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J Sport Sci > Volume 29(1); 2018 > Article
장창선의 1966년 털리도 세계아마추어레슬링선수권대회금메달 획득 과정과 그 의미

ABSTRACT

[Purpose]

The purpose of this study was to investigate the process of Jang Changsun’s winning gold medal in the 1966 Toledo World Amateur Wrestling Championship and its meaning.

[Methods]

Jang Changsun and Katsumura Yasuo who had competed with Jang Changsun for the gold medal were selected as participants, a player and an executive who had participated in the Championship were selected as informants. Data had been collected by in-depth interview were analyzed firstly by using the Patton(1991)’s data analysis method, and the following conclusions were obtained by comparing with preceding studies, press releases, reports etc.

[Results]

Jang Changsun won a gold medal through the three stages of desperate struggles. The first struggle was to loose weight. Jang Changsun lost three times more weight than other players through fasting treatment, intensive training and dehydration in order to secure an advantageous position in the competition. His second struggle was the sparring itself. He made his mind to win gold medal 2 years before the Championship and started to strengthen his physical fitness and polish up his techniques to fight with strong players from powerful nation of wrestling. He finished the sparring by winning 4 games and tieing 2 games resulting in the same deduction points with Katsumura. It was inevitable for him to fight desperately to lose weight again to get gold medal. He eventually won the gold medal by losing his weight until he fainted because of injuries and serious dehydration.

[Conclusion]

The first gold medalist Jang Changsun contributed a lot to development of Korean sports by offering chance to consider significance of improving elite player’s exercising environment, scientific coaching, gaining self-confidence to win medal, and realizing the importance of sports informations.

국문초록

[목적]

본 연구는 장창선의 1966년 털리도 세계레슬링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는 과정과 그 의미를 심층적으로 규명하는 데 목적이 있다.

[방법]

연구 참여자로 장창선과 일본의 가쓰무라 야쓰오를 선정하고, 함께 출전했던 선수와 임원을 제보자로 선정하였다. 심층면담으로 수집한 자료를 Patton(1991)의 자료 분석 방법으로 일차 분석한 다음 관련 선행연구, 보도자료, 보고서 등과 비교 분석하였다.

[결과]

장창선은 세 번의 사투를 거치면서 세계레슬링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첫 번째 사투는 체중 감량이었다. 장창선은 시합에서 유리한 고지를 확보하기 위해 절식, 혹독한 훈련, 탈수로 다른 선수의 세배에 가까운 체중을 감량하였다. 두 번째 사투는 경기 자체였다. 그는 대회 2년 전부터 금메달 획득에 대한 강한 의지로 체력을 강화하고 기술을 연마하여 레슬링 강국의 선수들과 사투를 벌이는 시합을 하였다. 그러나 4승 2무로 경기를 마치며, 가쓰무라와 최종 감점이 같아 경기로는 금메달을 확정하지 못하였다. 마지막 사투는 또 한 번의 체중 감량이었다. 그는 계체 승부로 금메달을 결정하는 상황을 맞이하였으며, 탈수로 기절하면서까지 또다시 자신과의 사투를 벌이며 체중을 감량하여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결론]

장창선은 대한민국 최초의 세계선수권대회 금메달 획득으로 엘리트 선수의 운동 환경 개선, 과학적 지도의 필요성, 메달 획득에 대한 자신감, 스포츠 정보의 중요성 등을 중요하게 인식하는 계기를 마련하며 한국 스포츠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서 론

1960년대 우리나라는 정치적, 사회적으로 매우 혼란하였으며, 경제적 안정도 이루지 못한 시기였다. 35년간의 일제강점기 식민지배, 6ㆍ25전쟁, 5ㆍ16군사정변 등으로 국민은 희망을 잃고, 민심은 극도로 피폐하여 있었다. 이와 같은 혼란의 시기에 국민에게 희망을 심어 준 것이 스포츠였다. 특히 우리나라 스포츠가 열악한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국제대회에서 처음으로 금메달을 안겨주며, 국민에게 희망과 용기를 심어준 선수가 있다. 그가 바로 1966년 미국 오하이오주 털리도(Toledo)에서 개최한 세계아마추어레슬링선수권대회(이하 “세계레슬링선수권대회”라고 한다)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며, 세계만방에 애국가를 울려 퍼지게 한 장창선이다. 그 당시 전쟁과 정변의 혼란을 거친 60년대 우리나라 스포츠 환경과 선수들의 경기력을 생각하면, 국제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불가능을 가능케 한 장창선의 금메달 획득은 해방된 한민족의 미래와 새로운 대한민국의 건설에 대한 희망과 용기를 갖게 하는 데 충분하였다(Jang & Choi, 2017).
장창선이 우리 국민에게 안겨준 세계대회 첫 금메달은 한국이 스포츠 강국으로 발전하여 딴 금메달과 비교할 수 없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당시 그가 획득한 금메달은 개인뿐만 아니라 우리 국민 모두에게 영광스러운 금메달이었다(Min, 1966). 또한, 해방된 우리 민족에게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불러일으켰으며, 장차 레슬링을 메달밭으로 일구는 토대가 된다(Son & Cho, 2009). 이는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레슬링 선수인 양정모의 금메달 획득으로 이어졌으며, 우리나라 스포츠가 한 단계 도약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하지만 최근 들어 각종 국제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는 선수들이 많아지면서 장창선이 획득한 금메달의 가치와 그것이 지닌 의미가 퇴색되며, 그때의 다짐들이 빛을 잃어가고 있다. 오로지 하나의 역사적 사실로만 우리에게 기억되고 있을 뿐이다. 최근 대한체육회는 스포츠영웅들이 남긴 업적과 그들이 힘들게 일궈 놓은 메달 획득 과정을 밝혀 교훈으로 삼기 위해 스포츠영웅들의 ‘생애사’를 발간하였다(Korean Sports & Olympic Committee, 2015). 50년 전 우리에게 최초의 금메달을 안겨준 장창선도 2014년 스포츠영웅으로 선정되면서 그의 첫 메달이 갖는 의미를 재조명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장창선에 관한 그동안의 연구는 주로 선수 시절의 삶을 광범위하게 다루고 있거나(Cho, 2000; Choi, 2015; Oshima, 2012), 그에 대한 서술적 인터뷰를 통해 이루어져 심도 있는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Jang & Choi, 2017; Ko, 2016; Son & Cho, 2009). 대부분의 선행연구가 장창선의 금메달 획득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는 있지만, 얼마나 어렵게 계체를 통과하고, 어떤 동기로 경기에 임하였는지, 그리고 계체 승부에서 어떤 사투를 벌였는지에 대한 상세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아 장창선의 금메달 획득 의미가 충분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장창선이 1966년 털리도 세계레슬링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하기 위한 열망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앞서 치른 두 대회의 결과에서 알 수 있다. 1962년 자카르타 아시아경기대회와 1964년 도쿄 올림픽에서 일본 선수에게 지고 2위에 그친 석패의 경험이 있었기에 또다시 일본 선수와의 금메달 경쟁에서는 반드시 이겨야 했다. 당시 레슬링 강국인 동시에 우리의 주권을 빼앗고, 민족의 자존심을 짓밟은 일본 선수에게 또다시 질 수 없다는 각오로 경기에 임하였기에 메달 획득이 가능했던 것이다(Jang, 1966). 마라톤 영웅 손기정과 서윤복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일본으로부터 받은 억압과 고통 그리고 짓밟힌 민족 자존심을 되찾겠다는 각오로 메달 획득을 위한 열정을 불태우고 집념을 불살랐다(Jang & Choi, 2017). 손기정과 서윤복에 대해서는 Ha(2012)의 연구와 Cho(2012)의 연구를 통해 그의 운동 여정과 삶 그리고 그들의 업적이 갖는 체육사적 의미가 상당히 밝혀졌다. 장창선보다 10년 뒤에 우리나라 최초로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양정모가 갖는 체육사적 의미에 대해서도 Park(2002)의 연구에 의해 어느 정도 밝혀지고 있다. 하지만 해방 후 실의에 빠진 우리 민족에게 용기와 희망을 안겨주며 양정모의 올림픽 금메달 획득의 초석을 마련한 장창선에 대해서는 깊이 있는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장창선의 금메달 획득 과정은 우리 민족이 고난을 넘어 희망의 미래로 나아가는 역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장창선은 대한민국 스포츠영웅으로 선정된 원로 체육인으로서는 유일한 생존자이다. 그래서 그에 대한 연구가 시급하고 절실하다. 장창선이 2014년 대한민국의 스포츠영웅으로 선정됨으로써 그가 한국 스포츠사에 남긴 업적이 입증된 만큼 그에 대한 연구가 보다 심층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장창선이 해방 후 세계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함으로써 우리 민족에게 심어준 용기와 희망의 메시지를 생각할 때, 그에 대한 연구가 철저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따라서 본 연구는 장창선과 끝까지 금메달 경쟁을 벌였던 가쓰무라 야쓰오를 심층 면담하고, 털리도 대회에 함께 출전한 코치와 동료를 직접 면담하여 그의 금메달 획득 과정과 그것이 지닌 의미를 상세히 규명하고자 한다.

