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J Sport Sci > Volume 29(3); 2018 > Article
체육교육의 정당화론: ‘감정 자본주의’ 사회에서 체육교육이 요청되는 이유

ABSTRACT

Purpose

This purpose of this study was to understand how physical education can contribute to healthy emotions and activities of human beings.

Methods

We analyze Eva Illouz's emotional capitalism theory, the position and role of emotions in Spinoza, and Durkheim's theory of religious sociology.

Results

Illouz shows that emotions are coordinated by rationality through the analysis of emotional capitalism, and that expressions of natural emotions are restricted and controlled even in the area of ​​intimacy. In Spinoza, emotions are divided into three emotions: joy, sadness, and desire as concepts of body movements. Emotions reveal that they are closely related to human activity, and emotions of joy are calculated for human emotional development Emphasize the need to organize meetings of possible bodies. Durkheim argues that while society is placed in a religious position, society is the subject of individual praise and the reality of baptizing individuals into morality. At this time, festivals and rituals reveal individuals to be a powerful mechanism that leads to devotion to society and strengthens individual’s sense of community and morality.

Conclusions

Making physical education classes as festivals enhances students' sense of community. It can also be an activity that allows students to have healthy moral and emotional energy.

국문초록

목적

본 논문은 체육이 인간의 건강한 감정 및 활동성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가를 파악하는 데 목적이 있다.

방법

이를 위해 일루즈의 감정 자본주의 비판, 스피노자에서 감정의 위상과 역할, 뒤르케임의 종교사회학 이론을 연관시켜 분석한다.

결과

일루즈는 감정 자본주의 사회 분석을 통해 감정이 합리성에 의해 조율되고 있으며, 친밀성의 영역에서도 자연스러운 감정 표현은 제한, 관리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스피노자에서 감정은 신체의 움직임에 대한 관념으로서 기쁨, 슬픔, 욕망의 세 가지 감정으로 나뉘며, 감정이 인간의 활동능력과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음을 밝히고, 인간의 감정 발달을 위해서는 기쁨의 감정을 산출할 수 있는 신체들 간의 만남을 조직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다. 뒤르케임은 사회를 종교적 위치에 놓으면서 사회가 개인들의 찬양의 대상이며 개인들에게 도덕성을 세례하는 실재라는 점을 주장한다. 이때 축제와 의식은 개인들에게 사회에 대한 헌신을 이끌고 그것으로 개인의 공동체적 감각과 도덕성을 강화시키는 강력한 기제라는 점이 드러난다.

결론

체육수업을 축제로 만드는 것은 학생들의 공동체에 대한 감각을 향상시킨다. 또한, 그것은 학생들이 건강한 도덕성과 감정 에너지를 갖게 하는 활동이 될 수 있다.

1. 가장 체육수업다운 수업은?

학교체육 현장에서 활용되는 대표적 수업 모형 중 하나인 스포츠교육 모형은 기존의 체육수업 모형에서 볼 수 없는 6가지의 대표적인 특징적 요소들을 지니고 있다. 시즌, 팀 소속, 공식 경기 일정, 기록 보존, 축제화, 결승 행사가 그것이다. 스포츠교육 모형을 전통적 체육수업, 다른 체육수업 모형과 확연히 구분 짓게 해주는 이 요소들은 문화로서의 스포츠가 체육수업에서 적극적으로 다루어질 수 있도록 하는 장치들이다(Siedentop, 1994). 직접교수 모형, 전술게임 모형, 개인적․사회적 책임감 모형 등 대부분의 체육수업 모형들은 스포츠에 담긴 다양한 문화적 차원들을 명징하게 드러내고 경험, 학습시키려는 의도를 갖지는 않는다.1) 반면, 스포츠교육 모형은 독특하게도 문화로서의 스포츠가 체육수업에서 구현될 수 있도록 하는 요소들을 구비하고 이를 적극 강조, 활용하고 있다. 그러면 체육수업을 스포츠 문화의 체험의 장으로 안내하는 이 6개의 요소들은 서로 어떠한 관계에 놓여 있을까? 얼핏 이 요소들은 ‘결승 행사’를 클라이맥스로 놓고 이에 성공적으로 도달하기 위한 상호 보완적 동학의 구성물들로 보인다. 한 학기, 또는 학기의 상당 부분을 할애하여 이를 스포츠 시즌으로 조직하고 결승 행사를 정점으로 수업 분위기를 고조시켜가는 것이 스포츠교육 모형의 구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스포츠교육 모형 개발자인 시덴탑 자신은 이 6개의 특징적 요소들 중에서 ‘축제화’를 그 으뜸으로 꼽는다. 시덴탑(2011)은 이를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교사는 학생들이 매일 축제적인 스포츠교육 경험을 갖도록 해야 한다. 축제화는 시즌 끝의 챔피언 결정전에서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축제 분위기의 결승전 행사에서만 유용하지 않다. 배우고 경쟁하는 시즌 동안 매일매일의 환경을 가능하면 축제화하도록 노력해야 한다.2)

