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론
연구방법
연구 참여자 및 제보자
자료 수집
Table 1.
Interview with research participants and informants
자료 분석 및 진실성
장창선의 금메달 획득 과정
계체량 통과를 위한 사투: 절식·과도훈련·탈수에 의한 체중 감량
평상시 체중은 58kg 정도인데, 세계선수권대회에 나갈 때는 출전비가 모자라 선수들이 직접 마련하다 보니 운동을 제대로 못 해서 60kg 정도 나갔어요. 아마 8kg 정도 뺀 것 같아요. 뭐 3~4kg 빼는 것은 문제가 안 되는 데 그 이후부터가 문제죠. 어쩌겠어요. 물과 음식을 더 줄이고, 강도 높은 운동으로 죽기 살기로 빼는 거죠. 아마 털리도에 도착해서 시합 전 1주일 정도 나머지 4kg 정도는 뺐을 거예요. 근데 음식이 양식이라 입에 맞지 않아서 엄청 힘들었어요. 그래도 어렸을 때부터 못 먹어가면서 신문 배달, 아이스케끼, 찹쌀떡을 팔려고 이리저리 뛰고, 운동해서 체중 감량을 한 것이 몸에 배서…. 힘들지만, 그 정신으로 땀이 많이 나오도록 운동을 더 열심히 해서 체중 빼고, 그렇게 체중을 줄인 거죠(장창선과의 인터뷰, 2012년 1월 7일).
금메달 획득을 위한 사투: 메달획득에 대한 강한 의지와 혹독한 훈련 감내
Table 2.
Game rule of ‘bad mark system’
Basic score |
Win by default/fall |
Win by decision |
Draw |
Loss by decision |
Loss by fall |
---|---|---|---|---|---|
6 point |
no deduct |
1 point deduct |
2 point deduct |
3 point deduct |
4 point deduct |
아시안게임은 하라다, 올림픽은 요시다, 이렇게 두 번이나 일본 선수에게 져서 2위를 했어요.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반드시 일본 선수를 이기고 우승하겠다는 각오로 경기에 임했어요. 많은 국민의 성원과 어렵게 뒷바라지해 주신 어머니께 보답하는 일이라 생각했어요. 사실, 가쓰무라와의 경기는 결승전이라는 각오로 했지만, 무승부로 끝나서 아쉬웠어요. 하여튼 그 경기에 최선을 다했고, 가장 힘든 경기였어요(장창선과의 인터뷰, 2012년 1월 15일).
1964년 도쿄 올림픽 일본 대표 선발전에서 요시다에게 1대 0으로 져서 출전을 못 하고, 고마자와 체육관에서 장창선 선수와 요시다 선수가 경기하는 것을 지켜봤어요. 한국에도 저런 강한 선수가 있구나! 라는 생각을 했는데,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다른 선수들과 경기하는 것을 보고 또 한 번 놀랐어요. 특히 2회전 경기에서 가볍게 폴로 이기는 것을 보고 제일 강하고 어려운 상대라고 느꼈어요.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생각과 우승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함께 했어요(가쓰무라와의 인터뷰, 2016년 9월 16일).
Fig. 1.
Competition scene with Katsumura
Sources: Katsumura Yasuo presents

저는 유도를 하다가 고등학교 때 스승님의 권유로 레슬링으로 전향했어요. 장 선수와의 경기에서도 유도 기술을 접목해서 먼저 2점을 획득했어요…. 제가 느끼는 장 선수는 체력이 강할 뿐만 아니라 기술에 대한 대처능력이 뛰어나고 매우 빠른 선수예요. 메뚜기처럼 순식간에 날아들어요. 특히 태클 공격이 매우 빠르고 강해서 상대하기 힘들었어요(가쓰무라와의 인터뷰, 2016년 9월 16일).
영상으로 창선이와 가쓰무라의 경기를 다시 보니까 꼭 이기기를 마음졸이며 지켜본 기억이 나네요. 시작하자마자 창선이가 태클로 공격했는데 그때 당시는 라인 밖이나 수비만 해도 점수를 주지 않았어요. 지금 같으면 이긴 경기인데 참 아쉽죠. 창선이의 체력과 태클 공격은 굉장했어요. 시합만 들어가면 10분 내내 지칠 줄 모를 정도로 공격형 선수라 상대 선수들이 매우 힘들어 했어요(최명종과의 인터뷰, 2017년 8월 15일).
Table 3.
Possibilities of winning gold medal by three players
미국 대표 샌더스와의 경기가 제일 아쉬워요. 2점 차로 이기고 있었는데 마지막 몇 초를 남겨두고 샌더스의 머리와 갑자기 부딪치면서 주저앉았는데 샌더스가 쿼터 넬슨 기술을 걸어 2점을 뺏겨 무승부가 되었어요. 제 기억으로는 우리 쪽에서 샌더스가 고의로 부딪혔다고 항의를 하였지만,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그 경기에서만 이겼어도 가쓰무라와 계체량까지 가지 않고 금메달을 딸 수 있었는데…(장창선과의 인터뷰, 2012년 1월 15일).