연구방법

연구 참여자 및 제보자

본 연구에서는 1966년 털리도 세계레슬링선수권대회에 참가하여 우리나라 최초로 금메달을 획득한 장창선과 그와 금메달 경쟁을 벌였던 일본의 가쓰무라 야쓰오(이하 “가쓰무라”)를 연구 참여자로 선정하였다. 또한, 장창선과 가쓰무라가 알고 있는 대회의 상황이 정확한지, 또 다른 상황이 있는지를 총체적으로 파악하고자 한국선수단 코치로 참가한 최명종과 그레코로만형 라이트급 선수로 출전한 김익종을 제보자로 선정하였다.
장창선은 대한레슬링협회 전무이사 및 부회장, 태릉선수촌장, 2014 인천아시아경기대회 조직위원회 집행위원 등을 역임하였으며, 2014년 대한민국 스포츠영웅에 선정되어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가쓰무라는 야마구치현 레슬링협회 명예회장이며, 야나이시에서 레슬링 도장을 운영하고 있다.
최명종은 명지대학교 예술체육대학 체육학부 교수를 역임하였으며, 김익종은 국제레슬링연맹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특히 최명종은 1966년 털리도 세계레슬링선수권대회의 영상을 제공하였다. 그중에 장창선과 가쓰무라의 대회 장면을 참고하였다.

자료 수집

자료는 두 명의 연구 참여자와 두 명의 제보자에 대한 반구조화 심층면담과 장창선 관련 서적, 신문, 보고서 등을 수집하였다.
장창선과의 심층면담은 2012년 1월 7일부터 2월 19일까지 주말을 이용하여 그의 집에서 약 2시간씩 4회에 걸쳐 이루어졌다. 질문 내용은 그의 자서전 ‘영광의 뒤안길’을 세 차례 정독하고 경기 진행 과정과 그것이 지닌 의미를 도출할 수 있는 반구조화 질문을 구성하였다. 인터뷰 과정에서 자서전과 다른 내용이 확인되면, 다음 심층면담에 질문으로 추가하였다. 50년 전의 상황을 기억해 내기 위해 그의 저서 ‘영광의 뒤안길’을 참고할 수 있도록 하였다. 심층면담은 전 과정을 녹취한 다음 면담 직후에 전사하였다.
가쓰무라와의 심층면담은 2016년 9월 15일부터 18일까지 그의 고향인 일본 야마구치현 야나이시를 방문하여 이루어졌다. 심층면담은 한국어와 일본어에 능통한 통역사의 도움으로 이루어졌다. 사전에 통역사에게 연구의 목적을 간단히 설명함으로써 맥락을 이해한 충실한 통역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였다. 1차면담은 9월 16일, 야마구치현 야나이시에 있는 그랜드호텔 커피숍에서 가쓰무라를 만나 3시부터 6시까지 진행하였다. 먼저, 통역사를 통해 연구 목적과 전반적인 사항을 설명하고, 장창선의 근황과 인터뷰에서 나온 가쓰무라에 대한 감정 등을 이야기하며 면담을 시작하였다. 면담 내용은 가쓰무라의 근황, 레슬링을 시작한 시기와 동기, 장창선과의 관련 사항과 그에 대한 감정, 대회 상황 등을 반구조화 면담 방법으로 질문하였다. 3시간 동안 진행한 첫 심층면담 내용을 녹음한 후 숙소에서 전사하였다. 궁금한 사항은 다음 날, 그랜드호텔 커피숍에서 다시 만나 2시간 동안 추가 질문을 하였다. 가쓰무라와의 심층면담은 장창선에게 얻지 못했던 대회의 상황을 알 수 있었다.
최명종과는 2017년 1월 30일에 30분간 전화인터뷰를 하였으며, 2월 4일에 그의 집을 방문하여 2시간 10분 동안 면담하였다. 또한, 2017년 8월 15일에는 대회 동영상을 보면서 1시간 30분 정도 면담하였다. 특히 자서전, 선행연구, 보고서 등에도 없는 초반 경기장면과 장창선과 가쓰무라의 경기 스타일을 확인할 수 있었다.
김익종과는 2016년 12월 2일에 35분간 전화인터뷰를 하였으며, 2017년 1월 8일에는 장창선의 집에서 만나 1시간 40분 동안 면담하였다. 두 제보자에게는 장창선이나 가쓰무라 중 한 사람만 알고 있는 대회 상황에 대해 중점적으로 질문하였다. 면담 이후, 내용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궁금한 사항은 두 제보자에게 약 30분 정도의 전화 인터뷰로 확인하였다. 두 제보자의 면담내용 역시 녹취하여 전사하였다. 연구 참여자와 제보자와의 면담과정은 <Table 1>과 같다.
Table 1.

Interview with research participants and informants

Name Date & time of interview Place of
interview
Method of
interview
Main content of interview
Jang
Changsun
1st: 2012.1.7.(2hrs) home semi-
structured
interview
  1st: process of weigh-in, feeling etc.
2nd: 2012.1.15.(2hrs)   2nd: sparring condition, feeling etc.
3rd: 2012.2.4.(2hrs)   3rd: sparring condition of weigh-in, feeling etc.
4th: 2012.2.19.(2hrs)   4th: feeling after winning gold medal, feeling etc.
Katsumura
Yasuo
1st: 2016.9.16.(3hrs) Grand hotel
coffee shop,
Yanai,
Yamaguchi
prefecture,
Japan
semi-
structured
interview
  1st: how Katsumura getting along, motive and
    time to start wrestling, the feeling sparring with
    Jang, sparring condition etc.
2nd: 2016.9.17.(2hrs)   2nd: sparring condition, sparring condition of
    weigh-in, feeling about weigh-in etc.
Choi
Myongjong
phone: 2017.1.30.(30mins)
1st: 2017.2.4.(130mins)
home semi-
structured
interview
  1st: process of weigh-in, sparring itself,
    condition of weigh-in etc.
phone: 2017.2.23.(30mins)
2nd: 2017.8.15.(90mins)
  2nd: sparring, sparring with Katsumura etc.
Kim
Ikjong
phone: 2016.12.2.(35mins)
1st: 2017.1.8.(100mins)
phone: 2017.1.24.(30mins)
Jang’s
home
semi-
structured
interview
  1st: process of weigh-in, sparring condition,
    condition of weigh-in etc.
문서자료 수집은 장창선의 자서전, 서적, 신문, 털리도 세계레슬링선수권대회 출전결과 보고서 등이었다. 수집한 문서자료는 연구 참여자와 제보자들과의 심층면담 질문 내용을 개발하거나, 그들의 인터뷰 내용을 대조 확인하는 자료로 활용하였다.

자료 분석 및 진실성

수집한 자료는 Patton(1991)의 귀납적 범주 분석 방법을 사용하여 분석하였다. 수집한 자료를 여러 차례 반복하여 읽으면서 연구 주제와 관련된 내용과 그렇지 않은 내용을 분류한 다음, 유관 개념들을 찾아 범주화해서 주요 주제를 도출하였다. 연구 참여자와 제보자들에 대한 심층면담 내용과 문서자료를 대조 분석하여 의미 있는 개념을 찾고 범주화하여 계체량 통과를 위한 사투, 금메달 획득을 위한 사투, 계체 승리를 위한 사투, 장창선 금메달 획득의 의미와 같은 주요 주제를 도출하였다.
자료의 진실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연구 참여자 확인, 전문가 검토, 다각도 분석을 하였다. 심층면담 내용을 전사한 자료와 자료의 분석 결과를 연구 참여자와 제보자에게 확인하였다. 특히 가쓰무라와의 면담내용이 전사한 내용과 일치하는지 통역사를 통하여 확인하였다. 분석한 결과도 통역사에게 부탁하여 가쓰무라에게 최종적으로 확인하였다. 또한, 질적 연구 경험이 풍부한 2명의 전문가에게 연구의 전 과정이 타당하게 진행되었는지를 확인하였다. 면담자료와 문서자료를 대조 분석함으로써 연구 참여자와 제보자의 면담 내용의 타당성을 확보하였다.