왜 시덴탑은 이처럼 ‘축제화’를 스포츠교육 모형에 등장하는 각 요소들을 관류하는 핵심적 요소로 부각시키는 것일까? 그 이유를 찾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스포츠교육 모형에서의 ‘스포츠교육’은 스포츠를 문화로서 가르치려는 목적을 갖는다. 스포츠교육을 통해 학생들은 팀에 소속감을 느끼고, 리그 참여와 승리를 위한 협력적 실천을 지속함으로써 공동체 성원의 감각과 사회성을 획득한다(Metzler, 2010: 380). 이때 축제화는 공동체의식이 형성되는 결정적 지점으로 참여자들을 매순간 이끄는 ‘약방의 감초’와 같은 역할을 한다. 나아가 시덴탑은 축제화가 중요하다는 점을 기존 수업에 대한 비판을 통해 강조하면서, 모든 체육수업이 축제화를 반드시 실천할 것을 주문한다. 이는 어느 편인가 하면, 그가 보기에 “현재 많은 곳에서 이루어지는 체육활동은 학생들에게 지루함 그 자체다.”3) 무엇보다 체육수업에 한껏 기대를 품고 있는 청소년들에게 그것은 전혀 어필을 못하고 있다. 그런데 스포츠교육 모형에 따른 수업은 그다지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것도 아니면서, 교사의 짧은 시간 할애로 수업 운영에 필요한 준비를 마치고 학생들의 흥미를 돋울 수가 있다. 여기서 흥미로 고무된 학생들이 수업 준비에 큰 기여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교사를 돕는 학생들의 자발적 참여를 쉽게 이끌어내는 요인들이 체육수업의 각 단계와 국면에서 작동하는데, 여기에는 학생들의 열정을 유지시키는 축제화의 요소가 늘 개재되어 있다. 체육수업이 진행되는 동안 축제화 요소의 항상적인 작동으로 학생들은 “스포츠(번역 수정-필자) 경험에 대해 흥미를 얻고 스포츠 시즌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151) 이는 팀을 구성하는 학생들이 서로 상당 정도의 협력을 하지 않으면 스포츠의 핵심적 가치인 경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다.(28) 결국 시덴탑이 축제화의 요소를 부쩍 강조하는 이유는 체육수업을 유지시킬 열정과 헌신이 학생들로부터 발출되지 않으면 체육수업은 학생들에게 지루함 그 자체로 인식되면서 실패로 귀결될 것이기 때문이다. 학생들의 흥미를 최대화시키는 것, 이를 통해 학생들을 수업 준비, 과정, 정리까지 자발적, 적극적으로 참여시키는 것이 시덴탑이 말한 체육수업 성공의 열쇠다.
그런데 시덴탑이 언급한, 학생들이 체육수업에서 느끼는 지루함과 이를 극복하게 하는 흥미, 그리고 흥미가 축적됨으로써 획득되는 주의를 기울이고 노력하는 태도는, 듀이가 그의 주저 『흥미와 노력, 그 교육적 의의』에서 밝힌 흥미에 관한 교육적 입장과 공명하는 바가 크다. 듀이는 아이의 활동과 교육적 성취가 순전히 노력에 의해서는 전혀 달성될 수 없다고 말한다. 아이의 활동에 의무감이 발생하면 강요에 의해서 그 활동을 하는 것과 다름없는 사태가 전개된다. 그즈음 아이들은 지루해진다. 사태가 이렇게 전개되면 이제부터는 외적 압력으로 학생을 끌고 가야 하는데 그것은 아이를 속박과 억압으로 얽매는 것과 같다. 따라서 시덴탑이 지루한 체육수업이 전개되는 것에 반발하여 흥미를 강조하듯이, 듀이 역시 흥미를 강력하게 요청한다. “진정한 흥미는 아이 자신의 성장 방향을 가리키며 아이가 자기 자신이려고 하면 절대적으로 요청되는 무엇”4)이기 때문이다. 이 진술은 흥미가 아이가 자기 자신을 가꾸는 도덕적 힘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그러므로 학생들이 지루함을 느끼고 강요에 의한 활동으로 노력을 투입해야 한다면 그들은 주의의 분열을 겪게 되면서 결국 “지적, 도덕적 인격의 붕괴”(20)에 직면한다. 결국 도덕 발달의 질료인 “아이의 주의나 감정, 성향이 주로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알기 전에는, 교육적 훈련의 문제는 그 언저리도 건드리지 못하게”(19) 된다. 듀이에게 흥미는 아이의 억압되지 않는 감정 발산과 “충동을 잘 구현”(25)하고 조율하는 길잡이인 것이다. 아이의 감정, 충동, 본능을 길들이는 것이 도덕적 성장에 중요하다면, 흥미는 아이의 자연적 에너지를 변형하여 도덕의 세계로 안내하는 길동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시덴탑이 체육수업의 가장 큰 적을 지루함이라고 규정했을 때, 그는 체육수업은 흥미가 전제된 후에라야 수업에 투입된 여타의 활동이 성공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판단하는 것과 다름없다. 시덴탑이 보기에 체육수업에서 흥미는 축제화라는 요소에 의해서 담보, 지속되는데, 결국 축제화는 학생의 체육수업에 대한 흥미를 이끌어내는 강력한 요소가 된다할 수 있다. 그런데 듀이에 따르면 흥미는 곧 학생에 내재된 감정과 본능의 에너지를 도덕의 세계에 연착륙시키는 역할을 함으로써 학생의 도덕적 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시덴탑과 듀이의 견해를 종합적으로 고려해보건대―체육수업의 축제화는 학생의 도덕적 성장에 모종의 역할을 하는 것이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정리하면, 이는 체육수업의 지루함, 수업의 축제화 필요, 축제화는 지루함에 대한 반발이므로 흥미를 강력히 요구하는 것, 흥미는 곧 감정을 어떠한 방식으로 처리할 것인가와 관련된 것, 그에 따른 축제화와 감정 에너지의 관계 설정과 그것의 의미를 파악하기의 순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지점에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질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감정이란 무엇이며, 그것은 인간의 도덕적 성장에서 어떠한 의미를 갖는가? 감정을 인간의 강력한 삶의 에너지로 이해할 때, 이것을 자연스럽고 생산적으로 표출되게 만드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감정 에너지를 축제라는 비일상적인 집단적 행위 속에서 발산하는 것은 인간 세계의 공동체적 삶과 도덕적 질서에 어떠한 의미를 갖는가? 감정을 다루는 일에 체육교육이 기여할 수 있는 고유하고 독특한 역할은 무엇이며, 그것은 왜 체육교육에 강력히 요청되는가?
본고는 이상과 같이 제기된 질문을 염두에 두면서 시덴탑이 말한 축제화가 체육수업에서 갖는 윤리학적, 사회학적 의미를 다음과 같은 단계를 거쳐 규명하고자 한다. 첫째, 현대사회에서 감정이 처한 위치와 그것이 변질되는 사회적 배경을 분석함으로써 ‘감정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온전한 감정의 표출과 감정적 소통이 고도의 합리성 체계와 실천에 의해 변질되고 있음을 진단한다. 둘째, 인간의 몸과 감정, 그리고 그들의 관계에 대한 선구적 선취를 이룬 스피노자에서 인간의 감정이 어떻게 이해되고 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신체와 감정이 인간의 도덕적 성장과 공동체의 삶에서 갖는 의미를 제시한다. 셋째, 축제에서 인간의 감정 에너지가 어떠한 방식으로 처리되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다시 공동체의 활력과 개인의 윤리적 삶에 되돌려지는지를 뒤르케임의 종교사회학 이론을 빌어 분석한다. 이를 통해 감정 자본주의에서 체육교육이 어떻게 합리적 소통의 하위 도구로 쇠락한 감정의 힘을 회복시키는지 그 단서를 찾는다. 넷째, 이상의 분석을 양분 삼아 체육수업의 축제화가 갖는 의미를 이론적 수준에서 논의하고 체육교육의 정당화에 필요한 하나의 전거를 마련하고자 한다.

2. ‘감정 자본주의’ 사회 속 감정의 초상

가. 자아-되기와 감정(鑑定) 받는 감정(感情)

