 민주국가 대한민국의 국민적 모델로 상징된다.
일단, 이러한 사회적 차원의 서사가 어떠한 골격으로 구성, 전개되는지 잘 알 수 있는 하나의 대표 사례부터 소개하는 것이 유익할 것 같다. 1946년 10월 20일, 해방 정국에서 미 군정 문교부장을 맡았던 유억겸은 경향신문에 “조선체육계에 기함”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기고하였는데, 주요 대목을 발췌하며 보면 다음과 같다.
한 국가의 소장이 국민의 기백의 강약에 달려 있음은 [...] 현실이 증명하여 주는 바이다. 그러면 국민의 [...] 기백은 무엇으로써 함양할 수 있을까? [...] 무엇보다도 그
덧붙이자면, 문교부장 유억겸은 해방 직후 국가 건설과 이를 위한 사회적 주체의 형성 요건으로 민족주의적 관점의 생활개선 혹은 신생활을 강조한 학자이기도 하다.
‘건강한 신체와 건전한 정신’의 문구는 비단 유억겸만의 개인적 표현이 아닌, 당시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흔히 소통되는 일반적인 상투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이 시대적 표어는 사회적 주체로서의 ‘체육인’을 호명하는 서사와 담론 속에서 예외 없이 등장한다. 예컨대, 조선탁구협회장 조동식은 체육을 “통일의 원동력”으로 지목하고, “체육인으로서 기대되는 것은 마음과 몸을 합한 정신적 통일이 된 건전한 정신의 소유자가 되는 동시에, 또한 건전한 육체의 소유자가 되어 달라는 부탁이다”라고 호소하였다(
사회적 주체로서 ‘체육인’이 수행해야 하는 ‘대중화’의 책무는, ‘건강한 신체와 건전한 정신’이라는 사명을 일반 대중들의 생활무대 속으로 이식시키고 실천토록 하는 일종의 과업으로 묘사된다. 예컨대, 해방 이후 첫 새해를 맞이한 1946년의 3월에, 조선체육회 회장 이병학은 조선일보에 “대중 본위로”라는 제목의 칼럼을 다음과 같이 기고하였다.
우리
또한, 조선일보는 아트레팀 구락부 회장 이인태가 기고한 “지도자를 고대”라는 제목의 칼럼도 같이 수록했는데, 내용인즉슨 “우리 체육인은 자아를 버리고 대중을 위하여 희생하는 것처럼 고귀한 것은 없다”라고 강조하면서, “지금 우리 체육계는 대선배로서의 지도자와 현역에서의 지도자를 기다리고 있다”라고 밝혔다(
그렇다면, ‘체육인’의 개념이 ‘건강한 신체와 건전한 정신’의 모토를 대중과 교육적으로 접속, 교감, 안내하는 사회적 주체로 서사화되는 핵심적인 ‘맥락’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20세기 중반 국제관계의 정치적 동학 속에서 한국 사회의 ‘비전’과 ‘국민다움’의 방향성을 사유하고 성찰하는 주체 형성의 담론이 대두하게 된 지형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주체 형성의 담론 속에서, ‘체육’은 문명국가와 선진국의 문화적 상징을 의미하는 ‘기표’로 자주 등장하였지만, 점차 그것이 내포하고 함의하는 ‘기의’는, ‘스포츠정신’, ‘스포츠맨십’, ‘운동 정신’, ‘체육 정신’과 같은 도덕적 에토스와 결합하기 시작하였다. 즉 한국 사회의 구성원들이 각자의 삶과 생활 속에서 이식하고 실천해나가야 하는 일종의 국민적 도덕의식이자 윤리관의 메타포로 확장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체육인’의 개념 역시 그러한 이상적이고 바람직한 성격의 국민 의식을 계발하여 직접 실천하고 모범을 보이는 국민적 역할모델의 사회적 주체로 사용, 이해, 소통되었다.
특히 이러한 성격의 주체 형성의 서사는 한국 전쟁 이후 더욱 크게 이슈화된 체육계의 파벌 문제, 그리고 다양한 형태로 우후죽순 터지기 시작한 불미스러운 사건들을 ‘이야기’하는 국면 속에서 더욱 두드러졌다. 다시 말해, ‘체육계’에서 일어나는 불미스러운 사건들을 마주하고 비판적으로 직시하는 성찰을 통해 ‘수치와 부끄러움’의 집합적 감정을 공유하여 교감하고, 나아가 새로운 민주사회의 주체로 활동하는 집합적 정체성을 재인식하고 결속하는 ‘자부심과 긍지’의 자기-구호로 변환되는 것이 바로 ‘체육인’의 개념이다.