장창선의 금메달 획득 과정

계체량 통과를 위한 사투: 절식·과도훈련·탈수에 의한 체중 감량

레슬링과 같은 체급별 경기에서는 시합 전에 선수가 출전을 희망하는 체급의 한계 체중을 통과해야 한다. 체급 경기에 출전하는 대부분의 선수는 체중에 비례하여 근력의 발휘 능력이 향상되는 이점이나 팀의 전략적 목표 등을 이유로 체중을 감량하게 된다(Cheon & Kim, 2004). 감량은 대개 경기 일주일 전이나 이틀 전 또는 하루 전에 하게 되며, 단기간에 극적인 효과를 얻기 위해 계획적인 식이요법이나 운동요법보다는 급작스러운 절식이나 의도적인 탈수 또는 과도한 훈련 등의 방법을 선택하곤 한다(Kim et al., 2001).
장창선 선수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아시아경기대회와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획득하여 체력과 기술에서는 수준급이었다. 하지만 대회에 출전하기 전,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계체량을 통과하기 위한 체중 감량이 그에게는 많은 부담으로 작용하였다. 더군다나 이번 대회는 올림픽 때와 달리 정부의 지원을 받지 못하였고, 열악한 협회 재정으로도 지원이 어려워 참가하는 선수들이 각자 여비를 마련하였기에 체중조절에 더 많은 고충이 있었다(Jang, 1966). 이처럼 어려운 상황에서 운동과 체중조절을 제대로 못 했던 그의 체중은 60kg에 육박하여 플라이급 한계체중인 52kg까지 8kg을 감량해야지만 경기에 출전할 수 있었다. 보통 선수들이 경기를 앞두고 감량하는 체중은 자기 체중의 4~5%이며, 5% 이하 정도가 경기에 효과적이라고 하였다(Back, 2015). 다른 선수들처럼 5%를 감량하면 57kg으로 플라이급에 도저히 출전할 수 없는 체중이다. 그렇기에 다른 선수의 두 배 이상이 되는 13%를 감량해야 하는 부담을 안고 고통스러운 체중감량을 해야만 하였다. 8kg이면 두 체급 위의 선수들과 경기해야 하는 체중으로 극도의 인내심이 필요한 감량이었다. 이에 대한 내용은 2012년 1월 7일, 장창선의 인터뷰를 통해 알 수 있다.

평상시 체중은 58kg 정도인데, 세계선수권대회에 나갈 때는 출전비가 모자라 선수들이 직접 마련하다 보니 운동을 제대로 못 해서 60kg 정도 나갔어요. 아마 8kg 정도 뺀 것 같아요. 뭐 3~4kg 빼는 것은 문제가 안 되는 데 그 이후부터가 문제죠. 어쩌겠어요. 물과 음식을 더 줄이고, 강도 높은 운동으로 죽기 살기로 빼는 거죠. 아마 털리도에 도착해서 시합 전 1주일 정도 나머지 4kg 정도는 뺐을 거예요. 근데 음식이 양식이라 입에 맞지 않아서 엄청 힘들었어요. 그래도 어렸을 때부터 못 먹어가면서 신문 배달, 아이스케끼, 찹쌀떡을 팔려고 이리저리 뛰고, 운동해서 체중 감량을 한 것이 몸에 배서…. 힘들지만, 그 정신으로 땀이 많이 나오도록 운동을 더 열심히 해서 체중 빼고, 그렇게 체중을 줄인 거죠(장창선과의 인터뷰, 2012년 1월 7일).

위의 인용문에서처럼 장창선은 음식과 수분을 최대한 줄이고, 격렬한 훈련으로 체중을 더욱 줄여나갔다. 이는 학창시절 굶기를 밥 먹듯이 하면서 신문 배달, 아이스바와 찹쌀떡 판매 등을 하며 레슬링을 해온 장창선이었기에 능히 감당할 수 있었다. 이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 운동한 그였기에 4kg 감량까지는 그렇게 어려운 과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그 기점에서부터였다. 거기서부터 52kg까지 4kg을 더 빼는 것이 고통이었다. 6월 9일(한국시각 10일), 대회 일주일을 남겨두고 미국 현지에 도착했을 때는 플라이급 한계체중의 3.8kg을 초과하고 있었다(Choi, 1966). 그는 시합 전날까지 감량 목표를 53kg으로 두고, 매일 아침에 밥 대신 입에 안 맞는 빵 두 조각에 달걀 하나를 먹으면서 종일 버티고 있었다. 나중에는 음식량이 계속해서 줄면서 배가 등에 달라붙을 정도가 되어 온몸이 매우 아프고 고통스러웠다, 이 와중에도 러닝과 연습경기를 통해 체중을 더욱 줄이고, 운동 후에는 사우나에서 땀을 흘리며 고통스러운 체중 감량이 계속되었다. 특히 마지막에 허기가 진 상태에서 사우나에서 체중을 감량한 것은 너무 힘든 고통이었지만, 금메달을 향한 마음이 컸기 때문에 견딜 수 있었다. 이렇게 극한의 고통을 견딘 장창선은 개막 하루를 앞두고 53kg까지 감량하며, 남은 1kg은 이튿날 계체 직전까지 감량하기로 하였다(Jang, 1966). 대회 당일인 6월 16일(한국시각 17일), 아침 6시에 일어나 어떤 음식도 입에 대지 못한 채 운동과 사우나로 땀을 뺀 다음, 15분간 마사지를 받고 체중을 달아보니 정확하게 52kg이었다(Choi, 1966).
장창선은 계체량을 통과하였지만, 체중 감량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지금은 하루 전에 계체하고, 다음날 체급별로 하루에 모든 경기를 소화(Kim, 2002)하기 때문에 계체량을 통과하면 원하는 음료와 음식을 적절히 섭취하며 컨디션을 조절할 수 있다. 하지만 털리도 세계레슬링선수권대회 때만 해도 경기가 있는 3일 동안 매일 오전 9시 30분에 계체(Choi, 1966)를 해야 했기 때문에 어떤 것도 마음 놓고 먹을 수 없었다. 또한, 득점으로 승자를 결정하는 오늘날의 레슬링 토너먼트 경기방식(Korea Wrestling Federation, 2016)과는 달리 결승리그에 남은 선수가 경기가 끝난 후 감점된 점수가 같을 경우, 체중이 적게 나가는 선수가 승자가 되는 독특한 계체 승부(Jang, 1966)가 남아 있어 더더욱 음식을 마음껏 섭취할 수 없었다. 경기가 종료되는 그 순간까지 식욕을 억제하며 체력을 유지해야 하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실력이 비슷하면 어느 선수가 감량을 잘 했는지에 따라 승부가 갈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체중 조절에 따른 심리적 부담이 컸던 경기였다. 장창선의 경우처럼 장기간 훈련과 절식뿐만 아니라 사우나 안에서까지 물리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5% 이상의 체중감량을 한 경우, 근력과 순발력은 물론이고 심폐기능까지 현격히 떨어져 대회에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다(Back, 2015). 하지만 장창선은 반드시 계체량을 통과해야지만, 금메달을 획득할 수 있었기에 다른 선수에 비해 두 배나 많은 체중을 감량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국민의 성원을 받으며 국가대표로 출전한 선수로서 경기 전에 있는 계체량 실격은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 또한, 가난의 역경을 정신력으로 버티며, 단 한 번도 체중조절에 실패하지 않고 시합에서 좋은 결과를 얻은 그간의 경험과 자신감이 있었기에 가능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한 내용은 2012년 1월 7일, 장창선의 인터뷰를 통해 알 수 있다.

대회의 정량인 52kg을 맞추기 위해 거의 먹지도 못했어요. 이겨도 매일 계체량을 하니 제대로 먹을 수 있나요. 저뿐만 아니라 다른 선수들도 마찬가지고, 국가대표로 선발되어 세계대회에 출전했는데 체중조절 실패로 시합에 출전조차 못 한다면 저 자신과 저를 도와주며 금메달 따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도리가 아니잖아요. 계체량을 통과하지 못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죠. 그때가 제일 힘들었지만, 시합 때마다 어렵게 체중을 조절했어도 좋은 결과가 있었기에 정신력과 자신감으로 버티는 거죠(장창선과의 인터뷰, 2012년 1월 7일).

금메달 획득을 위한 사투: 메달획득에 대한 강한 의지와 혹독한 훈련 감내

1964년 도쿄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따고 귀국하여 국민에게 엄청난 환호와 대접을 받은 장창선은 그에 대한 보답과 어머니의 고생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다음 대회에서는 꼭 금메달을 따야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1962년 자카르타 아시안게임과 1964년 도쿄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따보았지만, 금메달과 은메달은 하늘과 땅 차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다. 일본 선수에게 거듭해서 졌기에 우리에게 고통을 준 나라의 선수만은 반드시 이기고 금메달을 획득해야겠다는 다짐이 더욱더 컸다. 그동안 장창선은 레슬링 세계의 추세도 거의 파악하였고, 국제 경험도 적잖이 쌓았기 때문에 정상 탈환의 가능성이 느껴지기도 했다. 또다시 정상에 굴복한다면, 그것은 스포츠맨으로서 씻을 수 없는 굴욕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장창선은 나태해지거나 안이해질 때마다 “굴욕에서 벗어나자”를 외치며 금메달에 대한 의지를 불태웠다(Cho, 1993).
1966년 털리도 세계레슬링선수권대회는 지금처럼 원형 매트가 아닌 사방 8m의 사각 매트 안에서 5분 2회전으로 경기가 이루어졌다. 경기방식은 <Table 2>와 같이 배드마크시스템(bad mark system)으로 각 경기자에게 6점의 기본 점수를 부여하고, 경기 결과에 따라 부전승과 폴승은 무감점, 판정승 1감점, 무승부 2감점, 판정패 3감점, 폴패 4감점으로 진행하는 방식이었다. 또한, 매 경기의 판정에 따라 일정한 기준으로 감점하며, 6점 이상이 되면 실격 처리되는 레슬링 특유의 경기 방법(Chung, 1981)으로 하루에 2게임씩 3일 동안 6회전을 치르는 경기였다. 선수들은 6점의 감점을 받지 않기 위해 최선의 경기를 펼치며 결승리그에 진출해야 금메달을 획득할 가능성이 있었다.
Table 2.