우리는 체육수업에 대한 축제화 요구가 결국 인간의 감정 에너지를 어떻게 처리하느냐는 문제와 긴밀히 관련돼 있다는 문제 설정을 하였다. 이에 따르면 본론의 첫 번째 단계에서 우선적으로 해명되어야 할 과제는 ‘감정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감정이 인간의 존재와 어떠한 관련을 맺고 있는가를 검토하기 이전에, 현대 사회에서 감정이 놓인 위상과 처지를 먼저 짚어보는 우회로를 택하고자 한다. 이론적 차원에서 감정을 이해하기 이전에 현대사회에서 감정이 어떻게 인식되고 사회적으로 구성되어 있는가에 대한 분석이 선행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왜 체육수업에 대한 이해에서 하필 감정이 다루어져야 하는가?”라는 의문에 현대사회에서 감정이 처한 위기를 보다 명징하게 드러내는 것은 중요하다 생각된다. 그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다듬기를 통해 후술될 감정에 대한 이론적 이해에 체육교육이 틈입할 지점이 어디인가를 보다 명확하게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감정이 사회 이론에서 중요하게 본격적으로 주목 받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후반부터이다. 이전에는 파슨스의 이론5)이 사회 이론 진영 내에서 헤게모니를 견고히 하면서 감정이란 테마는 변두리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Kim, 2013: 8-9). 그러나 철학을 비롯한 정치학, 사회학, 인류학 등의 학문에서 이성의 대당으로서 감정을 문제시하기 시작하면서 감정은 급격히 학문적 연구 대상으로 부상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무엇보다 이론 진영 내에서 이성 중심주의, 합리주의적 방식의 학문적 풍토에 대한 반성이 이루어지고, 고전 이론가들에게서 인간의 감정과 충동이 사회적 행위와 실천에 있어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중요히 다루어지는 점들이 새롭게 발견, 해석되기 시작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6) 우리는 이러한 감정에 관한 연구들 중에서 일루즈(Illouz)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감정에 관한 연구는―‘사회적인 것’을 구성하는 단위로서 사회 내 행위와 구조에 관한 이론적 범주들에 기반하여 구분할 때―주로 행위에서의 감정, 규칙/규범에서의 감정, 상호작용에서의 감정, 시스템 작동에서의 감정이라는 4개의 범주로 구분될 수 있다.7) 이 4개의 범주들에 해당하는 각각의 이론들은 역사적 관점을 취하면서 감정을 이론적 차원으로 소급하여 다룬다. 그러나 현 시대의 조건에서 감정이 발생, 소통, 합의, 공유, 확산되는 과정을 비판적 시각에서 알려주기에는 일정한 한계를 노정한다. 그에 반해, 일루즈는 현재 우리가 직접적으로 살아가고 경험하고 있는 사회에서 감정이 어떻게 처리되는지에 대해서―특히, 실용주의적 관점에서―의미 있는 시사점들을 제공해준다. 이하에서 현대 자본주의에서의 감정에 관한 탁월한 분석서인 『감정 자본주의(Cold Intimacies: Making of Emotional Capitalism)』를 중심으로 그녀가 행한 분석을 살펴본다.8)
일루즈는 우선, 현대 사회에서 자아 정체성의 구성 요소들과 그를 둘러싼 입론들에 관한 권위적 분석들이 한계가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기성의 분석과 달리 그녀는 감정적 차원을 동원하여 “근대적 자아됨(selfhood) 및 정체성의 구성요소,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분할, 이러한 분할과 젠더 구분 간의 관계”를 분석하면 그것이 확연히 드러날 수 있다고 본다.9) 그런데 감정을 파고들면 왜 근대적으로 구성된 자아됨과 정체성이 문제가 되는 것일까? 이는 근대 자본주의에서 감정을 합리적인 방식으로 처리하는 것이 필수적으로 요청되었고, 이 과정에서 감정을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조율하고 관리할 수 있는 개인의 자아됨이 중요히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루즈의 현대 자본주의의 감정에 관한 논의로 들어가기 이전에 우리는 다시 한 번 베버(2010)의 자본주의의 합리주의에 대한 요청에 관련된 진술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는 오히려 이러한 비합리적인 충동의 억제(무제한적으로 영리를 탐하는 것), 또는 적어도 합리적 조절과 동일할 수 있다. 물론 자본주의는 지속적이고 합리적인 자본주의적 경영을 통한 이윤 추구, 즉 끊임없이 재생되는 이윤인 수익성의 추구와 동일하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반드시 그러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유노동의 합리적인 조직에 기반하는 시민계층적 기업자본주의의 형성이 중심적인 문제가 된다. 이를 다시 문화사적으로 표현하자면, 서구 시민계층의 발생과 그 특성이 중심적인 문제가 된다…… 근대 서구 자본주의의 합리성은 오늘날 정밀 계산의 토대가 되는 기술적으로 결정적인 요소들의 계산 가능성에 의해 본질적으로 조건 지어진다…… 우선 문제가 되는 것은 다시금 서구적 합리주의의, 그리고 그 테두리 안에서 근대 서구적 합리주의의 고유한 특성을 인식하고 이것을 발생론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그와 같은 설명 시도는 모두 경제의 근본적 중요성에 상응해 무엇보다 경제적 조건을 고려해야 한다.10)

이 진술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합리성을 필연적으로 요구한다. 그런데 베버에 의하면 이것은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의 합리적 운영에 대한 요구에 그치지 않고, 시스템을 구성하는 자유노동의 권리를 갖는 시민들에게도 요구된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생산의 합리적 시스템 하에서 그들의 판단과 행위는 예측 가능성과 계산 가능성의 자장 안에서 경제 생산의 안정적인 성장에 기여할 수 있도록 조절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베버는 이를 경제적 합리주의가 “특정한 종류의 실천적․합리적 생활양식에 대한 인간의 능력과 성향에 의존하기 때문”(26)이라는 설명으로 명쾌하게 정리한다. 즉, 자본주의는 시민계급을 합리적인 방식으로 길들이고, 그들의 능력과 성향을 이에 정향시킬 수 있는 생활양식의 개발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루즈는 이러한 자본주의의 발전은 자본주의의 성격 변화, 즉 감정을 자본 증식의 시스템에 합류시키는 체제와 문화의 출현으로 변화를 겪게 된다고 진단한다. 이제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조련하고 계발하는 다양한 실천과 학문적, 문화적 장치들이 자본주의 시스템에 합류하게 된다. 이 과정은 인간의 성장을 자아됨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자아-되기를 통해 내가 나 스스로와 대면하고 소통하며, 이를 기반으로 타인과도 교류할 수 있는 인간을 조형하는 양상을 띤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감정 자본주의 역시 합리성에 의해 구동되는 근대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사회에서 요구되는 감정의 실천적, 합리적 생활양식을 체득한 인간의 능력을 필요로 한다. 결국 이러한 사회 속에서 소통을 원활히 하기 위해서는 각 개인들의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감정 양식들을 개발하고, 학습하고, 소유해야 한다. 자아됨의 과정은 곧 심리학의 영향 아래 나의 감정을 스스로 조회하고 관리하고 조절하는 과정을 통해 타인과 효율적이고 예측 가능하게 소통할 수 있는 감정으로 개발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일루즈는 (감정) 자본주의 형성은 감정 문화의 형성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라고 단언한다.11) 이러한 맥락에서 일루즈(2016)는 감정 자본주의를 다음과 같이 파악한다.

감정 자본주의란 감정 담론들 및 실천들이 경제 담론들 및 실천들을 구성하고 경제 담론들 및 실천들이 감정 담론들 및 실천들을 구성하는 문화, 한편으로는 정서(affect)가 경제적 행위의 본질적인 측면으로 변모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감정생활―특히 중류계급의 감정생활―이 경제적 관계 및 경제적 교환의 논리를 따라가는 문화이다(19).