‘체육인’의 개념이 특정한 사건 및 문제와 관련하여 집합적 반성과 성찰의 주체로 등장하는 서사의 내용과 양상을 서술하기에 앞서 한 가지 언급할 사항이 있다. 그것은 바로, ‘수치/부끄러움’의 감정을 공유하면서 집합적 정체성을 재인식/강화하는 패턴의 서사가 특정한 시기와 국면에 맞추어 갑자기 출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간단히 말해, 그것은 ‘체육인’의 개념이 사용될 때부터 항상 존재하고 있었다. 대표적 예로, 조선체육회 회장 이병학이 해방 이후 처음으로 맞는 새해인 1946년 정월 초에 체육 한국의 미래를 전망하고 역설하는 내용으로 조선일보에 기고한 칼럼을 들 수 있겠다. “건국 체육 이념”이라는 제목의 이 칼럼에는, ‘체육인’의 이름으로 집합적 성찰과 반성의 코드가 흐르는 문맥을 다음과 같이 발견할 수 있다.
체육이라 하면…. 곧 경기와 선수를 연상하게 되리만큼 체육은 전문화되고 특수화되어
그러나 체육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든지 민중 일상의 것이요
위의 인용문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유추할 수 있다. 하나는, 체육의 실제가 전문화되고 특수화되면서 특정한 사회집단군을 형성하게 되었지만, 대중 일반 사람들과는 유리된 성격이 크다는 점,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일부 사회층에 의해 독점”되는 “기형[적] 발전 형태”를 띠고 있었다는 점이다.
2개월 후, 조선일보는 체육 분야의 미래를 전망하는 주요 인사들의 글을 모아 수록했는데, 그들 중 하나인 당시 조선축구협회 상무이사 김화집의 칼럼, “체육은 즉 교육” 속에는, 해방 정국의 ‘체육계’를 비판적으로 진단하는 문제의식을 좀 더 구체적으로 엿볼 수 있다.
해방 후에 소위 체육지도자들이
위의 인용문이 지적하는 것은, 일부 체육 관련 인사들이 정치적이고 정파적인 활동을 일삼고 있는데, 그것은 ‘체육인’으로서 추구할 바가 아니라는 일종의 훈계이다.
이렇듯, ‘체육인’의 개념은 ‘체육’과 관련된 부정적 의미가 생산, 소통되는 맥락 속에서 자주 등장하는데, 그러한 서사들은 주로 1) 부정적이고 바람직하지 못하며 불미스러운 사건과 행태 등을 들추어 고발하고, 2) 그러한 실태와 실상이 개인의 문제가 아닌 ‘체육인’ 전체의 ‘수치/부끄러움’을 사는 의미임을 환기한 다음, 3) ‘체육인’의 본분, 사명, 책무 등을 다시 강조하는 구조와 흐름으로 구성된다. 이러한 서사 구조를 통해, ‘체육인’의 개념은 ‘수치/부끄러움’의 집단적 감정을 공유하고 다시금 집합적 정체성을 확인, 결속, (재)강화하는 자기-재현의 언어적 장치로 기능한다.
특히, ‘체육인’의 ‘수치/부끄러움’을 불러일으키는 원흉으로 자주 제기된 사건, 현상, 행태 등은 주로 다음의 네 가지 패턴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것들은 바로, 1) 개인 및 집단적 주체들 간의 분규, 알력, 파벌과 같은 분란, 2) 해외 원정과 관련된 비상식적이고 파렴치한 추태, 3) 구타 및 폭력과 같은 일상적 난동과 폭행 사태 등이다. 이하에서는, 필자들이 시간적 순서를 고려하여 ‘체육인’의 개념이 등장하는 패턴과 기능 등을 정리하여 재구성하였다. 1948년 런던올림픽을 시작으로, 대한체육회가 제3공화국의 출범 아래 새로운 시작의 전기를 마련한 1961년 9월까지의 시기를 다루고 있다.
먼저, 1948년 런던올림픽의 경우, 두 가지 쟁점이 주요 화두로 떠올랐다. 하나는, 마라톤선수들이 참패한 원인이 선수 및 코치들 사이의 분규와 불화 때문이었다는 의혹이며, 다른 하나는 올림픽 후원권의 발행으로 마련되어 지급된 선수단 지원 명목의 국민 성금의 지출을 둘러싼 논란이었다. 예컨대, 경향신문은 “올림픽 패인의 구명”이라는 제목의 장문의 칼럼을 세 차례로 나누어 게재했는데, “합심하지 못한 것이 화근, 사리사욕에 움직인 선수”라는 부제 속에 그 대답이 들어있다. 칼럼의 내용은, 시합 전 연습 기간 중의 합숙 생활에서부터 불화가 시작되었고, 지도자들도 둘로 나뉘어 합심을 도모하지 않았으며, 실제 경기에서까지도 선수들은 개인행동으로 경기에 임했다는 것이다. 이 점들을 조목조목 따진 뒤, 칼럼은 다시 다음과 같이 토로하고 있다.