Game rule of ‘bad mark system’

Basic
score
Win
by
default/fall
Win by
decision
Draw Loss
by
decision
Loss
by
fall
6
point
no
deduct
1 point
deduct
2 point
deduct
3 point
deduct
4 point
deduct
선수들은 경기가 있는 3일 동안 한계 체중과 컨디션을 유지하며 시합에 임해야 했다. 장창선은 경기 전에 실시하는 계체량을 무사히 통과하며, 좋은 경기 결과를 얻기 위한 컨디션 조절에 힘쓰고 있었다(Choi, 1966).
1966년 6월 16일(한국시각 17일), 장창선은 첫날 치른 두 경기에서 폴란드의 클로프 선수에게 판정승, 아르헨티나 카체로프 선수에게 폴승을 거두며 좋은 출발을 하였다. 금메달을 놓고 치열한 계체 경쟁을 벌였던 일본의 가쓰무라도 두 경기 모두 폴승을 거두면서 무감점으로 승기를 잡아가고 있었다(Choi, 1966).
둘째 날 17일(한국시각 18일), 3회전 경기에서 장창선과 일본의 가쓰무라와의 숙명적 대결이 펼쳐졌다. 두 선수의 경기는 기량뿐만 아니라 대회 운영방식의 특성상 결승전이나 다름없는 경기였다. 당시 국제레슬링연맹이 도입했던 배드마크시스템에서는 예선전에서 대결한 선수들이 결승리그에서 다시 만나도 재대결을 하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에는 대회 때마다 새로운 선수들이 금메달을 획득할 정도로 플라이급에 우수한 선수들이 포진하고 있어 장창선에겐 매우 부담스러운 경기였다. 더군다나 자카르타 아시아경기대회에서 일본의 하라다 선수에게, 도쿄 올림픽에서 요시다 선수에게 패한 경험이 있는 장창선에겐 더더욱 부담스러운 경기였다(Jang, 1966).
장창선은 중요한 국제대회 때마다 일본 선수들에게 고배를 마시고 은메달에 그쳐야만 했다. 장창선은 털리도 세계레슬링선수권대회만큼은 또다시 일본 선수에게 지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결승리그에서 만나야 할 일본 선수를 예선전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사실, 장창선은 두 번의 국제대회에서 은메달을 획득한 선수로 전력이 노출된 반면, 가쓰무라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선수였다. 그만큼 선수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다. 그 반면에 가쓰무라는 장창선을 알고 있었다. 장창선은 가쓰무라가 도쿄 올림픽 일본 대표선발전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요시다에게 1대 0으로 아깝게 패한 우수한 선수라는 것을 후에 알게 되었다. 상대 선수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던 만큼 충분한 대비책도 강구하지 못했다. 그에 반해 가쓰무라는 장창선이 국제대회에 출전하여 경기하는 모습을 보고 그에 대해 철저한 대비를 하였을 뿐만 아니라, 플라이급에서는 일본 선수들이 항상 우승해 왔기 때문에 자신도 있었다. 이에 대한 내용은 2012년 1월 15일, 장창선과 2016년 9월 16일, 가쓰무라의 인터뷰를 통해 알 수 있다.

아시안게임은 하라다, 올림픽은 요시다, 이렇게 두 번이나 일본 선수에게 져서 2위를 했어요.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반드시 일본 선수를 이기고 우승하겠다는 각오로 경기에 임했어요. 많은 국민의 성원과 어렵게 뒷바라지해 주신 어머니께 보답하는 일이라 생각했어요. 사실, 가쓰무라와의 경기는 결승전이라는 각오로 했지만, 무승부로 끝나서 아쉬웠어요. 하여튼 그 경기에 최선을 다했고, 가장 힘든 경기였어요(장창선과의 인터뷰, 2012년 1월 15일).

1964년 도쿄 올림픽 일본 대표 선발전에서 요시다에게 1대 0으로 져서 출전을 못 하고, 고마자와 체육관에서 장창선 선수와 요시다 선수가 경기하는 것을 지켜봤어요. 한국에도 저런 강한 선수가 있구나! 라는 생각을 했는데,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다른 선수들과 경기하는 것을 보고 또 한 번 놀랐어요. 특히 2회전 경기에서 가볍게 폴로 이기는 것을 보고 제일 강하고 어려운 상대라고 느꼈어요.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생각과 우승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함께 했어요(가쓰무라와의 인터뷰, 2016년 9월 16일).

위의 인용문에 나타나듯이 장창선은 결승전을 치른다는 각오로 경기에 임했다. <Fig. 1>은 가쓰무라가 제공한 경기 장면이며, 좌측 선수가 장창선이다. 장창선의 초반 장면을 동영상으로 보면, 경기가 시작되자 자신의 주특기인 ‘태클’로 순식간에 왼쪽 다리를 잡았지만, 가쓰무라는 점수를 뺏기지 않으려고 다리를 잡힌 채 라인 밖으로 나갔다. 지금의 경기규정이라면 장창선이 선취점을 획득할 좋은 기회였다. 하지만 가쓰무라는 장창선의 태클 공격이 좋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라인 밖으로 나가면 점수를 주지 않는 규정을 잘 이용하며 수비하고 있었다. 그 이후 <Fig. 1>과 같이 접전 상황에서 전반전 2분 30초를 지나면서 일종의 유도 기술인 ‘목잡고 앞발치기’로 롤링을 당해 2점을 빼앗기고 말았다(Choi, 1966).
Fig. 1.

Competition scene with Katsumura

(Left side player is Jang Changsun)
Sources: Katsumura Yasuo presents
KISS_2018_v29n1_186_f001.jpg
가쓰무라는 고등학교 시절 촉망받는 유도선수였으며, 스승의 권유로 레슬링으로 전향한 선수였다. 장창선은 레슬링에서 흔치 않은 기술로 점수를 빼앗기고 한순간 당황하였지만, 달려든 가쓰무라의 등 뒤로 돌아가는 고비하인드(go behind) 기술로 1점을 만회하고 전반전을 끝냈다. 후반전이 시작되어 2분 정도 경과했을 때 자신의 주특기인 태클로 공격하여 1점을 만회하여 동점을 만들었다(Choi, 1966; Jang, 1966). 장창선은 남은 3분 동안 있는 힘을 다해 태클 공격을 시도하였지만, 안타깝게도 점수로 연결되지 않았다. 결국, 가쓰무라와의 경기는 무승부로 끝났다(Jang, 1966).
4회전 경기의 상대는 메흐멧 선수였다. 그는 레슬링 종주국인 터키 국가대표로 그해 유럽 챔피언이었다. 장창선은 클로프 선수에게 판정승하고, 가쓰무라와 무승부를 하여 이미 3점 감점을 받은 상태에서 메흐멧 선수에게 지면 3점 감점으로 자동 탈락되는 상황이었다. 진출과 탈락의 기로에선 매우 중요한 경기였지만, 다행히 2대 1 판정승을 거두었다(Jang, 1966). 장창선은 기본점수 6점 중 2점을 남긴 상태이고, 가쓰무라는 4회전에서 폴승을 하여 4점이 남은 상태였다. 이때까지는 가쓰무라가 장창선보다 우승의 문턱에 더 가까이 있었다(Choi, 1966). 이에 대한 내용은 2016년 9월 16일, 가쓰무라와 2017년 8월 15일, 최명종의 인터뷰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저는 유도를 하다가 고등학교 때 스승님의 권유로 레슬링으로 전향했어요. 장 선수와의 경기에서도 유도 기술을 접목해서 먼저 2점을 획득했어요…. 제가 느끼는 장 선수는 체력이 강할 뿐만 아니라 기술에 대한 대처능력이 뛰어나고 매우 빠른 선수예요. 메뚜기처럼 순식간에 날아들어요. 특히 태클 공격이 매우 빠르고 강해서 상대하기 힘들었어요(가쓰무라와의 인터뷰, 2016년 9월 16일).

영상으로 창선이와 가쓰무라의 경기를 다시 보니까 꼭 이기기를 마음졸이며 지켜본 기억이 나네요. 시작하자마자 창선이가 태클로 공격했는데 그때 당시는 라인 밖이나 수비만 해도 점수를 주지 않았어요. 지금 같으면 이긴 경기인데 참 아쉽죠. 창선이의 체력과 태클 공격은 굉장했어요. 시합만 들어가면 10분 내내 지칠 줄 모를 정도로 공격형 선수라 상대 선수들이 매우 힘들어 했어요(최명종과의 인터뷰, 2017년 8월 15일).