그녀의 견해에 따르면 감정이 자본주의에 요청된 이유는 결국 경제적 교환 관계망에서 경제 참여자들의 안정적 소통과 생산-유통-소비를 보다 매끄럽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것이 경제적으로 중산층의 이데올로기에 친근성을 갖기 때문인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것의 구체적인 모습은 어떻게 전개된 것인가? 일루즈는 미국사회에 프로이트 심리학이 소개된 것을 감정 자본주의의 역사적 등장에 있어 결정적 분수령으로 보고 있다. 주지하듯 프로이트는 우리의 말실수, 무의식, 꿈과 정신생활, 욕망의 성적인 성격, 정신의 기원이자 정신병의 궁극적 원인에 관한 다양한 개념과 복잡한 해석을 내놓는다. 일루즈는 이러한 개념들이 미국사회에 소개되면서 사람들에 대해 “정신분석학이 감정생활을 재구성”(24)하기 시작한 점을 지적하면서, 이를 “치료학적 감정양식”(24)으로 정식화한다. 그녀는 “20세기 문화가 감정생활을 다루었던 방식들을 치료학적 감정양식”(24)으로 부른다. 곧, 감정을 이해하고 다루는 일종의 “언어적 테크닉, 학문적 테크닉, 상호작용에서의 테크닉”(24)이 출현하게 된 것으로 본다. 특히,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핵심 테크닉은 자아의 현재성을 과거의 원인으로부터 재구성하는 것인데, 이에 따라 “자아와 자신 간의 관계와 자아와 타인들 간의 관계”(26)가 재정의 된다. 인간 존재에 관한 가장 프로이트적인 물음은 자아를 핵가족의 영향으로 구성된 것으로 추궁하는 것이다. 자아의 구성과 그 과정을 핵가족의 그늘 아래 위치시킴으로써 자아의 모든 생각, 판단, 행위는 가족을 평생 짐으로 짊어진 자아상을 만들었다. 특히, 이것은 자아를 “관념적․영웅적 정의를 벗어나 정체성을 일상 생활의 영역, 특히 직장과 가정에 자리매김했고, 그런 면에서는 부르주아 문화혁명의 요체”(28)가 되었다. 도시 생활과 핵가족 문화의 전면화, 경제적으로 안정된 중산층의 등장과 그들의 생활양식과 자아됨을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이론적 프레임을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이 제공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프로이트에 의해 촉발된 치료학적 감정양식에 따르면 자아됨은 정상성에 도달하기 위한 부단한 노력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것은 도달하기 힘든 목표가 됨과 동시에 정상성의 자아를 만들어야 한다는 프로젝트로 변환된다. 감정은 성과 섹슈얼리티 또한 정신병의 강력한 무의식적 원인이 된다(29). 일루즈는 정신분석학의 급속한 미국 내 영향력 확장은 미국의 핵가족화, 소비문화의 핵심인 진정성 찾기와 호응했으며, 학술계와 의료계의 적극적인 동조 등에 의해 가능했다고 지적한다(30). 따라서 오늘날의 문화적 자원들은―다양한 자기계발서들에서 보여지듯―충고와 처방의 형태로 주어지고, 자아는 이런 조언들을 수용하고 행동해야 하는 구체적인 대상이 되었다(32). 신경증 환자들에 대한 치료학이었던 정신분석학이 이제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그 영향력을 확장하게 된 것이다. 합리주의가 지배하는 문화 코드에 억눌려있던 감정과 무의식은 아이러니하게도 합리성의 도구인 언어적 표현을 통해 자아의 현상태를 입증하는 언어로 재서술되었다. 그리고 감정은 개인의 해방과 자아됨을 위해서 상담과 치료의 장에 노출되어야 하는 사태에 직면케 됐다. 감정이 억압의 대상에서 관리와 조절과 소통의 대상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한편, 일루즈는 엘튼 마요의 호손 실험을 상세히 다룬다. 그녀는 치료학적 감정양식이 회사와 공장의 경영 관리 기법에 도입되면서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매력적인 테크닉으로 인정받게 되면서, 기업 마인드도 재구성 되었다는 점을 지적한다.(33-57) “경영 관료들은 과학의 수사, 합리성의 수사, 일반복지(general welfare)의 수사를 통해서 권위를 확보”(34)했었지만, “마요의 연구 이후 가정과 직장 사이의 (담론적) 연속성이 확립”(40)되면서 좋은 경영자는 이제 심리학적 특징을 갖춘 이들로 탈바꿈해야 했다. 경영자나 관리자의 덕목에는 노동자의 감정을 살피고 이해할 수 있는, “자기관리의 테크놀로지로서, 언어와 올바른 감정 관리에 광범위하게 의존”(47)하는 소통 역량이 추가되었다. “‘소통의 에토스(communicative ethos)’는 이성적․감정적 기술들을 사용하여 상대방의 관점에 공감”(55)하게 하면서 “자기의 부정적 감정을 조절하게 하고, 친화적이 되게 하고, 자기를 상대방의 눈으로 보게 하고, 상대방에 감정이입”(55)하게 만들었다. 핵가족 성원인 개인을 자아됨으로 이끄는 치료학적 감정양식은 기업의 경영에도 생산성 향상을 위해 도입되었다. 여기에 자아의 병리를 가족에서 찾는 페미니즘 내러티브가 추가되면서 심리학과 페미니즘의 동맹군에 의해 자아, 가족, 회사, 사회는 이제 이들의 담론 체계 안에 포섭된다.
일루즈는 특히, 제도화된 심리학의 영향에 의해 개인은 자기 자신에 대해 늘 추궁당하는 처지에 몰리게 되었고, “진짜 자아는 나에게 두려움, 수치심, 죄의식 같은 온갖 감정들을 극복할 것을 요구했다”는 점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일루즈(2016)는 그러면서 자기 감정의 객관적 진술과 극복의 요구, 그리고 그것의 확장으로 친밀성의 영역도 영향을 받게 됐다고 설명한다.

이런 감정들은 많은 경우 나 자신에게도 드러나지 않는 감정, 언어 사용에서의 새로운 기술을 요구하는 감정이었다. 하지만 이런 감정들을 표현하고 “발굴”하는 궁극의 이유는, 친밀한 관계가 근본적으로 평등한 관계여야 하기 때문이었다(63-64).