이 상태에 비추어 어찌 우승을 바랄까보냐? 집안에서 새는 바가지가 들에 가서도 샌다는 격언도 있거니와 이 격언이 바로 우리 선수단을 두고 말한 것 같기도 하다. 설사 국내에서
풀이하자면, 마라톤 참패의 원인은 선수 및 지도자들 사이의 “알력과 불화”에 기인한 것이며, 우리의 선수들이 경기에서 보여준 “개인행동”들은 “스포츠맨의 행동”과 대치되는 “오점”이자 곧 “명예롭지 못한 일”이라는 것이다.
한편, 동아일보는 올림픽 후원권으로 마련된 성금 지출에 대한 의혹을 제기했다. “해방 조국의 이름을 해외에 널리 알려 체육 한국을 통하여 세계 각국과의 친선과 우위를 두텁게” 하기 위해 “우리 민족의 남녀노소가 너나 할 것 없이 주머니를 떨어 [...] 올림픽 후원권을 서로 권유하면서 샀던 것”임을 환기하면서, 다음과 같이 쓴소리를 했다.
그네들이 일단 고국에 돌아오면 마땅히 일반 민중에게 올림픽대회에서 활동하던 경과를 보고하며 대회의 경비는 얼마나 썼다는 것도 보고하여야 옳음에도 불구하고, [...] 6개월이 지난 오늘날까지 하등의 보고가 없다는 것은 규율과 예의를 굳게 지키는
위의 인용문이 시사하듯, 전 국민의 기대와 헌신 그리고 애정을 담아 마련한 거대한 후원금에 대한 정확한 지출내용과 경과를 공개하는 것이 곧 “규율”에도 어긋나지 않고 “예의”에도 부합하는 이른바 “체육인이 취할 행동”이라는 의미이다.
런던올림픽 선수단과 관련된 불미스러운 사건은 선수단이 귀국하는 상황에서도 불거졌다. 경항신문은 귀국 환영 행사에 참석한 한 주요 인사의 칼럼을 전하고 있는데, 요지인즉슨, 세관 검사에서 “수입 금지품”을 잔뜩 담은 여행 가방으로 조사를 받은 “스포츠 사절”답지 못하고 “뻔뻔스러운 임원선수”들이 있었으며, 환영회장에서는 한 임원과 선수 사이에 “돈의 대차 문제”로 기인한 난투극의 “추태”도 있어 “비열과 증오”가 “용솟음”쳤다는 내용이다(
1948년 런던올림픽을 둘러싼 의혹과 비판은 이듬해인 1949년 제53회 보스턴세계마라톤대회의 선수파견 문제, 일명 ‘김포공항 난투극’ 논란으로 이어지면서 더욱 증폭되었다. 사건의 경위를 간략히 요약하자면 이렇다. 원래의 계획은 4월 19일 미국의 보스턴에서 개최되는 대회의 일정을 고려하여, 선수 3명과 감독 및 인솔 3명으로 구성된 총 6명의 선수단을 2월 6일에 파견하기로 했었다. 그러나 “여비 문제와 선수단 간부 선정의 문제로 옥신각신”하여 3월 21일과 28일 그리고 4월 4일까지 미루어지다가 급기야는 4월 11일까지 연기를 거듭하게 된 것이다. 이 와중에 몇몇 구성원들이 출전을 고사하면서, 문제가 다시 일어나는 듯했으나, 이어진 일련의 합의 속에서 결국 출국일이 11일로 추진되었다. 그러나 정작 출국 당일, 또다시 파견단 인원과 선정 문제로 김포공항에서 서로 주먹을 치고받으며 유혈이 낭자하는 난투극이 일어난 것이다. 그 와중에 선수단은 다시 둘로 갈려, 일부는 서울로 돌아가고, 또 다른 일부는 비행기를 타고 출국하는 촌극이 펼쳐졌다.