셋째 날, 마지막 경기일인 18일(한국시각 19일), 5회전 경기는 레슬링 강국 소련의 알리베가츠빌리 선수와의 대결이었다. 장창선은 한국전쟁을 생각하며 ‘총칼 없는 전쟁’이라는 각오로 메달권 진입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Jang, 1966). 다양한 공격을 시도한 끝에 결국 자신의 특기인 태클로 3점을 선취하여 판정승을 거둬 기본점수 6점에서 1점을 남기고 마지막 경기를 맞이하였다. 가쓰무라는 그 이전까지 경기를 잘 해 오다가 5회전 경기에서 장창선에게 패한 터키의 메흐멧 선수에게 판정패를 당해 감점 3점을 받음으로써 장창선과 똑같은 조건으로 마지막 경기를 맞이하였다(Choi, 1966).
결승리그에 합류한 또 다른 선수는 미국의 샌더스 선수였다. 장창선과 가쓰무라는 터키, 구소련 등 레슬링 강국의 선수들과 혈전을 벌이고 결승리그에 진출했지만, 샌더스는 주로 약한 선수들과 경합하며 순조롭게 결승리그에 합류하였다. 샌더스는 1회전에서 부전승 무감점, 2회전에서 무승부 2점 감점, 3회전에서 판정승 1점 감점, 4회전에서 판정승 1점 감점, 5회전에서 판정승 1점 감점의 기록으로 결승리그에 진출하였다(Cho, 2000; Choi, 1966). 세 선수 모두 감점 1점을 남기고 결승리그에 합류하였다. 세 선수는 예선전에서 서로 맞붙지 않은 선수끼리만 경기하는 결승리그에서 우승의 향방이 결정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장창선과 가쓰무라는 샌더스와의 경기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즉, 장창선과 가쓰무라는 한 경기만 치르고, 샌더스는 두 경기를 더 치러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는 샌더스 선수가 다른 두 선수보다 벌점을 안고 불리한 조건에서 경기하는 상황이었다.
장창선은 조 편성에 따라 가쓰무라보다 먼저 샌더스와 경기하는 행운을 얻었다. 하지만 샌더스와의 경기 또한 만만치 않았다. 주최국 미국에 안겨줄 첫 번째 금메달 획득을 위한 경기였던 만큼 샌더스를 향한 관중들의 열기는 대단하였다. 장창선은 전반전에 샌더스에게 태클로 1점을 빼앗겼지만, 후반전에 들어서자 자신의 주특기인 태클로 1점을 만회하였다. 열전을 거듭하던 중 장창선이 샌더스의 다리를 든 후 연속해서 ‘다리 들어 젖히기’ 묘수로 2점을 추가, 3대 1로 승기를 잡는 듯했다. 그런데 경기 종료 10초를 남기고 수세에 몰린 샌더스가 머리로 장창선의 얼굴을 들이받아 순간 주저앉게 되었다. 샌더스는 얼굴을 부딪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장창선에게 쿼터 넬슨(quarter nelson)이라는 기술을 걸어 순식간에 2점을 만회하였다. 결국, 3대 3 무승부로 경기를 마쳤다(Cho, 2000; Choi, 1966; Choi, 2015; Jang, 1966). 편파 판정으로 인식한 코치진과 국제심판으로 참석했던 이정기가 항의를 하였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Jang, 1966). 장창선은 금메달을 코앞에서 놓친 기분이었다. 이제 가쓰무라와 샌더스의 경기 결과에 따라 금메달 여부가 결정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세 선수의 금메달 획득 가능성을 정리하면 <Table 3>과 같다. 이에 대한 내용은 2012년 1월 15일, 장창선과 2016년 9월 16일, 가쓰무라의 인터뷰를 통해 알 수 있다.
Table 3.

Possibilities of winning gold medal by three players

Jang Game result Sanders Game result Katsumura Game result
6th round
2point deduct
final(-1)

draw
6th round
2 point deduct
(-1)
5th round

(1)
2 point deduct
loss
final (-3)

draw
2 point deduct

final (-1)
Jang/Katsumura
measure weight
1 point deduct
loss
final (-2)

Sanders win by
decision
3 point deduct
loss
final (-2)
Jang
won gold medal
No deduct

final(-1)

Sanders
win by fall
4 point deduct
loss final
(-3)
Jang/Sanders
measure weight
4 point deduct
loss
final(-5)

Katsumura
win by fall
No deduct

final(1)
Katsumura
won gold medal
3 point deduct
loss
final(-4)

Katsumura
win by decision
1 point
deduct
final(0)
Katsumura
won gold medal

미국 대표 샌더스와의 경기가 제일 아쉬워요. 2점 차로 이기고 있었는데 마지막 몇 초를 남겨두고 샌더스의 머리와 갑자기 부딪치면서 주저앉았는데 샌더스가 쿼터 넬슨 기술을 걸어 2점을 뺏겨 무승부가 되었어요. 제 기억으로는 우리 쪽에서 샌더스가 고의로 부딪혔다고 항의를 하였지만,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그 경기에서만 이겼어도 가쓰무라와 계체량까지 가지 않고 금메달을 딸 수 있었는데…(장창선과의 인터뷰, 2012년 1월 15일).

세계선수권대회는 배드마크시스템 방식으로 3일 동안 두 게임씩 했어요. 선수마다 6점이 주어지고 판정에 따라 감점되었어요. 게임마다 폴로 이겨야 감점되지 않아서 혼신을 다해야 했어요. 저는 세계선수권대회의 경기가 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장 선수와 마지막 경기인 샌더스와의 결전은 치열한 자웅을 겨룬 것으로 기억해요(가쓰무라와의 인터뷰, 2016년 9월 16일).

위의 인용문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세 선수의 금메달 획득 가능성을 <Table 3>의 내용으로 살펴보면, 장창선은 최종 감점이 -1점으로 6회전 경기를 마쳤다. 샌더스는 장창선과의 경기에서 무승부를 기록하여 감점 2점을 안고 가쓰무라와 경기를 하는 매우 불리한 상황이었다. 샌더스가 금메달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가쓰무라를 폴승으로 이긴 다음, 장창선과의 계체 승부에서 그보다 체중이 단 1g이라도 적어야 했다. 반면, 가쓰무라는 샌더스와의 경기에서 판정승이든 폴승이든 이기기만 하면 금메달을 획득할 수 있었다. 만약 두 선수가 비기면 샌더스는 탈락하고, 장창선과 가쓰무라는 계체로 금메달을 결정하는 상황이었다. 샌더스가 이기면 장창선은 우승이지만, 만약에 폴로 이기거나 두 선수가 비기는 경우를 대비하여 감량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두 번이나 일본 선수에게 져 금메달을 넘긴 장창선으로선 또다시 그들에게 금메달을 넘기고 싶지 않았다.
사실, 장창선이 털리도 세계레슬링선수권대회에서 우수한 경기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금메달에 대한 강한 의지와 그에 따른 지독한 훈련을 견뎌낸 덕분이었다. 그는 상대 선수가 어느 방향으로 공격하는지 모를 정도로 양손을 다 쓸 수 있는 양손잡이가 되었기에 상당한 기술 향상이 있었다. 또한, 가장 낮은 체급을 뛰는 장창선은 그보다 무거운 선수를 상대로 실전 같은 연습으로 기량을 최대한 끌어올릴 수 있었다(Jang & Choi, 2017). 이와 같은 노력과 함께 선수 생활의 중요한 시기에 최명종이라는 유능한 지도자를 만나는 행운을 얻었다. ‘과학적인 훈련’이라는 말이 사치스럽게 들리던 그 시절 아무도 시차에 따른 컨디션 저하를 걱정하지 않을 때, 최명종 코치는 그것을 간파하고 대회 적응 훈련을 시도하였다. 그는 선수들에게 미국 현지 경기 시간대에 맞춰 취침, 식사, 훈련을 반복해서 시켰다. 특히 낮에는 재우거나 쉬게 하고 밤에 훈련을 시켰다. 그것도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지독하게 훈련을 시켰다(Choi, 2015). 단기간에 강한 훈련을 한다고 체력이 크게 향상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선수들이 고된 훈련으로 숙면을 하게 함으로써 미국 현지 시합에서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한 대책이었다. 이런 그가 감량 도중 사우나를 뛰쳐나온 장창선에게 다시 들어가자고 했을 때, 그의 요청을 거부할 수 없었다.