이처럼 자기 자신에 대해 객관화하는 테크닉에 따라 타자와의 관계, 즉―근대 자유주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심리학과 페미니즘의 자유와 평등을 향한 절대적 추구에 의해―친밀성의 영역도 이제 평등한 권리의 언어가 지배하게 된다. “근대적 친밀성의 이상은 평등, 공정, 중립적 절차, 감정 소통, 섹슈얼리티, 감춰진 감정의 극복과 표현, 언어적 자기표현의 중시 등을 핵심”(65)으로 하면서, 생활세계는 이제 합리화의 과정을 겪는다.12) 친밀성의 영역은 공정과 평등의 영역으로 재편성되고, 이에 따라 사적인 관계는 “‘공정한 교환’의 문제, 그리고 즉각적인 정서성을 도구적인 자기 주장과 화해시키는 문제에 시달리게 됐다.”(71) 이 부분이 바로 일루즈가 이 책에서 궁극적으로 주장하는 핵심 테제라고 볼 수 있다. 즉, 친밀성의 영역에서 자유롭게 표현되던 감정은 이제 심리학과 페미니즘이 인간관계에 도입한 자유와 평등, 공정 등의 절차에 따라 표현의 즉시성이 차단, 보류되면서 합리성의 장치에 의해 조율, 관리된 후 표현되어야 한다. 이로 인해 감정은 대화 참여자의 권리 보장을 위한 도구적 성격을 띠는 것으로 변하게 된다. 치료학적 감정 양식, 페미니즘은 “심리적, 육체적, 감정적 전략들”을 가르치고, 자유와 평등과 같은 공적 규범들이 생활세계의 “‘감정적 질감’을 변화”(72)시킨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감정의 존재론으로 귀결되었고, 감정의 본질인 “순간적․일시적․맥락적”(72) 표출은 이제 병리적으로 취급되면서 치료학과 심리학이라는 공적 지식의 도움을 받아야 될 행위로 규정된다. 일루즈(2016)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나의 욕구와 감정과 목표를 냉정한 언어적 소통 앞에 제출함으로써 평등과 공정한 교환을 창출하는 것이 바로 지성화의 목표이다…… 자기의 감정을 바깥에서 관찰해보라는 것이다. 이런 가르침―중립적인 표출의 절차를 통해 감정을 조절하라는 가르침―은 사실 소통과 치료학 에토스의 핵심이다…… 치료학이라는 설득 담론은, 한편으로는 내 욕구들과 감정들을 인식할 수 있게 하는 온갖 테크닉을 제공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감정을 주체의 외부에 존재하는 대상(주체가 관찰하고 조절하는 대상)으로 만든다(75-76).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감정은 심리학과 페미니즘의 영향에 의해 중립적 의사소통 절차의 도구로 소환, 조락되었으며, 개인의 자기 관리와 절제력을 상징하는 중산층의 아비투스로 되었다. 이것은 앞서 베버가 자본주의는 특정한 실천적, 합리적 개인으로 자신을 운영할 수 있는 주체를 요구한다는 테제의 치료학적 감정 양식의 호응 방식이라 할 만하다. 우리가 이 관점을 수용한다면 최근의 수다한 자기계발서, 힐링서들의 유행은 기실 치료학적 감정 양식에 관한 지식문화의 자장 안에서 감정을 합리적으로 관리, 조절하라는 감정 자본주의의 정언명법적 요구를 모성적 어휘로 변환하여 주체에게 거부감 없이 주입하는 문화적 실천들에 불과하다. 이처럼 감정생활에는 “절차성이 주입”(81)되고, 감정은 일상적 생활 속에서 자기반성 없는 즉자적 대응성의 행동적 지표성을 상실하게 되었으며, “표준적인 언어패턴”(81)에 점령당하였다. 이러한 표준적인 언어 패턴과 전략에 포섭된 감정은 이제 소통을 위해 “사회관계에서 감정적 얽힘을 유보”당하고, 결국 소통은 우리의 상식과 기대와는 달리 “감정적 결속을 유보하는 일종의 괄호치기”(81)가 되었다.

나. 웹 문화와 육체의 탈존(脫存)

일루즈의 감정 자본주의에 관한 분석은 감정이 평등한 권리의 언어로 소통되도록 만드는 합리적 절차들에 의해 여과되면서 감정 그 자체의 본질인 즉시성, 순간성, 맥락성 등을 상실했다는 것이 요체다. 그런데 일루즈는 감정에 관한 분석을 여기서 그치지 않고 감정을 몸을 둘러싼 사회문화적 현상과 연결시켜 분석하는 또 하나의 탁월한 시각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특히, 그녀는 현대사회의 인터넷 문화가 감정과 몸에 결정적 규정력을 행사하는 지점을 관건적으로 다룬다. 우리는 이에 대한 일루즈의 관찰을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 인터넷 문화의 확산에 따른 학생들의 신체활동 시간의 절대적 감소, SNS에 기댄 소통의 급증 등은 몸의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움직임을 촉발, 확장하려는 교과인 체육의 역할과 위상을 어떻게 평가할 것이며, 체육활동의 초점을 어느 지점에 맞추어야 하는지에 대한 새로운 접근과 시각을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즉, 학업과 인터넷 문화 등으로 많은 시간 몸을 고정시킨 채 살아가는 지금의 학생들의 생활환경을 고려 시, 몸의 움직임에 관한 교과인 체육을 감정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떠한 가치를 갖는 과목으로 정위시킬 것인지, 그리고 그것은 어떠한 이론적 근거에 의해서 가능한 것인지를 고민할 필요성이 제기된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주제와 관련하여 체육이 몸과 감정에 어떠한 역할을 하고, 그 영향 하에 어떻게 학생들이 윤리적 성장을 이루어나갈 수 있는가에 대한 이론적 고민이 요구됨을 지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일루즈의 다음과 같은 감정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또 다른 진단은 우리가 현 시대 체육의 가치와 역할을 사유하는 데 착목해야 할 중요한 포인트를 제공해줌에 틀림없다.
일루즈에 따르면, 감정 자본주의와 인터넷 문화의 결합에 따라 우리가 로맨틱한 사랑에 대해서 갖고 있는 관념, 즉 로맨스는 육체에 근거하고 있다는 상식은 해체 일로에 있다. 이를테면 사랑에 빠진 육체는 “땀에 젖은 손바닥, 빨라지는 심장박동, 붉어지는 두 뺨, 떨리는 손, 불끈 쥔 주먹, 눈물, 말더듬 등등의 무수한 육체적 신호”(149)를 우리에게 보낸다. 이것은 감정의 육체적 신호이기도 한데, 인터넷이 이러한 감정과 육체적 신호를 여전히 만들어낼 수 있을지 일루즈는 묻는다. 우리는 현재 많은 만남을 온라인에서 갖고 유지하며, 새로운 만남 역시 많은 경우 온라인을 통해서 만든다. 그런데 이렇게 가상 세계 속에서의 만남은 “자기 외모 관찰, 자기 내면 성찰, 자아의 라벨화, 취향 및 견해의 명시 등을 포함하는 기나긴 과정”(152)에 놓이게 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나 자신에 대한 객관화와 나의 이상들을 세련되게 조형해야 하는 책임을 요구받는다. 그런데 무엇보다 인터넷 공간의 만남에서 인간관계의 실패를 겪지 않기 위해 해야 하는 끊임없는 이성적 자기 성찰과 자기 객관화는 전통적 로맨틱한 상호작용의 순서를 뒤바꿔 놓는다. 일루즈(2016)는 이를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보통은 상대에게 끌리는 단계가 상대에 대해서 아는 단계보다 먼저인 반면에, 인터넷에서는 아는 단계가 끌리는 단계(최소한 로맨틱한 상호작용의 육체적 현존 및 현현)보다 먼저이다. 오늘날의 인터넷 상황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속성들 일체로 인식하며, 그러한 인식이 이루어진 후에야 비로소(점차로) 그들의 육체적 현존을 인식한다(154).