결국, 이 사건은 이승만 대통령까지 개입하게 되는 지경까지 연출되었는데, 동아일보에서 전한 대통령 담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국제운동경기대회에 선수를 파송하는 것은 국권 회복에 대한 중대한 조건이다. 그러나 불행이 운동단체와
이렇듯, 대통령의 전면 출전 금지 조치로, 일본에서 머물고 있던 일부 선수단 인원이 다시 귀국함으로써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이리하여, 1949년 제53회 보스턴 마라톤대회는 한국 마라톤의 역사 속에서 비어 있는 한 페이지로 남게 되었다.
사건이 수면 위로 공개되면서, 언론들은 일제히 건국 초기의 무책임한 ‘체육인’과 ‘체육계’를 질타하는 쓴소리들을 쏟아냈다. 구체적으로, 동아일보는 “보스턴마라톤 파견에 추태, 김포공항서 유혈극, 체육계 정화가 시급”이라는 제목으로, 그리고 조선일보는 “분규를 거듭하는 체육계, 출발 직전에 난투극, 보스턴대회 출장문제로”라는 헤드라인으로 사건의 전말과 심각성을 상세하게 보도했다(Chosun Ilbo, 1949. 4. 13;
돌이켜보건대 국내의 각종 운동경기에서는 거의 대회 때마다
위의 인용문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체육인’의 개념은 김포공항의 난투극을 통해, 모골을 서늘케 하고 상상도 못 할 그런 ‘수치/부끄러움’의 감정을 느끼고 공유하는 집합적 주체로 제시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다시 강조되고 있는 것은 ‘체육인’의 (긍정적인) 집합적 정체성을 확인하고 회복하는 과정이다. 다시 말해, “신성한 운동경기장”에서 “모략”과 “중상” 없이 국가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순결”하고 “강직”한 주체가 바로 ‘체육인’이다.
경향신문 역시 “부패된 체육계의 이면”이라는 제목의 장문의 칼럼을 3회에 걸쳐 연재했다. 칼럼은 이 사건이 “불상사”의 차원을 넘어 “세계적인 수치”를 사게 되면서 “한국의 체육계”가 “일대 위기에 직면하고 있”음을 강조했다. 구체적으로, 경향신문은 이 사건이 “결코 우연한 사실이 아니며 돌발적인 사고도 아닌 곪을 대로 곪은” 일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과거에서부터 지속하고 있는 ‘체육계’의 “부패”를 조목조목 지적하고 있다. 요컨대, 해방 이후 “좌우익의 정치 이념이 침투되어 조선체육회는 체육회대로 그 산하단체인 각 협회 연맹은 제각기 분열과 투쟁”을 계속해왔으며, 그것이 곧 “런던올림픽 출전 [관련] 체육계의 암투”로 이어졌고, 다시 보스턴마라톤대회 출전 문제로 폭발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진단을 통해 칼럼니스트는 “귀여운 자식 동생 종아리 때려 잘 되라는 격”의 비유를 들고, “썪어진 우리 체육계”에 대한 쓴소리임을 밝히며 다음과 같이 마무리한다.
이처럼, ‘체육인’의 개념은 ‘체육계’와 함께 집합적 수치의 감정을 공유하고 아울러 (긍정적인) 집합적 정체성을 다시 환기하는 메시지의 서사적 주체로 등장한다.
이러한 패턴의 서사는 한국 전쟁 이후에도 계속 등장한다. 1952년 헬싱키올림픽 선수파견 문제로 대한체육회와 대한올림픽위원회가 서로 갈등을 겪는 사건이 논란이 되었는데, 조선일보의 한 사설은 다음과 같이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올림픽 선수파견에 제하여 체육회 내에
흥미롭게도, 이 사설은 ‘체육인’의 개념을 “사이비 체육인” 그리고 “건망증 체육인”과 대조시키고 있다. 쉽게 말해, ‘체육인’은 “단순”, “겸허”, “솔직”한 “페어플레이”를 하는 주체이고, ‘사이비/건망증 체육인’은 파벌로 나뉘어 싸움을 일삼는 주체들이다.
1956년 제16회 멜버른 올림픽대회에서도 선수단 파견 문제로 인한 비판의 목소리들이 언론사들로부터 쏟아져 나왔다. 경향신문의 한 칼럼은 “국민은 다량 파견을 원치 않는다!”라는 첫 문장과 함께, “체육계에 인망이 부족한 사람이 혹은 무능한 사람이 [임원] 진에 끼었느니 또는 승산도 없는 선수들을 왜 보내느니 하는 비난 소리를 듣게 되니 체육인의한 사람으로 이를 들을 적마다 불쾌하기 짝이 없다”라는 쓴소리와 토로를 함께 실었다(
수치와 부끄러움의 서사는 비단 올림픽을 비롯한 국제대회의 선수파견에 관한 쟁점뿐 아니라, 국내의 스포츠 일상에서도 한결같이 등장하고 있다. 여기에는 특정한 패턴이 있는데, 주로 전국체육대회와 같은 대규모 행사를 기획, 준비, 운영하는 데 있어 몰상식적인 수준의 작태를 드러내거나, 경기장 폭력과 난동의 추태 등이 ‘체육인’의 수치와 부끄러움을 일으키는 행태들이었다.