계체승리를 위한 사투: 부상 통증과 심한 탈수로 인한 실신 감량

금메달 획득을 위한 장창선의 감량 사투가 시작되었다. <Table 3>과 같이 금메달 획득을 위한 세 가지 경우의 수 가운데 샌더스가 폴로 이기는 경우와 가쓰무라와 샌더스가 비기는 경우에만 계체로 금메달을 딸 수 있는 상황에서 감량 사투를 벌인 것이다. 장창선과 동행한 임원들의 금메달 획득에 대한 의지가 얼마나 강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장창선은 적은 기회마저 놓치지 않기 위해 감량에 돌입하며 기절할 정도로 자신과의 사투를 벌였고, 임원들 또한 금메달에 대한 강한 열망으로 그의 감량을 지원했다.
장창선은 경기 중에 다친 손가락 부상과 얼굴의 상처를 치료하지도 못한 채 감량에 들어가야만 했다. 다행히 장창선이 먼저 샌더스와의 경기를 무승부로 마쳤기 때문에 감량 전략에서는 유리한 입장에 있었다. 장창선은 사력을 다해 시합했으므로 지칠 대로 지친 데다 부상의 상처까지 겹쳐 거의 탈진한 상태였다. 걸을 힘조차 없는 상황에서 가장 효과적이고 유리한 감량 방법은 탈수였다. 두 선수가 금메달 경쟁을 벌이는 동안 장창선은 경기장에 설치된 사우나로 향했다. 샌더스와 치열한 사투를 벌인 다음,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상황이었다. 경기를 통해 땀을 다 쏟아낸 직후여서 사우나에 들어가도 더 빠져나올 수분이 없었다. 쥐어짜듯 탈수를 하고 나니 갈증이 극도에 도달해 호흡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사우나 안의 뜨거운 열기를 받으니 경기 중 다친 부위가 쑤시듯이 아파져 왔다. 장창선은 더 견디다가는 죽을 것 같았다. 그는 사우나를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쳤으나, 동료선수들은 그를 막아섰다. 그는 막아서는 동료선수들을 뿌리치고 살기 위해 사우나에서 뛰쳐나왔다. 그것도 잠시 또다시 하경대 단장과 최명종 코치에 이끌려 사우나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최명종 코치는 장창선에게 감량하지 않으면 또다시 일본 선수에게 패배할 수 있다며 그를 다그쳤다. 장창선도 체중을 줄이지 못해 일본 선수에게 지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생각으로 자신과의 사투를 벌였다. 결국, 그는 사우나 안에서 의식을 잃고 말았다(Jang, 1966). 이에 대한 내용은 2012년 2월 4일, 장창선의 인터뷰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때만큼 뛰쳐나와 살아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다친 손가락과 얼굴에 입은 상처도 뜨거운 열기에 쑤셔대고, 물을 마실 수 없어 목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어요. 더는 참지 못해 동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사우나에서 뛰쳐나왔는데 하경대 단장과 최명종 코치님이 다시 끌고 들어갔어요. 코치님이 “일본 선수에게 또 지고 싶냐”고 야단을 쳤어요. 일본 선수에게 또다시 지는 것보다는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으로 다시 들어갔죠. 제 금메달은 저만이 것이 아니라, 동료선수와 코치님을 비롯한 국민 모두의 금메달이라고 생각하고 버텼어요(장창선과의 인터뷰, 2012년 2월 4일).

위의 인용문에서처럼 장창선이 체중을 줄이는 동안, 가쓰무라는 전반전에 샌더스에게 4대 1로 이기고 있었다. 만일 가쓰무라가 이겼다면, 장창선은 또다시 일본 선수에게 져서 2위를 하게 되므로 죽음을 불사한 감량 사투를 벌일 필요가 없었다. 다행히 신은 장창선의 편이었다. 후반전에 들어가면서 가쓰무라의 체력이 급격히 떨어져 샌더스가 3점을 따라잡아 4대 4의 무승부로 경기를 마쳤다(Choi, 1966). 대회 플라이급(52kg) 경기가 끝난 후, 세 선수의 경기 결과와 감점 상황을 정리하면 <Table 4>와 같다.
<Table 4>의 경기 결과와 감점 상황을 살펴보면, 샌더스는 총 감점이 -3점으로 두 선수보다 벌점이 많아 동메달이 확정되고, 장창선과 가쓰무라는 똑같이 -1점을 기록하여 계체로 승부를 가리는 상황을 맞이하였다. 장창선은 지옥 같은 사우나에서 나와 의식은 회복하였지만, 동료의 부축 없이는 한 걸음도 옮길 수 없었다. 동료의 부축을 받아 간신히 계체 장소로 이동하였다. 가쓰무라도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채 계체를 기다리고 있었다.
Table 4.

Competition result and deduction(Basic point of 6)

Round Jang Deduct Katsumura Deduct Sanders Deduct
1st win by decision 1 win by fall 0 win by default 0
2nd win by fall 0 win by fall 0 draw 2
3rd draw 2 draw 2 win by decision 1
4th win by decision 1 win by fall 0 win by decision 1
5th win by decision 1 win by decision 3 win by decision 1
6th draw 2 draw 2 draw 2
7th draw 2
Total deduct -1 -1 -3

사우나 안에서 창선이가 죽을 것 같아 물을 주고 싶었으나, 금메달이 목전에 있어서 주지 못했어요. 나와서도 쓰러져 있어 부축해서 계체 장소로 갔어요. 가쓰무라와 샌더스의 경기가 무승부가 되어 세 사람이 체중으로 승부를 가렸던 것 같던데…. 오래되어 정확한 기억이 없네요. 하여튼 그때의 일은 극적이었어요(김익종과의 인터뷰, 2017년 1월 8일).

두 선수가 승부를 가리기 위해 아무 말 없이 의무실에 있는 체중계 앞에 서자,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누가 체중계에 먼저 올라가는지를 결정하는 가위바위보를 국제레슬링연맹 공식 의사인 스트롬백과 심판장 앞에서 한 결과, 장창선이 져서 먼저 체중계에 올라섰다. 저울은 52.4㎏을 가리켰다. 다음은 일본의 가쓰무라가 저울에 올라갔다(Jang, 1966). 장창선보다 미세한 차이로 좀 더 나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일본 측 대표 입회인이 강력히 항의하여 다시 한 번 계체하게 되었다. 가쓰무라가 한 번 더 체중을 달았지만, 여전히 장창선보다 약간 많이 나가는 것으로 보였다. 일본 측은 또다시 항의하며 재계체를 요구하였다. 스트롬백은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여 세 번째 계체를 허락하였다. 한국선수단은 스포츠 강국의 횡포를 막지 못하는 약소국의 서러움을 뼈저리게 느껴야 했다. 가쓰무라가 세 번째로 올라선 체중계는 52.5㎏을 가리켰다. 이렇게 가쓰무라가 세 번씩이나 계체하여 승부를 가린 사실은 어느 연구나 보고서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단지, Choi(2016)만이 김익종과의 인터뷰를 통해 장창선과 가쓰무라 모두 두 차례 더 계체해 근소한 차이로 장창선이 우승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장창선과 가쓰무라의 계체량에 대해 장창선을 연구한 학자마다 약간씩 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 장창선의 자서전을 참고로 연구한 Choi(2016), Jang & Choi(2017), Ko(2016), Son & Cho(2009)의 연구에서는 장창선 52.4kg, 가쓰무라 52.5kg으로 100g 차이를 보였다. 반면, Cho(2000)Choi(1966)는 장창선 52kg, 가쓰무라 52.2kg으로 200g 차이였다고 보고하고 있다. 한 일간지는 장창선 52kg, 가쓰무라 53kg으로 1kg의 차이였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Kyunghyang Shinmun, 1966. 6. 21). 장창선과 인터뷰한 결과, 감량 도중 기절하여 동료선수의 부축을 받고 계체실로 이동해 혼미한 상태여서 정확하게 기억할 수 없었지만, 자서전에 기술된 100g 정도의 차이로 어렵게 이겼다고 하였다. 하지만 가쓰무라는 엄지와 검지 사이를 아주 좁게 보이면서 달걀 무게(평균 48~60g) 정도의 미세한 차이였다고 대답하였다. 창가에서 지켜본 최명종 코치와 일본 작가인 Oshima(2012)도 미세한 차이로 장창선이 우승했다고 진술하고 있다.
두 선수의 체중 차이에 대해 서로 엇갈린 주장을 하는 것은 그 당시 사용한 ‘판수동저울’로는 디지털 체중계처럼 미세한 차이를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장창선은 가쓰무라와의 감량 승부에서 100~200g의 미세한 차이로 승리하여 금메달을 획득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2017년 2월 4일, 최명종과의 인터뷰에 나와 있다.

원래는 의무실에 선수와 각 나라의 입회인 한 명씩 들어가야 했어요. 하지만 공정한 판결을 지켜보기 위해 우리와 일본은 두 사람이 입회하는 것으로 합의를 했어요. 우리는 하경대 단장과 이정기 국제심판이 들어갔지요. 저는 창가에서 지켜보았고요. 창선이는 처음만 재고, 일본 선수만이 항의가 받아들여져 세 번 정도 잰 것으로 기억해요. 체중 차이는 직접 보지 않았고, 저울도 지금만큼 정확하지 않지만, 제가 기록한 보고서에는 200g 차이로 기록했는데, 좌우지간 미세한 차이였습니다(최명종과의 인터뷰, 2017년 2월 4일).