인터넷에서는 자기와 타자에 대한 즉시적이고 계산된 조회가 요구된다는 것이다. 부단한 자기 조회와 노출은 자신을 규격화하는 것이고, 그 이후에야 전체로서의 존재자의 현존을 이해한다. 이러한 추구의 끝은 타자의 계산적 시선에 의해 매개된 자아의 전시되는 상품화이다. 이것은 “고도의 주관주의(subjectivism)”와 “만남의 객체화(objectivization)”(155)의 결합을 초래하는데, 이것은 사랑의 전통으로부터 멀어진 것이다.13) 특히, 심리학과 인터넷 기술이 만들어낸 자아는 “다양한 표상들(프로필, 사진, 이메일)”(157)에 의해 그것이 포착된다. 다양한 표상들에 사로 잡혀 있는 자아는 이제 정신과 이성에 의해 규정된 자아가 된다. 그래서 일루즈(2016)는 인터넷이 정신과 육체의 이분법을 재생시켰다고 지적한다.

인터넷은 정신 대 육체라는 데카르트의 옛 이분법을 극단적으로 부활시킨다(정신은 사유와 정체성을 위한 유일한 자리, 참된 자리이다). 인터넷 자아를 갖는다는 것은 데카르트적 코기토(cogito)를 갖는다는 뜻이요, 내 의식의 벽에 갇힌 채로 세계를 내다보는 방식으로 세계를 대한다는 뜻이다(159-160).

일루즈는 자아를 언어적으로 서술하고 객관적으로 물화시키는 과정으로 생기는 정서적 분위기가 냉소라고 말한다. 이 냉소는 낭만주의와의 근본적 단절, 헤아리기조차 어려운 막대한 상호작용을 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 우리의 관례적 대응의 반복된 학습에 의한 것이다(171). 이러한 현상이 강화되는 추세는 결국 우리가 육체적 만남과 그로 발생하는 감정 교차를 차단당하게 하는 인터넷 문화가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고프먼에 따르면, “상호작용이란 상대방의 육체적 현존을 지각한 뒤 그에 따라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조정하는 미묘한 과정”(186)인데, 인터넷은 이 육체적 결속 과정을 지속적으로 허물어트린다. 사실 육체적 대면이 이루어지고 감각적으로 몸에 의해 조정되는 상호작용 과정에서 인성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인간의 만남에는 인성이 중요하다는 게 상식이나, 사실 끌림 그 자체가 일차적으로 중요하다. 우리는 사실 인성이 좋은 사람에게 끌리는 것이 아니라 “육체적․인간적 매력을 풍기는 사람에게 이끌린다.”(189) 일루즈(2016)는 이러한 관점들을 유지하며 인터넷 문화의 발달과 감정과 육체적 교감의 퇴행이 초래한 결과를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요컨대 로맨틱한 상상력은 육체에 기반하는 것으로서, 메를로-퐁티가 말하는 이른바 감지(sentir)의 차원에서 진행되는 반면, 인터넷 상상력은 지각의 실존적 배경을 제거하는 인지(connaître)의 차원에서 진행된다…… 후설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처럼, 서로 다른 사물들 사이에 관계가 생기는 이유는 “지각하고 움직이는 육체”가 그것들을 포착하기 때문이다. 경험된 육체(lived body)는 세계와 접촉할 때 재귀적 경험(reflexive experience)을 얻는다. 사랑은 후설이 설명하는 방식대로 세계와 만날 때에 발생한다. 사람들이 생각지도 않았던 상대와 사랑에 빠지기도 하고, 사랑에 빠진 뒤에 자기의 기대와 맞지 않는 요소를 기꺼이 무시하기도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곧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전체이지 전체의 부분들이 아니다(196-197).

메를로-퐁티와 후설의 설명에 따르면, 우리가 무심하게 별것 아닌 것처럼 움직이는 몸의 움직임 하나하나는 사실 로맨틱한 육체적 감정을 촉발하는 기폭제가 된다. 그리고 이 육체적 감정은 무엇보다 이성이 아니라, 오히려 비이성에 가까운 것이다. 비이성으로서의 감정과 육체적 몸짓이야말로 사실은 인간 대 인간의 사랑의 가교이며 실존적 연결망의 항상적(constantly) 갱신을 가능케 하는 에너지의 화수분인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이성적 자기 점검을 받는 감정은 메를로-퐁티에 따르면 “실존적 배경을 제거하는 인지(connaître)”인데 반해, 육체의 사랑은 “감지(sentir)”의 차원에서 무의식적 작동에 가까운, 그러므로 훨씬 날것 그대로의 우리의 실존의 풍부함을 뒷받침하는 사랑의 방식이다. 이처럼 일루즈의 논리에 따른다면, 몸과 몸이 만났을 때 몸으로부터 생기하는 자연적 감정의 발생과 그것들의 앙상블만이 인간 사이의 진정한 교감을 이끌 수 있다(Sim, 2015). 하지만, 이렇게 발생한 감정을 이성의 질서에 포섭하려 획책하는 감정 자본주의에서 감정(勘定)은 감정(鑑定) 과정을 거쳐 냉소와 무기력의 악순환 속으로 빠져든다. 이것은 인간의 존재의 에너지가 하향, 감축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몸을 움직이면서 실제 공간에서 대면하지 않고 타자와 소통하는 것은 타자의 상황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강력한 감정이입이 약화된 것이기에 윤리의 본령인 공통감의 확장에 어긋나는 것이고, 삶의 강력한 에너지인 감정의 힘을 무력화시키는 악순환을 초래하는 과정이다. 그렇다면 인간 존재에 감정이 갖는 위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감정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이해가 반드시 필요하다.

3. 스피노자에서 감정의 위상과 역할

가. 존재 역량과 감정의 관계

감정은 인간의 존재에 어떠한 위상을 갖는 것일까? 감정은 인간의 삶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인가? 감정은 인간의 윤리적 삶과 성장에 어떠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일까? 인간의 사고와 행위에 감정이 작동되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감정 자본주의에서 합리화되고 희미해져가는 감정은 인간의 존재 역량과 삶의 활력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들은 지금까지의 논의의 맥락에서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물음들일 법한데, 이에 답하기 위해서는 결국 감정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이하에서 이 물음에 대한 답의 단서를 얻고자 스피노자의 『에티카』에 나타난 감정의 위상과 역할을 살펴본다. 스피노자에서 감정은 몸의 운용과 분리되어 사고될 수 없고 인간의 존재 역량 강화와 윤리적 삶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이해는 인간, 몸, 감정, 윤리를 아울러 이해할 수 있는 입구로 우리를 안내하는 데 유용하리라 판단된다.
우선, 스피노자가 고대 그리스 이래 자신의 시대까지 이어져 온 윤리학 전통에서 줄곧 전제해왔던 인간에 관한 존재론적 관점을 비판한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지적은 스피노자의 철학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문제의식이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인간이 ‘이성적 동물’이라는 당대의 철학적 상식과 형이상학적 전통에 관해 강력한 반대 테제를 던진다. 스피노자가 이해하는 바로는 인간은 ‘이성적 동물’로 규정될 수도, 이해될 수도 없다. 그것은 인간의 인식 한계로부터 불가피하게 전제되고 요청된 인간 이해의 한 관점에 불과한 것이다. 그가 보기에 인간을 이성적 동물로 인식하는 폐해는 너무 크다. 스피노자(2014)는 이를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여기에서는 누구나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 즉 사람들은 모두 사물의 원인을 모르는 채로 태어난다는 것, 인간은 모두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욕망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 등을 근거로 삼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14)