몇몇 기사들의 내용을 추려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1952년 전란의 와중에도 뜻깊게 개최된 제33회 전국체육대회에서는 무성의한 대회 운영과 예산 및 경비 사용의 문제 그리고 수차례의 폭력 사건과 난투극이 일어났다. 이에, 조선일보는 “찾을 길 없는 체육정신”이라는 제목 아래, “대한체육사에 오점을 남긴 것”은 물론, “전 체육인들의 굴욕이요 대한의 수치”라고 표현하고 있다(
또한, 전국체육대회의 경우, 경기장 폭력 사태에 관한 기사들이 해마다 줄지어 보도되었다. 몇몇 예를 들어보자면, 1952년, 동아일보는 “반목갈등의 체육계”라는 제목 아래, 제33회 전국체육대회 행사의 준비와 운영 속에서 일어난 “체육회 간부들 간의 갈등”과 “알력” 그리고 “경기 진행에서의 추태” 등을 보도하였으며(
한편, ‘체육인’의 개념이 수치와 부끄러움의 서사 속에 등장하는 것은 특정한 사건이나 문제를 다루는 단발적 보도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컨대, 경향신문은 체육회의 사업비를 후생비로 마구 쓰는 체육인들을 “팔자 좋은 양반들”이라고 비유하며 “수입 없는 지출”만 존재하는 행태를 “체육계의 불가사의”라고 비꼼과 동시에(
특히, 수치와 부끄러움의 서사는 한 해를 정리하거나 새해의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맥락에서 자주 등장하였다. 경향신문은 1952년 한해를 정리하는 “체육 편”의 코너에서, “깨끗해야 할 스포츠맨십을 완전히 땅에 떨어뜨린 해였고 떨어진 스포츠맨십을 또다시 짓밟고 비비고 한 해”였음을 강조하며 “내분과 허식의 일년”으로 평가하였다(
근본적인 원인을 따진다면
동아일보도 건국 및 창립 10주년을 맞이한 1958년에 “건국 10년의 체육계”라는 칼럼을 통해 “화려한 것처럼 보이는 체육계의 10년사 뒤에도 추악한 트러블도 적지 않았”음을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보스턴 마라톤 행에 앞선
수치와 부끄러움의 감정을 집합적으로 공유하는 ‘체육인’ 개념의 서사는 건국 및 체육회 창립 10년 이후에도 계속 등장하고 있는데, 특히 대한체육회의 임원 구성을 둘러싼 문제로 크게 분출되었다.
이른바 ‘대한체육회 분규’라는 이름으로 회자된 사건의 내용은 이렇다. 1959년 1월 19일과 20일, 대한체육회는 정기 전국평의원회를 열고 새로운 집행부를 선임하였는데, 이기붕 회장이 평의원 직후 사의를 표명하고 건강상의 이유로 칩거를 시작하였다. 이에 신임집행부는 이 회장의 사의를 만류하고 재가를 받는 노력을 수차례 시도하였으나, 별다른 성과 없이 수개월 동안 임원진의 공백 상태만 지속하게 되었다. 2년 전 1957년 총회에서도 이 회장이 사의를 표명했다가 다시 임시총회를 열고 새로운 임원을 추가로 선임하고 사의를 철회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번 사건에 대한 처리와 해결 역시 새로운 신임집행부를 계속 유지할 것인지, 새로운 회장단을 추대할 것인지, 회장의 사의를 만류하고 다시 새로운 신임집행부를 꾸릴 것인지 등의 문제들을 둘러싸고 다양한 말들이 오고 갔다.
언론들은 일제히 체육회의 공백을 지적하고 분규를 비판하는 목소리들을 쏟아냈다. 그러한 내러티브들 속에서 ‘체육인’의 개념은 크게 두 가지 양상으로 ‘주체화’되는 패턴을 드러내는데, 하나는 파벌과 암투로 얼룩진 수치와 부끄러움을 집합적으로 공유하는 주체,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러한 감정의 공감을 통해 다시 체육의 순수성을 자각하고 환기하는 주체이다. 몇몇 구체적인 대목들을 나열하자면 다음과 같다.
