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가장 체육수업다운 수업은?
교사는 학생들이 매일 축제적인 스포츠교육 경험을 갖도록 해야 한다. 축제화는 시즌 끝의 챔피언 결정전에서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축제 분위기의 결승전 행사에서만 유용하지 않다. 배우고 경쟁하는 시즌 동안 매일매일의 환경을 가능하면 축제화하도록 노력해야 한다.2)
2. ‘감정 자본주의’ 사회 속 감정의 초상
가. 자아-되기와 감정(鑑定) 받는 감정(感情)
자본주의는 오히려 이러한 비합리적인 충동의 억제(무제한적으로 영리를 탐하는 것), 또는 적어도 합리적 조절과 동일할 수 있다. 물론 자본주의는 지속적이고 합리적인 자본주의적 경영을 통한 이윤 추구, 즉 끊임없이 재생되는 이윤인 수익성의 추구와 동일하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반드시 그러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유노동의 합리적인 조직에 기반하는 시민계층적 기업자본주의의 형성이 중심적인 문제가 된다. 이를 다시 문화사적으로 표현하자면, 서구 시민계층의 발생과 그 특성이 중심적인 문제가 된다…… 근대 서구 자본주의의 합리성은 오늘날 정밀 계산의 토대가 되는 기술적으로 결정적인 요소들의 계산 가능성에 의해 본질적으로 조건 지어진다…… 우선 문제가 되는 것은 다시금 서구적 합리주의의, 그리고 그 테두리 안에서 근대 서구적 합리주의의 고유한 특성을 인식하고 이것을 발생론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그와 같은 설명 시도는 모두 경제의 근본적 중요성에 상응해 무엇보다 경제적 조건을 고려해야 한다.10)
감정 자본주의란 감정 담론들 및 실천들이 경제 담론들 및 실천들을 구성하고 경제 담론들 및 실천들이 감정 담론들 및 실천들을 구성하는 문화, 한편으로는 정서(affect)가 경제적 행위의 본질적인 측면으로 변모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감정생활―특히 중류계급의 감정생활―이 경제적 관계 및 경제적 교환의 논리를 따라가는 문화이다(19).
이런 감정들은 많은 경우 나 자신에게도 드러나지 않는 감정, 언어 사용에서의 새로운 기술을 요구하는 감정이었다. 하지만 이런 감정들을 표현하고 “발굴”하는 궁극의 이유는, 친밀한 관계가 근본적으로 평등한 관계여야 하기 때문이었다(63-64).
나의 욕구와 감정과 목표를 냉정한 언어적 소통 앞에 제출함으로써 평등과 공정한 교환을 창출하는 것이 바로 지성화의 목표이다…… 자기의 감정을 바깥에서 관찰해보라는 것이다. 이런 가르침―중립적인 표출의 절차를 통해 감정을 조절하라는 가르침―은 사실 소통과 치료학 에토스의 핵심이다…… 치료학이라는 설득 담론은, 한편으로는 내 욕구들과 감정들을 인식할 수 있게 하는 온갖 테크닉을 제공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감정을 주체의 외부에 존재하는 대상(주체가 관찰하고 조절하는 대상)으로 만든다(75-76).
나. 웹 문화와 육체의 탈존(脫存)
보통은 상대에게 끌리는 단계가 상대에 대해서 아는 단계보다 먼저인 반면에, 인터넷에서는 아는 단계가 끌리는 단계(최소한 로맨틱한 상호작용의 육체적 현존 및 현현)보다 먼저이다. 오늘날의 인터넷 상황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속성들 일체로 인식하며, 그러한 인식이 이루어진 후에야 비로소(점차로) 그들의 육체적 현존을 인식한다(154).
인터넷은 정신 대 육체라는 데카르트의 옛 이분법을 극단적으로 부활시킨다(정신은 사유와 정체성을 위한 유일한 자리, 참된 자리이다). 인터넷 자아를 갖는다는 것은 데카르트적 코기토(cogito)를 갖는다는 뜻이요, 내 의식의 벽에 갇힌 채로 세계를 내다보는 방식으로 세계를 대한다는 뜻이다(159-160).