세계선수권대회는 배드마크시스템 방식으로 3일 동안 두 게임씩 했어요. 선수마다 6점이 주어지고 판정에 따라 감점되었어요. 게임마다 폴로 이겨야 감점되지 않아서 혼신을 다해야 했어요. 저는 세계선수권대회의 경기가 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장 선수와 마지막 경기인 샌더스와의 결전은 치열한 자웅을 겨룬 것으로 기억해요(가쓰무라와의 인터뷰, 2016년 9월 16일).
계체승리를 위한 사투: 부상 통증과 심한 탈수로 인한 실신 감량
그때만큼 뛰쳐나와 살아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다친 손가락과 얼굴에 입은 상처도 뜨거운 열기에 쑤셔대고, 물을 마실 수 없어 목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어요. 더는 참지 못해 동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사우나에서 뛰쳐나왔는데 하경대 단장과 최명종 코치님이 다시 끌고 들어갔어요. 코치님이 “일본 선수에게 또 지고 싶냐”고 야단을 쳤어요. 일본 선수에게 또다시 지는 것보다는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으로 다시 들어갔죠. 제 금메달은 저만이 것이 아니라, 동료선수와 코치님을 비롯한 국민 모두의 금메달이라고 생각하고 버텼어요(장창선과의 인터뷰, 2012년 2월 4일).
Table 4.
Competition result and deduction(Basic point of 6)
사우나 안에서 창선이가 죽을 것 같아 물을 주고 싶었으나, 금메달이 목전에 있어서 주지 못했어요. 나와서도 쓰러져 있어 부축해서 계체 장소로 갔어요. 가쓰무라와 샌더스의 경기가 무승부가 되어 세 사람이 체중으로 승부를 가렸던 것 같던데…. 오래되어 정확한 기억이 없네요. 하여튼 그때의 일은 극적이었어요(김익종과의 인터뷰, 2017년 1월 8일).
원래는 의무실에 선수와 각 나라의 입회인 한 명씩 들어가야 했어요. 하지만 공정한 판결을 지켜보기 위해 우리와 일본은 두 사람이 입회하는 것으로 합의를 했어요. 우리는 하경대 단장과 이정기 국제심판이 들어갔지요. 저는 창가에서 지켜보았고요. 창선이는 처음만 재고, 일본 선수만이 항의가 받아들여져 세 번 정도 잰 것으로 기억해요. 체중 차이는 직접 보지 않았고, 저울도 지금만큼 정확하지 않지만, 제가 기록한 보고서에는 200g 차이로 기록했는데, 좌우지간 미세한 차이였습니다(최명종과의 인터뷰, 2017년 2월 4일).
(의아한 표정으로) 샌더스와의 경기를 마치고 잠깐 쉬고 곧바로 계체 장소로 이동했어요. 제가 주사기로 피를 뽑을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시간이 없었어요. 절대 그런 일은 없었어요(가쓰무라와의 인터뷰, 2016년 9월 17일).
저는 샌더스와의 마지막 경기를 마치고 매우 힘이 들었지만,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계체 장소로 갔어요. 그곳에서 장 선수와 저만 계체량을 하였습니다. 체중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것만은 정확히 기억합니다. 우리<일본의 가쓰무라>가 가위바위보로 이겨서 장 선수가 먼저 <체중> 재고, 제가 나중에 쟀어요. 장 선수의 체중과 제 체중이 <엄지와 검지 사이를 좁게 보이면서> 달걀 하나 무게 정도로 장창선 선수가 적게 나가는 것으로 나왔습니다. 처음에는 인정하지 못해 우리<일본의 입회인> 쪽에서 항의하여 두 번을 더 재고 나서 진 것을 인정했습니다(가쓰무라와의 인터뷰, 2016년 9월 17일).
장창선 금메달 획득의 의미
국제심판강습회에 참석했는데, 1967년도부터는 기존의 5분 2회전에서 3분 3회전으로 바뀌고, 무승부일 경우 계체량으로 승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연장전을 치를 것이라고 했어요. 장창선과 가쓰무라 선수의 계체량 승부가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최명종과의 인터뷰, 2017년 2월 4일).
한국선수단은 늘 국제경기 적응력이 부족하고, 정보력이 뒤떨어졌어요. 최근 우리나라 선수들이 국제 추세를 빠르게 따라가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장창선이가 금메달을 따면서 우리도 이제는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경기규칙의 변화나 추세의 변화에 민감해지기 시작한 거죠. 좋은 계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김익종과의 인터뷰, 2017년 1월 8일).
금메달 획득은 레슬링 선배들의 헌신적인 지도와 은혜가 있었다고 생각하고, 선배들에게 보답하는 마음으로 후배와 제자들에게 제 경기력과 노하우를 전부 전수하겠다는 마음으로 지도했어요(장창선과의 인터뷰, 2012년 2월 19일).
Fig. 2.
Banquet hall for celebrating medalists by President Park on the 2nd floor of Korean Sports & Olympic Committee
Sources: Jang Changsun presents

제가 정신력이라면 누구한테도 안 져요. 학비 벌면서 운동하는 힘든 과정을 겪어서 그런 것 같아요. 저처럼 어렵게 운동하는 선수들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저도 국민이 모아 준 성금으로 간신히 대회에 갈 수 있었지만, 출전비 부족으로 정동구 선수가 합숙소를 이탈했을 때 너무 가슴이 아팠어요(장창선과의 인터뷰, 2012년 2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