위의 인용문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가쓰무라는 경기가 끝난 후, 체중을 감량하기 위해 피를 뽑았다는 소문이 돌 만큼 계체 승부가 치열하였다(Choi, 2016). 한 일간지에서도 가쓰무라가 피를 뽑으면서까지 체중을 줄였다는 기사가 실렸기 때문이다(Kyunghyang Shinmun, 1986. 6. 18). 최근 Ko(2016)의 연구에서도 장창선의 마지막 계체량 승부에서 가쓰무라는 체중을 줄이기 위해 피를 뽑는 방법을 선택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가쓰무라와 직접 인터뷰한 결과, 그가 체중을 줄이기 위해 피를 뽑았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샌더스와의 경기가 끝나고 잠깐 쉬는 시간은 있었지만, 피를 뽑을 수 있을 정도의 긴 시간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소문이 사실처럼 들릴 정도로 장창선과 가쓰무라와의 감량 경쟁이 대단히 치열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2016년 9월 17일, 가쓰무라의 인터뷰를 통해 알 수 있다.

(의아한 표정으로) 샌더스와의 경기를 마치고 잠깐 쉬고 곧바로 계체 장소로 이동했어요. 제가 주사기로 피를 뽑을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시간이 없었어요. 절대 그런 일은 없었어요(가쓰무라와의 인터뷰, 2016년 9월 17일).

위의 인용문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결승리그를 마치고 계체에 참여한 선수들에 관해서도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 Son & Cho(2009)는 장창선과 가쓰무라가 ‘가위바위보’로 순위를 정해 계체를 하였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Cho(1993)Choi(2016)는 샌더스까지 세 선수가 계체 승부를 겨루었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Cho(1993)는 샌더스가 가쓰무라보다 체중이 가벼워 2위를 차지했다는 정확하지 않은 내용을 담고 있다. Choi(2016)는 샌더스가 57kg으로 두 선수보다 체중이 많이 나가 3위로 결정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이 주장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은 그 당시의 대회 운영방식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털리도 세계레슬링선수권대회는 규정상 예선전에서 경기한 선수와는 결승리그에서 재대결을 하지 않은 것으로 되어 있었다. 따라서 장창선 과 가쓰무라는 예선전에서 시합하였기 때문에 두 선수 모두 샌더스와의 경기만을 남겨놓고 있었다. 가쓰무라보다 조 편성이 빠른 2번으로 대진표 순서에 의해 장창선 이 먼저 샌더스와 경기하고, 이어서 가쓰무라가 그와 대결하였다(Choi, 1966). 샌더스는 장창선과의 6회전 1차 대결에서 무승부를 하고 가쓰무라와의 경기에서 또다시 무승부를 기록하여 총 감점이 -3점으로 이미 3위로 확정된 상태였다. 장창선과 가쓰무라 모두 총 감점이 -1점으로 동률이었기 때문에 두 선수가 계체로 금메달과 은메달을 가려야 되는 상황에서 3위로 결정된 샌더스 선수가 계체에 참여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이에 대한 내용은 2016년 9월 17일, 가쓰무라의 인터뷰를 통해 알 수 있다.

저는 샌더스와의 마지막 경기를 마치고 매우 힘이 들었지만,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계체 장소로 갔어요. 그곳에서 장 선수와 저만 계체량을 하였습니다. 체중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것만은 정확히 기억합니다. 우리<일본의 가쓰무라>가 가위바위보로 이겨서 장 선수가 먼저 <체중> 재고, 제가 나중에 쟀어요. 장 선수의 체중과 제 체중이 <엄지와 검지 사이를 좁게 보이면서> 달걀 하나 무게 정도로 장창선 선수가 적게 나가는 것으로 나왔습니다. 처음에는 인정하지 못해 우리<일본의 입회인> 쪽에서 항의하여 두 번을 더 재고 나서 진 것을 인정했습니다(가쓰무라와의 인터뷰, 2016년 9월 17일).

장창선 금메달 획득의 의미

장창선은 어려운 시기에 세계레슬링선수권대회에서 첫 금메달을 획득함으로써 레슬링뿐만 아니라 엘리트 체육 전반의 발전에 크게 공헌한 인물로 기록되고 있다.
장창선이 출전한 털리도 세계선수권대회는 경기시간이 지금보다 4분이나 길고, 경기방식도 배드마크시스템이어서 지금보다 경기하기가 훨씬 어려운 상황이었다. 선수가 판정승으로 이겨도 1점이 감점되므로 금메달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서는 경기마다 무감점 폴승을 하려고 사력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배드마크시스템 경기방식 때문에 5승 1패를 하고도 메달 획득에 실패한 선수가 있었다. 1960년 17회 로마 올림픽에 참가한 자유형 라이트급 봉창원 선수는 결승리그 전까지 5승을 하고도 마지막 경기에서 불가리아 선수에게 판정패 당해 4위에 머물고 말았다(Cho, 2000). 이처럼 배드마크시스템은 마지막 순간까지 어느 선수가 우승하게 될지 예측하기 어려우므로 상대를 완벽하게 리드하여 폴승으로 이기지 않으면 우승을 담보할 수 없었다. 장창선은 그와 같은 경기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금메달을 획득함으로써 열악한 운동 환경에서 메달 사냥을 하던 레슬링 선수들에게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갖게 해 주었다.
당시의 경기규정은 최종경기에서 감점이 같을 경우, 계체로 승자를 결정해야 하는 문제점이 있었다. 이로 인해 장창선은 체중을 감소하기 위해 또다시 사우나에서 사투를 벌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장창선의 경우처럼 계체로 메달 색깔을 결정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하였던 것은 아니다. 그래서 국제레슬링연맹의 경기 기록에도 계체승이 아닌 7차전 부전승(Bye)으로 기록되어 있다(Choi, 2015). 이러한 감량 경쟁으로 야기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털리도 대회 이듬해인 1967년 경기방식은 5분 2회전에서 3분 3회전으로 변경하고, 무승부일 경우 승패가 날 때까지 연장전을 치르도록 하였다(Byen, 2008; Choi, 1966). 장창선 외에는 이전에 계체량 승부가 있었는지에 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장창선의 계체량 승부로 금메달리스트가 결정되고, 이와 같은 문제점이 발견되어 레슬링 경기방식이 크게 바뀌는 변화가 일어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2017년 2월 4일, 최명종의 인터뷰를 통해 알 수 있다.

국제심판강습회에 참석했는데, 1967년도부터는 기존의 5분 2회전에서 3분 3회전으로 바뀌고, 무승부일 경우 계체량으로 승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연장전을 치를 것이라고 했어요. 장창선과 가쓰무라 선수의 계체량 승부가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최명종과의 인터뷰, 2017년 2월 4일).

장창선이 금메달을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기 위의 체급 선수들과 경기하면서 쌓은 체력이 뒷받침되고, 아시안게임, 올림픽 등에 출전하면서 국제경험이 쌓이고 메달 획득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제대회의 경기 추세를 좀 더 정확하게 파악하고 참가 선수들에 대해 더 철저한 분석으로 경기했더라면, 당시 그의 경기력이나 컨디션으로 보아 그렇게 고전을 치르거나 계체량 승부까지 가지 않았을 수 있다. 장창선의 금메달 획득은 스포츠 정보 획득의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당시의 경기방식은 지금의 경기방식과 달리 득점한 선수가 소극적인 경기를 펼쳐도 감점 판정과 주의를 받지 않았다. 대회에 참가한 레슬링 강국인 일본, 미국, 터키, 구소련 등에서 출전한 선수들은 그러한 경기규칙에 맞춰 체력을 안배하여 경기를 진행하였다. 그런데 장창선은 도쿄 올림픽이나 세계레슬링선수권대회에서 10분 내내 공격적인 경기를 하였으며, 그의 공격 일변도의 시합은 체력을 안배하며 수비 위주로 경기하는 상대 선수를 쉽게 이기기 어려웠다(Cho, 2000; Choi, 1966; Choi, 2015). 그때의 지도자들은 전략, 전술적 정보가 부재한 가운데 힘든 경기를 하는 선수들을 안타까운 심정으로 지켜보며, 스포츠 정보력 부족을 한탄해야 했다. 1966년 털리도 세계레슬링선수권대회를 계기로 스포츠 정보의 필요성을 절감하며, 경기규칙의 변화와 국제대회 경기 추세를 파악하고, 대회를 준비함으로써 레슬링 금 밭의 기적을 일궈내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에 대한 내용은 2017년 1월 8일, 김익종의 인터뷰를 통해 알 수 있다.

한국선수단은 늘 국제경기 적응력이 부족하고, 정보력이 뒤떨어졌어요. 최근 우리나라 선수들이 국제 추세를 빠르게 따라가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장창선이가 금메달을 따면서 우리도 이제는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경기규칙의 변화나 추세의 변화에 민감해지기 시작한 거죠. 좋은 계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김익종과의 인터뷰, 2017년 1월 8일).