요컨대 로맨틱한 상상력은 육체에 기반하는 것으로서, 메를로-퐁티가 말하는 이른바 감지(sentir)의 차원에서 진행되는 반면, 인터넷 상상력은 지각의 실존적 배경을 제거하는 인지(connaître)의 차원에서 진행된다…… 후설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처럼, 서로 다른 사물들 사이에 관계가 생기는 이유는 “지각하고 움직이는 육체”가 그것들을 포착하기 때문이다. 경험된 육체(lived body)는 세계와 접촉할 때 재귀적 경험(reflexive experience)을 얻는다. 사랑은 후설이 설명하는 방식대로 세계와 만날 때에 발생한다. 사람들이 생각지도 않았던 상대와 사랑에 빠지기도 하고, 사랑에 빠진 뒤에 자기의 기대와 맞지 않는 요소를 기꺼이 무시하기도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곧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전체이지 전체의 부분들이 아니다(196-197).
3. 스피노자에서 감정의 위상과 역할
가. 존재 역량과 감정의 관계
여기에서는 누구나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 즉 사람들은 모두 사물의 원인을 모르는 채로 태어난다는 것, 인간은 모두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욕망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 등을 근거로 삼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14)
또, 그들은 감정과 인간의 생활방식에 관하여 기술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공통적인 자연법칙에 따르는 자연적 사물이 아니라, 자연을 벗어난 사물에 대하여 논술한 것처럼 보인다. 참으로 그들은 자연 안의 인간을 통치권 안의 통치권처럼 생각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간이 자연의 질서에 따르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어지럽히며, 인간이 자신의 행동에 대하여 절대의 능력을 가지고 자기 자신 이외의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도 결정되지 않는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또, 그들은 인간의 무능력과 약점의 원인을 공통적인 자연력에 돌리지 않고, 내가 모르는 인간 본성의 결함에 돌린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와 같은 인간의 본성을 슬퍼하고 비웃고 경멸하거나, 또는 (더욱 자주 일어나는 일이지만) 저주한다. (E. Ⅲ. 서론)
각각의 사물은, 자신의 능력이 미치는 한, 자신의 존재를 끈질기게 지속하려고 노력한다(E. Ⅲ. 정리 6).
사물은 결코 자신이 파괴될 수 있는 어떤 것, 즉 자신의 존재를 제거하는 어떤 것을 자신 안에 가지고 있지 않다(정리 4에 의해). 반대로, 개물은 자신의 존재를 제거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항한다(정리 5에 의해). 그러므로 그것은 가능한 한, 그리고 자신의 능력이 미치는 한, 자신의 존재를 끈질기게 지속하려고 노력한다(E. Ⅲ. 정리 6. 증명).
각각의 사물이 자신의 존재를 끈질기게 지속하려는 노력[코나투스(conatus)]은 그 사물의 현실적 본질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E. Ⅲ. 정리 7).
그러므로 각 사물이 홀로 또는 다른 것들과 함께 활동하는, 또는 활동하려고 애쓰는 능력이나 노력, 즉(정리 6에 의해) 각 사물이 자신의 존재를 끈질기게 지속하려고 애쓰는 능력이나 노력[코나투스]은 그 사물의 주어진 혹은 현실적인 본질일 뿐이다(E. Ⅲ. 정리 7. 증명).15)
긍정적인 방향으로 조절된 생명의 상태에 도달하고자 하는 끊임없는 시도는 우리 존재의 심오하고도 결정적인 부분인 것이 분명하다. 실제로 이것은 각 존재가 자신을 보존하기 위하여 기울이는 가차 없는 노력(코나투스, conatus)에 대해 묘사할 때 스피노자가 직관한 우리 존재의 첫 번째 현실이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해석해 볼 때 스피노자의 개념은, 살아 있는 생명체의 생존을 위협하는 수많은 기이한 것들에 맞서 자신의 구조와 기능의 일관성을 유지하도록 만들어졌음을 암시한다(Damasio. 2013: 48).
이 노력(코나투스-필자)이 단지 정신과 관련될 때는 의지라 불린다. 그러나 정신과 신체에 동시에 관련될 때는 욕구라 불린다. 그러므로 이 욕구는 다름 아닌 인간 본질 자체이며, 그 본성으로부터 필연적으로 그의 보전을 증진시킬 수 있는 것들이 따라 나온다. 따라서 인간은 그러한 것들을 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다음으로 욕구와 욕망 간에는, 일반적으로 욕망이 자신의 욕구를 의식하고 있는 한에서의 인간과 관련된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아무런 차이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욕망은 욕구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 있는 욕구라고 정의될 수 있다(E. Ⅲ. 정리 9. 주석, Nadler, 2014: 332에서 재인용).