또, 그들은 감정과 인간의 생활방식에 관하여 기술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공통적인 자연법칙에 따르는 자연적 사물이 아니라, 자연을 벗어난 사물에 대하여 논술한 것처럼 보인다. 참으로 그들은 자연 안의 인간을 통치권 안의 통치권처럼 생각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간이 자연의 질서에 따르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어지럽히며, 인간이 자신의 행동에 대하여 절대의 능력을 가지고 자기 자신 이외의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도 결정되지 않는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또, 그들은 인간의 무능력과 약점의 원인을 공통적인 자연력에 돌리지 않고, 내가 모르는 인간 본성의 결함에 돌린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와 같은 인간의 본성을 슬퍼하고 비웃고 경멸하거나, 또는 (더욱 자주 일어나는 일이지만) 저주한다. (E. Ⅲ. 서론)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간 또한 자연법칙을 따르는 자연적 사물의 위치로부터 출발한다.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나온 생명체인 이상 이는 절대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 철학자들은 인간은 다른 자연의 사물들의 질서에서 벗어나 있다고 간주한다. “자연을 벗어난 사물”은 자연의 법칙으로부터 예외적인 위상을 갖는 인간을 가리킨다. 인간만이 자연의 질서가 부과하는 체제에서 한 발 빗겨 서서 자연의 법칙으로부터 결정되지 않는 자유를 누린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인간이 무능력한 모습을 보일 때 그것을 인간 또한 어쩔 수 없는 자연적 존재인 탓으로 돌리지 않고 엉뚱하게 인간만이 보유한 본성의 탓으로 돌린다. 그들은 있는 그대로의 인간에 대해 사유하지 않고, 있을 수 없는 인간상을 그림으로써 그것을 비웃고 비난한다. 또한, 인간이 이성적 동물이고, 그런 이유로 이성을 발휘해야 하는데 의지의 문제로 그렇게 하지 못한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스피노자가 보기에 그의 시대의 철학은, 인간은 이성적 동물일 수 없고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행위만 하는 이성의 기계가 아닌데, 이처럼 이성적 인간의 완성을 목표로 하는 형이상학적 사유의 질서 하에 실천에 관한 학문을 정립하는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이를 초래한 형이상학은 무엇인가?
형이상학은 인간이 삶에 관해 사유할 때 그 끝에서 맞닥트리게 되는 죽음에 대한 인식이 초래하는 허무의 감각을 피해가기 위해 인간 스스로 요청한 가상과 상상의 구조물이다. 고대 그리스 이래 철학은 이러한 형이상학을 이데아라는 초월적 질서에 관한 동경과 소원에 따라 구축하려 하였으며, 그것은 곧 이성적 인간에 관한 요청으로 귀결되었다(Park, 1997). 그러나 스피노자가 보기에 이것은 전혀 현실에 있는 인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며, 필히 인간에 관해 실패하고 마는 사유의 출발점이 된다. 왜냐하면 그가 보기에 인간은 적어도 이성적 동물로 세계에 출현하지도, 살아가지도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인간에 관한 새로운 형이상학을 구축하려 한다. 그리고 새로운 존재론에 의거할 때 인간의 실존적 삶에 정확하게 정위된 실천학의 구성이 가능하다고 본다(Park, 2013: 84). 즉, 스피노자는 인간 존재에 관한 정확한 이해와 서술이 가능할 때라야 보다 현실적인 실천학의 구성이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새롭게 구축하려는 인간에 관한 규정적 이해는 무엇인가?
스피노자는 모든 생명체가 그렇듯이 인간 또한 생명의 근본적 요구에 따라 움직인다고 규정하는데, 이것이야말로 현존하는 인간에 관한 있는 그대로의 이해의 출발점이 된다. 그리고 이것으로부터 모든 인간에 관한 존재론의 사유가 출발해야 한다고 강력히 요청한다. 스피노자(2014)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각각의 사물은, 자신의 능력이 미치는 한, 자신의 존재를 끈질기게 지속하려고 노력한다(E. Ⅲ. 정리 6).

사물은 결코 자신이 파괴될 수 있는 어떤 것, 즉 자신의 존재를 제거하는 어떤 것을 자신 안에 가지고 있지 않다(정리 4에 의해). 반대로, 개물은 자신의 존재를 제거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항한다(정리 5에 의해). 그러므로 그것은 가능한 한, 그리고 자신의 능력이 미치는 한, 자신의 존재를 끈질기게 지속하려고 노력한다(E. Ⅲ. 정리 6. 증명).

스피노자에 따르면, 생명체는 그들의 능력이 되는 한 세계에 있음을―무의식적 차원이라고 해도 무방할―지속하려고 노력한다. 그들은 자기 생명체의 미래로 나아가는 운동 안에 그 어떠한 자기 파괴적인 요소를 내장하고 있지 않다. 그들은 오로지 자신의 존재를 항상적으로 유지하고자 노력한다. 그래서 “사물은 외부의 원인에 의해서가 아니면 결코 파괴될 수 없는 것”(E. Ⅲ. 정리 4)이고, 오로지 내부의 생명 운동 자체는 생명 그 자체의 강화를 위해서만 작동한다. 생명이 갖는 이러한 존재에의 강력한 자연적, 본능적 요구를 스피노자는 코나투스(conatus)라고 부른다. 이 코나투스는 모든 사물에 있듯이, 자연적 존재로부터 출발하는 인간에게도 있다. 스피노자(2016)는 이를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각각의 사물이 자신의 존재를 끈질기게 지속하려는 노력[코나투스(conatus)]은 그 사물의 현실적 본질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E. Ⅲ. 정리 7).