먼저 조선일보는 “스포츠 진흥과 체육회 파쟁”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통해, “너무나 뿌리 깊은 체육회의 파벌”을 지적하며, “체육인들 간에 암투가 계속되는 한 누가 집행 진에 들어가 있든 간에 반드시 반대파가 있어 [...] 비난을 일삼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체육인들의 분규와 체육계의 혼란은 수습될 겨를도 없이 1960년 4·19 이후 이승만 정권의 퇴진과 맞물리면서 한층 더 심각해졌다. 조선일보에 의하면, 이기붕 회장과 신도환 부회장의 자연 사임으로 야기된 “체육계의 혼란기를 이용하여 체육인들은 제각기 대한체육회를 위하여 일해보겠다고(상무 이사 자리를 말함) 날뛰고들 있는가 하면 벌써 모모 인사들은 제각기 회장단에 추대한다고 들먹거리고 있는 실정”이었다고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언론들은 체육인들의 성찰과 체육계의 혁신을 요구하는 목소리들을 내놓았다. 예컨대, 경향신문은 “국내 체육계 정비가 최대의 끽긴 과제”이며(
이러한 내러티브들은 주로 다음의 세 가지 아이디어들이 결합하는 구조의 패턴을 띠고 있다. 먼저, 체육인들의 파벌과 종파성의 추태를 설명하고, 이어서 이러한 문제점이 ‘체육 정신’이나 ‘운동 정신’과는 거리가 먼 ‘체육인’답지 못한 것임을 강조하며, 아울러 그동안 체육인들과 체육계가 정치와 깊숙이 연관되어 왔기 때문임을 확인함과 동시에,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체육의 비정치성과 순수성을 회복하는, 즉 체육인 본연의 모습과 자세로 되돌아갈 것을 주장하는 내용이다. 이러한 패턴을 잘 보여주는 한 예로, 조선일보가 “체육계의 정화를”이란 제목으로 보도한 한 칼럼의 내용을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체육계의 정화가 필요하다는 주장은 제3 공화국이 출범하는 과정에서도 등장하였다. 5·16 이후 한 달이 지난 1961년 6월 16일, 새롭게 임명된 문희석 문교부 장관은 60여 명의 체육 단체 대표자 및 체육지도자들과의 회의에서 5가지 요망사항을 발표했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경기의 승패뿐만이 아니라 스포츠맨십을 길러 내야겠다.” 둘째, “국민 반공 태세를 완비하기 위한 기초가 되는 국민의 체력을 향상시켜야겠다.” 셋째, “몸과 정신을 튼튼히 하여 인간개조를 이룩해야겠다.” 넷째, “국제경기는 관광 사업적인 역할이 되어서는 안 되겠으며 선수단 선발에 있어서도 정치적 개입을 막아야겠다.” 다섯째, “체육 단체 혁신을 위해서는 체육인이 주동이 되어야 하며 어떤 정치적 요소도 제거해야겠다”는 내용이었다(
경향신문은 이 소식을 전하면서 “국민 체위향상과 체육 발전책”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통해, “모든 부정과 구악을 일소하려는 5·16 혁명은 당연히 체육과 체육단체의 정화에 착수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라고 전하며 다음과 같이 ‘체육인’들에 대한 당부를 전하고 있다.
과거 일부
얼마 되지 않아, 체육계의 정화를 향한 열망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했다. 대한체육회는 그동안의 긴 리더십의 공백을 깨고, 5·16 이후 4개월 만에 처음으로 새로운 회장을 맞이했다. 1961년 9월 15일, 김동하 회장은 취임사에서 첫째, “체육회는 앞으로 양심적이고 근실한 체육인으로 단결”할 것이며, 둘째, “세계적 선수를 양성하여 대외적으로 국위를 선양”하고, 셋째, “대내적으로 국민 전체의 체육 향상을 목표로 하”며, 넷째, “단시일 내로 종합 실내경기장을 시설하겠다”라는 취임 포부를 밝혔다(
지금까지, ‘체육인’의 개념이 해방공간과 건국 초기의 시대적 배경 속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하여 소통되면서 사회적 대표성을 얻어간 언어적 양상과 맥락에 대해 살펴보았다. 구체적으로, 개념史란 무엇인지, 그리고 개념史가 전제하는 ‘개념’의 의미에 관해 설명하였으며, 이어서 왜 체육인의 개념을 개념史의 접근과 관점에서 분석, 해석할 필요가 있는지의 문제의식을 피력하였으며, 아울러, ‘체육인’의 개념을 해석하는 관점과 방법도 소개했다. 이러한 이론적 관점과 배경에 이어, 신문 칼럼에서 보이는 ‘체육인’의 담론을 크게 두 유형으로 구분하여 서술했다. 하나는, 긍정적인 담론으로, ‘자부심/긍지’의 감정을 집합적으로 공유하는 양상의 내용과 성격, 그리고 다른 하나는, 부정적 담론으로, ‘수치/부끄러움’을 통한 성찰을 통해 집합적 정체성을 회복하고 재확인하는 양상의 내용과 성격을 정리하였다.