어떤 신체가 동시에 많은 방식으로 작용을 하거나 또는 작용을 받는 데에 다른 신체들보다 더 유능할수록, 그것의 정신도 동시에 많은 것을 지각하는 데 다른 정신들보다 그만큼 더 유능하다(E. Ⅱ. 정리 13. 증명).
감정이란 신체의 활동능력을 증대시키거나 감소시키며, 촉진하거나 억제하는 신체의 변용인 동시에 그러한 변용의 관념이라고 나는 이해한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그러한 변용들 중 어느 것의 타당한 원인이 될 수 있다면, 나는 그 감정을 능동으로 이해하고, 그렇지 않다면 수동으로 이해한다(E. Ⅲ. 정의 3).
나. 감정 교류와 공동체성의 관계
나는 이하에서 ‘기쁨을 정신이 보다 큰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수동’으로 이해할 것이며, ‘슬픔을 정신이 보다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수동’으로 이해할 것이다. ‘정신과 신체에 동시에 관계되어 있는 기쁨의 감정’을 나는 쾌감 또는 유쾌라고 부르고, ‘그러한 슬픔의 감정’을 고통 또는 우울이라고 부른다(E. Ⅲ. 정리 11. 주석).
개개의 사물들이란 한정된 존재를 갖는 유한한 것들이라고 나는 이해한다. 만일 다수의 개물[개체]들이 모두 동시에 한 결과의 원인이 되도록 한 활동으로 협동한다면, 나는 그러한 한에 있어서, 그것들 모두를 하나의 개체로 간주한다(E. Ⅱ. 정의 7).
인간 신체의 부분들이 서로에 대해 갖고 있는 운동과 정지의 비율이 유지되도록 하는 것은 선이다. 이에 반하여, 인간 신체의 부분들이 서로에 대해 운동과 정지의 다른 비율을 갖도록 하는 것은 악이다(E. Ⅳ. 정리 39).
자기가 사랑하는 것이 기쁨 또는 슬픔으로 자극받아 변화되는 것을 표상하는 사람도 역시 기쁨 또는 슬픔으로 자극받아 변화될 것이다. 그리고 사랑받는 대상의 그러한 감정이 커지거나 작아짐에 따라서 사랑하는 사람의 감정도 더 커지거나 더 작아질 것이다(E. Ⅲ. 정리 21).
우리와 유사한 것으로서, 그것에 대하여 우리가 아무런 감정도 갖고 있지 않은 것이 어떤 감정으로 자극받아 변화되는 것을 우리가 표상한다면, 우리는 그것으로 인하여 유사한 감정으로 자극받아 변화된다(E. Ⅲ. 정리 27).
4. 축제와 공동체적 열정의 생산
가. 사회와 감정의 관계
우리는 아이의 삶에 처음부터 규칙적으로 먹게 하고 마시게 하며 자게 한다. 우리는 그에게 청결과 정숙, 복종을 강요하며, 좀 지나서는 타인에 대한 적절한 배려와 관습과 규칙에 대한 준수, 노동의 필요성 등을 배울 수 있도록 압력을 가한다…… 교육의 목표란 엄밀히 말해 인간의 사회화이며, 따라서 교육의 과정은 간단히 말해 사회적 존재가 만들어지는 역사적 양식에 우리를 집어넣는 것이라는 점이다(58).
나. 감정 에너지를 생산하는 축제
이러한 행동양식들은 공동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것들이 각 사람의 마음 속에서 생각되어지면서 동반되는 활기는 다른 모든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도 보존되면서 서로 간에 영향을 미친다(297).
공통된 열정에 자극된 회중들에 둘러싸이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만 한정되어 있을 때는 할 수 없는 행위들과 감정들이 생겨나게 된다…… 개인으로 내버려두면 곧 약화되어질 감정들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감정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모이게 하여 서로서로 좀 더 긴밀하고 적극적인 관계를 맺도록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힘의 증가는 그가 호소하고 있는 바로 그 집단으로부터 온다. 그의 말이 불러일으키는 감정들은 커지고 증폭되어 그에게로 다시 돌아오는데, 그러한 감정들은 그 자신의 감정을 더욱 강화시킨다(300-301).