위의 인용문을 통해 장창선의 세계대회 금메달 획득은 그만의 노력에 의한 성과로 보기는 어렵다. 그도 그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Jang(1966)의 자서전 ‘영광의 뒤안길’에는 털리도 세계레슬링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는 데 기여한 레슬링 지도자와 임원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과학적인 훈련이 있었다. 장창선은 올림픽 첫 입상자인 이상균에게 기술을 전수받았고, 협회 회장인 김극환의 물질적 도움으로 일본에서 많은 선수와 훈련하여 기량과 경험을 쌓으며, 세계레슬링선수권대회 금메달 획득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무엇보다 과학적인 스포츠 지도라는 단어조차 낯설던 시절 시대를 앞서가는 최명종 코치의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지도가 있었기에 도쿄 올림픽에서의 은메달에 이은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할 수 있었다. 최명종 코치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과부하 운동을 도입하여 기초체력을 기르고 근육을 강화하여 시합을 유리하게 이끌 수 있도록 지도하였다. 털리도 세계대회를 앞두고도 미국 현지와의 시차를 고려하여 출국 전 훈련을 야간에 실시하여 수면 부족으로 인한 경기력 저하를 차단할 수 있었다(Choi, 2015). 이렇게 장창선은 선배 지도자의 헌신적인 지도와 도움이 있었기에 아시안게임 은메달, 올림픽 은메달, 세계레슬링선수권대회 금메달을 획득하며, 레슬링계에서 영원히 남을 금자탑을 쌓을 수 있었다. 이에 대한 내용은 2012년 2월 19일, 장창선의 인터뷰를 통해 알 수 있다.

금메달 획득은 레슬링 선배들의 헌신적인 지도와 은혜가 있었다고 생각하고, 선배들에게 보답하는 마음으로 후배와 제자들에게 제 경기력과 노하우를 전부 전수하겠다는 마음으로 지도했어요(장창선과의 인터뷰, 2012년 2월 19일).

위의 인용문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장창선은 많은 국민의 성원이 있었기에 금메달을 획득할 수 있었다. 털리도 대회의 출전을 앞두고 운동마저 제대로 못 하며 각자 출전할 여비를 마련하는 어려운 사정이 있었다. 하경대 단장의 도움이 있었지만, 터무니없이 모자라는 여비 때문에 대회의 출전이 어렵다는 내용이 언론에 보도(Maeil Business Newspaper, 1966. 6. 3)될 정도로 힘들었다. 또한, 동료선수마저 출전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으며 합숙소를 이탈한 가슴 아픈 사건이 있을 정도였다. 장창선의 어려운 사정을 안 국민은 기꺼이 성원의 성금을 내 주었으며(Maeil Business Newspaper, 1966. 6. 7), 여비가 부족한 선수들은 각자 마련한 여비를 함께 사용하기로 하고 어렵게 대회에 출전하였다. 결국, 장창선은 우리나라 최초로 금메달을 획득하며 애국가를 울려 퍼지게 하여 대한민국을 세계만방에 알렸다. 장창선은 국민들의 성원을 잊을 수 없었기에 이 금메달은 개인의 영예가 아닌 국민 모두의 영예로운 금메달이라고 하였다(Jang, 1966; Min, 1966).
장창선은 <Fig. 2>의 장면처럼 박정희 대통령이 메달리스트를 위한 축하연을 열고 격려금을 하사하는 대한체육회 2층 연회장에서 “저보다 더 불우한 체육인들을 위해 이 돈을 쓰신다면 앞으로 우리나라는 수많은 챔피언으로 더 큰 영광을 안게 될 것이다”라고 발언하였다. 이 발언으로 국민체육진흥기금의 조성 계기를 마련함으로써 한국 엘리트 체육이 안정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Ha et al., 2011). 장창선은 운동하는 후배들이 자신과 같은 가난의 역경을 겪지 않고, 운동에만 전념할 수 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박정희 대통령에게 안정적인 재정 지원을 요청했던 것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2012년 2월 19일, 장창선과의 인터뷰에 나와 있다.
Fig. 2.

Banquet hall for celebrating medalists by President Park on the 2nd floor of Korean Sports & Olympic Committee

(Jang Changsun is 2nd from right)
Sources: Jang Changsun pres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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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정신력이라면 누구한테도 안 져요. 학비 벌면서 운동하는 힘든 과정을 겪어서 그런 것 같아요. 저처럼 어렵게 운동하는 선수들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저도 국민이 모아 준 성금으로 간신히 대회에 갈 수 있었지만, 출전비 부족으로 정동구 선수가 합숙소를 이탈했을 때 너무 가슴이 아팠어요(장창선과의 인터뷰, 2012년 2월 19일).

장창선은 털리도 세계레슬링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하고, 이듬해에 은퇴하여 국가대표 지도자, 대한레슬링협회 전문이사와 부회장, 삼성생명 스포츠단 레슬링 총감독, 태릉선수촌장 등으로 활동하면서 많은 후배를 길러 각종 국제대회에서 메달 획득이 가능하도록 지도 또는 지원하였다. 한국이 레슬링 강국의 면모를 보이는 것은 장창선이 1960년대 아시아경기대회와 올림픽에서 은메달,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는 메달 행진을 시작한 것이 시발점이 되었다. 장창선의 세계대회에서 첫 금메달을 획득한 것은 우리나라 스포츠 역사의 큰 획을 그은 것이며, 한국 레슬링의 부흥과 전성기를 맞는 계기가 되었다. 더욱더 중요한 것은 1960년대 우리나라의 스포츠 환경이 열악하였지만, 장창선의 금메달 획득은 스포츠와 사회가 결속되어 이룩한 영광의 산물이다. 이로 인해 국민에게 희망과 용기를 심어주었으며, 스포츠가 대중적이고 보편화되도록 사회 환경을 조성하는 계기를 마련하는데 더 큰 의미가 있다.

결론 및 제언

본 연구는 2014년 대한민국 스포츠영웅으로 선정된 장창선의 1966년 털리도 세계레슬링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는 과정과 그것이 지닌 의미를 보다 다각적이고 심층적으로 밝히는 데 목적을 두고 수행하였다. 연구 참여자로 장창선과 그와 감량경쟁을 하며 끝까지 사투를 벌였던 가쓰무라 선수를 연구 참여자로 선정하였다. 또한, 장창선의 메달 획득 과정에 함께 했던 선수와 임원을 제보자로 선정하여 심층면담을 실시하였다. 심층면담을 통해 수집한 자료는 Patton(1991)의 자료 분석 방법을 사용하여 일차 분석한 다음 관련 선행연구, 당시의 신문, 보고서 등과 비교 분석하여 주요 주제를 도출하였다. 수집된 자료를 분석한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다.
장창선은 세 번의 사투를 벌인 결과, 세계레슬링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첫 번째 사투는 체중 감량이었다. 장창선은 시합에서 유리한 고지를 확보하기 위해 다른 선수의 세배나 되는 체중을 감량하며 각종 국제대회에 출전하였다. 그가 메달을 획득할 당시에는 레슬링 경기가 있을 때마다 계체해야 했다. 장창선처럼 많은 감량을 한 선수가 3일 동안 진행되는 경기일정 내내 적정 체중을 유지하는 것은 대단한 정신력이 요구되는 일이다. 장창선은 가난한 학창시절 생활비를 벌면서 다져진 체력과 정신력으로 감량 부담을 잘 견디며, 좋은 컨디션으로 경기하여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장창선은 1962년 자카르타 아시안게임과 1964년 도쿄 올림픽에서 일본 선수에게 패해 은메달에 그치면서 금메달의 가치를 뼈저리게 경험하였다. 그 이후, 털리도 세계레슬링선수권대회 금메달 획득을 결심하고 철저히 대비하였다. 하지만 스포츠 정보 부족 등으로 대회 때마다 새롭게 부상하는 선수들을 파악하지 못하였다. 사력을 다하였지만, 우승 후보였던 가쓰무라와 샌더스 선수와 비기면서 계체로 승부를 결정해야 하는 상황을 맞이하였다.
계체로 금메달을 결정하는 상황을 맞이한 장창선은 샌더스와 무승부로 경기가 끝나자마자, 가쓰무라를 이기기 위해 지옥 같은 사우나에서 단 1g이라도 더 줄이기 위해 땀을 빼기 시작하였다. 사우나에서 기절까지 하며 감량한 결과, 불과 100~200g 차이로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장창선의 털리도 세계레슬링선수권대회 금메달 획득은 엘리트 선수의 운동 환경 개선, 과학적 지도의 필요성, 메달 획득에 대한 자신감, 스포츠 정보의 중요성 인식, 스포츠와 사회 환경 조성 등의 의미를 제공하였다. 장창선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엘리트 선수 육성을 위한 안정적인 재정 확보를 건의하여 체육진흥기금의 조성 계기를 마련하였다. 또한, 그는 가난과 역경을 극복하고 끊임없는 도전 정신으로 어려운 경기 상황에서도 금메달을 획득함으로써 후배 선수들에게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심어주며, 금메달 행진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각종 스포츠 정보가 부족하고 과학적인 지도가 싹트기 시작한 시기에 각고의 노력으로 금메달을 획득함으로써 스포츠 정보 수집의 중요성과 과학적 지도의 필요성을 부각시켰다. 장창선은 금메달을 획득하여 한국 레슬링의 기틀을 마련하였을 뿐만 아니라, 국민에게 희망과 용기를 심어주었으며, 스포츠가 대중적이고 보편화되도록 사회 환경을 조성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데 기여하였다.

Acknowledgements

이 논문은 2017년도 인천대학교 자체연구비 지원으로 연구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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