요컨대, 언어적 구성물로서의 ‘체육인’ 개념은 체육이 관계하고 있는 사회적 실재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이중적 관계의 상호작용 속에서 탄생한 언어이다. 한편으로, 그것은 일제 강점기 시절의 체육 전통을 이어나가고 건국의 흐름에 부합하는 발전의 이식을 동시에 추진하던 시기에, 새로운 민족적-국가적 주체의 체육적 표상을 발명하여 공유한 자기-재현의 언어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불미스러운 사건들에 대한 수치와 부끄러움의 감정을 함께 반성하고 성찰하는 의식을 통해 (긍정적인) 집합적 정체성을 다시 회복하고 재확인하는 역할을 하는 정치적 언어이다.
끝으로, 이 연구를 마무리하면서 두 가지 사항을 제언하고자 한다. 첫째, 필자들은 우리의 연구가 ‘체육인’ 개념에 대한 다양한 공시적 분석과 통시적 분석을 끌어내는 것뿐만 아니라, 다양한 체육 관련 개념들에 대한 개념史 연구의 지형을 형성하는 조그만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무릇, 인간의 (스포츠) 역사 속에는 항상 변하지 않고 그대로인 것들도 존재하고, 또 늘 변하기 마련인 것들도 있다. 따라서(스포츠) 역사연구 중에는, (스포츠) 역사 속에 존재하는 고정불변하는 것들을 찾아서 드러내고 그것들의 법칙과 패턴 등을 밝히고자 하는 연구도 중요하고, 시대적 배경과 조건 속에서 특정한 국면과 맥락을 띠고 형성하며 변화하는 역동성을 추적하는 연구들도 필요한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이 연구는 ‘체육인’ 개념이 탄생하게 된 맥락을 살펴본 일종의 공시적 분석의 개념史 연구이다. 따라서 ‘체육인’의 개념에 어떠한 의미 변화와 지속이 있었는지를 질문하면서, 공시적 분석의 축적과 통시적 분석의 아우름을 함께 추진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스포츠와 관련된 다양한 개념(들)의 의미가 변화하고 지속하는 구조와 흐름 속에 관계하고 있는 다양한 역사적,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맥락과 언어적 담론의 지형 등을 공시적/통시적으로 접합하여 ‘개념’에 대한 개념 사용의 역사를 완성해 나가는 것이다.
필자들의 두 번째 바램은 한국의 체육과 스포츠를 ‘역사화’하는 학술적 활동, 즉 ‘스포츠 역사하기(doing a sport history)’의 본질과 성격에 관한 것이다. 이 글의 전반부에서 설명하였듯이, 이 연구의 목적과 성격은 역사 속을 살아간 ‘체육인’이 과연 ‘누구’였는지를 정확하게 분간하여 가려내기보다는, 그들이 과연 ‘어떠한’ 사람이었을지를 이해해 보고 해석하는 작업이었다. 부족하지만, 이 작업을 마무리하면서 강조하고 싶은 한 가지 포인트는, 필자들 역시 과거를 살아간 ‘체육인’들에 대해 그들을 향한 자랑스러움, 존경, 그리고 경외감만큼이나 부끄러움, 반성, 그리고 착잡함도 함께 느낄 수 있었다는 점이다. 혹시 이것이 연구자의 객관성을 저해하는 심각한 요소인지, 아니면, 다양한 사료들의 흔적과 발자취 속에서 과거를 살아간 사람들의 일상적 생활, 감정, 정서, 의식, 마음의 태도 등을 읽어내는 ‘문화史 (cultural history)’와 접속할 수 있는 개념史의 유의미한 특징이 될 수 있는 것인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 명확한 것은, ‘한국체육史’ 혹은 ‘한국스포츠史’라는 이름 아래 ‘역사화’되어 생산, 유통되고 있는 지식과 정보 중에는 유독, 아니 획일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과거를 살아간 사람들의 스포츠 흔적, 발자취, 행적 등을 ‘자부심’과 ‘긍지’의 감정으로 틀 짓는 서사들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조금 극단적인 표현일지 모르지만, 단언컨대, 우리의 체육·스포츠史를 만들고 구성하고 보존, 전승하는 학술적 실제 속에는, 비판적 문제의식으로 역사적 반성과 성찰을 추구하는 작업이 거의 없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 속에는 자랑스러운 것도 있고 부끄러운 것도 있기 마련이다. 오늘의 현재를 낳은 과거 속에도 자랑스러운 것과 함께 부끄러운 것 또한 있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과연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과거들은 그 자체로 나쁜 것인가? 다시 말해, 그것들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아무런(역사적) 의미가 없는 것인가? 생각해보건대,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과거 그 자체가 나쁘고 의미 없는 것이라기보다는, 그것들을 인지하지 못하고 성찰하지 못하는 것이 곧 역사 앞에서 부끄럽고 수치스럽게 되는 일일 것이다. 우리의 (스포츠) 과거 속에 존재하는 많은 수치와 부끄러움의 흔적과 자취들이, 다양한 (스포츠) 역사학자들의 비판적이고 성찰적인 안목과 통찰을 통해 ‘역사화’되는 지식 생산의 문화가 가까운 미래에 조성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마친다.