의식은 이러한 믿음들의 생명력을 유지하고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다시 말해서 결국 집합적 의식(意識)의 가장 본질적인 요소들을 소생시키기 위해서만 오직 쓰이고 또 그렇게 쓰여질 수 있다(520).
1. 집단 유대, 집단 성원으로서의 소속감.
2. 개인의 정서적 에너지 생성: 자신감, 의기충천, 힘, 열정, 진취적 행위 의욕.
3. 집단을 표상하는 상징: 상징적 표지 또는 자신들이 집단 성원임을 떠올리게 해주는 집합적 재현물(아이콘, 구호, 몸짓). 이들은 뒤르케임이 말하는 ‘성스러운 대상’이다. 집단 유대감으로 고양된 사람들은 크나큰 외경심으로 상징을 다루고 불경스러운 외부인이나 반역적인 내부자로부터 상징을 수호한다.
4. 도덕 감정: 집단을 신봉하고 상징을 받들어 모시며 내부자의 위반으로부터 집단을 지키려는 정의의 감각. 이와 함께 도덕적 악 또는 집단 유대와 그 상징적 표지를 거스르는 부도덕에 대한 감각(88)
5. 수업의 축제화와 도덕성 발달
아름다움, 장식, 음악, 스포츠, 연극, 그리고 다른 사람을 해치치 않고 누구라도 이용할 수 있는 이런 종류의 다른 것으로 자신을 상쾌하게 하고 원기를 북돋우는 것은 현자에게 어울린다. 왜냐하면 인간의 신체는 본성을 달리하는 매우 많은 부분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부분들은, 몸 전체가 그것의 본성에서 나올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하여 똑같이 유능하게 될 수 있도록, 따라서 정신도 많은 것을 동시에 인식하는 일에 똑같이 유능하게 될 수 있도록, 여러 가지의 새로운 영양분을 끊임없이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E. Ⅴ. 정리 45. 주석).
그들이 몸짓, 외침들, 태도 등을 통해 토템을 닮고자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 그들은 서로 간에 자신들이 같은 도덕적 공동체의 구성원이라는 것을 보여주며 그들을 묶고 있는 친족관계를 의식하게 된다. 의식(儀式)은 이러한 친족관계를 표현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의식은 이러한 관계를 만들거나 회복시킨다(497).
우리가 직접적으로 습득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은 필연적으로 도덕적인 힘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힘들은 당연히 비인격적이다. 왜냐하면 비인격적 힘의 개념이 가장 먼저 구성되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두 가지 조건을 만족시키는 유일한 힘들은 공동생활로부터 나온 힘들이다. 그것들은 바로 집합적인 힘이다. 사실상 한편으로 그 힘들은 전적으로 정신적인 힘이다. 그 힘들은 오로지 객관화된 관념들과 감정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 힘들은 당연히 비인격적인 힘이다. 왜냐하면 그 힘들은 협동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힘보다 더 전염적이고 결과적으로 더 전달이 잘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506).
의례의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기준은 무엇일까? 참여자들이 ‘공허한 의례’, ‘행사에 불과한 것’, ‘김빠진 것’이라고 말하는 공식적 의례가 있다…… 가장 즉각적으로 알 수 있는 실패는 집합적 열기도 낮고, 순간적으로 쏟아지는 환호 소리도 없고, 정서적 합일을 느낄 수 없거나 실망스러운 정도로 낮은 경우이다. 의례의 산출물 쪽에서도 실패의 표지를 볼 수 있다. 집단 유대감이 거의 또는 전혀 생기지 않는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감각이 강화되지도 않고 변화를 일으키지도 않는다. 집단의 상징에 아무런 경외심을 느끼지 못하고 정서적 에너지도 높아지지 않는다. 의례의 영향을 받지 못하고 평범한 감정에 머물거나 더 나쁜 경우는 질질 끌려간다는 느낌, 지루하고 구속당하는 느낌, 심지어는 우울증, 피곤함, 도망가고 싶은 의례도 있다.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