필자들은 이 연구의 주제어인 ‘체육인’을 개념사적 접근을 따라 ‘단어’와 구별된 것으로서의 ‘개념’으로 인식한다. 그러한 이유와 배경에 대해서는 2장에서 논의하였는데, 해당 부분에 다가가는 동안, 일단 ‘체육인’의 용어를 ‘개념’ 혹은 ‘단어’를 포괄적으로 지시하는 차원에서 ‘개념/단어’로 표기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듣고 말하면서 사용하는 어휘 중에는, 그것이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것을 사용하고 활용하는 상황과 맥락을 통해서 그 쓰임새를 잘 이해하고 있는 개념/단어들이 많다. ‘체육인’의 개념/단어 역시 정의하기 어려운 점이 있지만, 그것이 사용되는 ‘맥락’에 초점을 두고 해석해본다면, 그것 역시 ‘체육인’의 의미를 잘 이해하게 되는 또 하나의 방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Koselleck은 ‘국가’ 개념의 예를 들어 설명한다. ‘국가’라는 단어가 개념이 되기 위해서는 ‘통치’, ‘영토’, ‘시민’, ‘입법’, ‘사법’, ‘행정’, ‘조세’. ‘군대’ 등 독자적인 함의를 갖는 다양한 실상 혹은 사태들이 그 단어 속으로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연구에 의하면, ‘체육인’ 개념의 넓은 의미는, “체육 활동을 업(業)으로 하여 국민의 건강, 즐거움, 여가, 국위선양 등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데 공헌하는 사람으로서 체육 활동을 직접 수행하거나 지원 및 지도하는 사람”이다. 또한 좁은 의미로는, “체육 활동을 업(業)으로 하여 국민의 건강, 즐거움, 여가, 국위선양 등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데 공헌하는 사람으로서 「국민체육진흥법」제2조 제4호에 따른 선수 또는 같은 조 제6호에 따른 체육지도자로서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사람”으로 정의하고 있다(
지금까지 논의한 단어와 개념의 구별을 토대로, 이하부터는 ‘체육인’을 ‘단어/개념’이 아닌 ‘개념’으로 표기하면서 서술한다.
Koselleck은 ‘민족’, ‘문명’, ‘제국주의’, ‘전쟁’ 등과 같은 115개의 기본 개념 항목을 선정하여 7,000쪽에 걸친 방대한 분량으로 서술한 『역사 기본개념』이라는 일종의 개념 사전을 편찬하였다. 본문에서 언급한 ‘개념사 프로젝트’를 ‘체육인’의 개념과 연관시켜볼 때, ‘체육인’ 개념에 대한 공시적 분석과 통시적 분석이 결합된 일종의 ‘체육인 개념사 프로젝트’를 상상할 수 있다.
1961년을 경계로 설정한 이유는 이어지는 ‘각주 7번’에서 설명하였다.
이 지점에서, 왜 필자들이 공시적 분석의 시기를 1961년까지로 국한하는지 언급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상술하였듯이, 해방공간과 건국 초기에 ‘체육인’의 개념이 활용되는 주요 맥락은 민족-국가적 주체를 호명하는 담론과 깊은 관계가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필자들은 군사정부로 상징되는 제3공화국의 출범이 지배적 주체화 담론의 교체 혹은 대체가 일어나는 일종의 전환적 국면 혹은 변곡점이라 판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