그러므로 각 사물이 홀로 또는 다른 것들과 함께 활동하는, 또는 활동하려고 애쓰는 능력이나 노력, 즉(정리 6에 의해) 각 사물이 자신의 존재를 끈질기게 지속하려고 애쓰는 능력이나 노력[코나투스]은 그 사물의 주어진 혹은 현실적인 본질일 뿐이다(E. Ⅲ. 정리 7. 증명).15)

생명체는 세계에 출현을 하면서부터는 자신의 존재를 지속하려고 노력하는 본질적 요구를 갖는다. 코나투스는 결국 존재를 보존하고, 강화하며, 갱신하려는 생명체의 본성인 것이다. 이런 코나투스를 현대적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생명체의 항상적인 자기 유지와 갱신의 노력은 과학의 용어를 빌어 항상성의 원리라고도 할 수 있다. 『에티카』에 관한 뛰어난 의학적 해설서로 인정받고 있는 『스피노자의 뇌』의 저자인 다마지오에 따르면, 그것은 항상성과 매우 유사하다(Oh, 2017). 왜냐하면 항상성은 “매 순간마다 우리 신체의 모든 세포 안에서 우리의 생명을 통치”(Damasio. 2013: 47)하기 때문이다. 이 통치 과정을 다마지오는 간단하게 요약하는데, “한 생물 개체의 환경에서 무엇인가가 변화”하고, 이것이 한 “생물의 삶의 경로를 바꾸어 놓을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기도 한데, 이때 생물은 이에 맞춰 “자기 보존 및 효율적 기능에 가장 이로운 상황을 만들기 위해 활동한다”(Damasio. 2013: 47). 다마지오(2013)는 다음과 같이 상세히 설명한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조절된 생명의 상태에 도달하고자 하는 끊임없는 시도는 우리 존재의 심오하고도 결정적인 부분인 것이 분명하다. 실제로 이것은 각 존재가 자신을 보존하기 위하여 기울이는 가차 없는 노력(코나투스, conatus)에 대해 묘사할 때 스피노자가 직관한 우리 존재의 첫 번째 현실이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해석해 볼 때 스피노자의 개념은, 살아 있는 생명체의 생존을 위협하는 수많은 기이한 것들에 맞서 자신의 구조와 기능의 일관성을 유지하도록 만들어졌음을 암시한다(Damasio. 2013: 48).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이처럼 존재 그 자체를, 그리고 존재의 높은 역량을 성취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노력을 한다. 물론 이는 존재 보존의 역량인 코나투스에 의해 가능하다. 인간도 생명체인 한 예외일 수 없다. 가령, 외부의 물리적 자극에 의해 외상을 입는 경우, 몸은 우리의 의지와는 전혀 무관하게 자가 면역과 치료 체계를 발동하여 몸의 정상적 상태로의 회복을 위해 노력을 기울인다. 항상성으로 정의될 수 있는 코나투스는 이처럼 생명체 작동의 가장 근본 장치로서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바탕이다(Oh, 2017). 그렇다면 사물의 존재 이해에 관한 관건적 개념인 코나투스는 인간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어떠한 역할을 하는 것일까? 스피노자(2014)는 코나투스를 인간의 신체, 정신과 관계시키는 사유를 전개한다.

이 노력(코나투스-필자)이 단지 정신과 관련될 때는 의지라 불린다. 그러나 정신과 신체에 동시에 관련될 때는 욕구라 불린다. 그러므로 이 욕구는 다름 아닌 인간 본질 자체이며, 그 본성으로부터 필연적으로 그의 보전을 증진시킬 수 있는 것들이 따라 나온다. 따라서 인간은 그러한 것들을 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다음으로 욕구와 욕망 간에는, 일반적으로 욕망이 자신의 욕구를 의식하고 있는 한에서의 인간과 관련된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아무런 차이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욕망은 욕구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 있는 욕구라고 정의될 수 있다(E. Ⅲ. 정리 9. 주석, Nadler, 2014: 332에서 재인용).

이에 따르면 코나투스가 정신에 관계하면 의지로, 정신과 신체 모두에 동시적으로 작용하면 욕구가 된다. 그리고 욕망은 신체와 정신 모두에 작용하는 욕구로서의 코나투스를 의식하는 것이다. 이처럼 코나투스는 인간의 본질 그 자체로서 신체와 정신 모두에 관계하는데, 욕구, 욕망, 의지, 충동은 코나투스가 신체와 정신에 관계하며 거느리는 개념들로 이해될 수 있다(Oh, 2017). 이처럼 코나투스가 신체와 정신에 두루 걸쳐 있는 욕구에 대한 의식된 욕망이기도 하다면, 신체와 정신의 욕구를 의식적으로 채워주는 것이 코나투스, 즉 존재의 역량을 강화시키는 데서 중요한 문제로 대두된다. 정신과 신체를 강화시키는 것, 그것은 코나투스를 강화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신체와 정신의 관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신체와 정신의 관계에서 우선 초점을 맞출 부분은 정신이 아닌 신체라는 점 때문인데,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간의 정신이 구성되는 데 역할을 하는 관념의 대상은 다름 아닌 신체이다.

인간의 정신을 구성하는 관념의 대상은 신체이다. 즉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일정한 연장의 양태이다. 그리고는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E. Ⅱ. 정리 13).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간은 “신체가 많은 방식으로 자극받아 변화되는 것을 느끼는데”(E. Ⅱ. 공리 4), 이에 대한 느낌을 갖는 것이 바로 정신이다. 즉, 우리는 신체의 변용(신체가 자극받는 상태)에 대한 관념을 지니게 되는데, 이처럼 정신을 구성하고 있는 관념은 그 대상을 신체로 하며, 또한 그 신체는 반드시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신체”(E. Ⅱ. 정리 13. 증명)이어야 한다. 이 부분은 바로 정신이 현실에 가장 가까운 존재론에 근거한 사유를 위해 ‘현실에 있는 그대로의 인간’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하는 이유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즉, 이 점은 현실에서 모든 자연적 사물들처럼 인간 역시 코나투스라는 삶의 강한 욕망을 갖고 살아가는 존재로 이해되고, 그것으로부터 정신의 전개가 이루어진다는 입론을 세울 때 현실적인 존재론과 연계된 실천학이 구성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정신이 현실의 신체에 근거해 사유한다고 보는 스피노자는 “우리의 신체의 본성을 충분하게 인식하지 못한다면, 정신과 신체의 합일을 충분하게 또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없을 것”(E. Ⅱ. 정리 13. 증명)이라고 한다. 스피노자(2014)는 신체, 그리고 신체와 감정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어떤 신체가 동시에 많은 방식으로 작용을 하거나 또는 작용을 받는 데에 다른 신체들보다 더 유능할수록, 그것의 정신도 동시에 많은 것을 지각하는 데 다른 정신들보다 그만큼 더 유능하다(E. Ⅱ. 정리 13. 증명).

감정이란 신체의 활동능력을 증대시키거나 감소시키며, 촉진하거나 억제하는 신체의 변용인 동시에 그러한 변용의 관념이라고 나는 이해한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그러한 변용들 중 어느 것의 타당한 원인이 될 수 있다면, 나는 그 감정을 능동으로 이해하고, 그렇지 않다면 수동으로 이해한다(E. Ⅲ. 정의 3).

위의 두 서술을 종합해보면, 정신의 고양은 신체가 작용을 주고받는 데서 유능하면 유능할수록 수월해진다. 그런데 정신의 고양을 가능하게 하는 신체의 운동은 감정에 의해 조절되는데, 그것은 감정이 신체능력을 증감시키는 신체의 변용의 관념이기 때문이다. 결국 감정은 신체가 자극받는 상태에 대한 관념으로 구성됨으로써 신체와 직접 작용하면서 신체의 능력에 영향을 미친다고 볼 수 있다.

나. 감정 교류와 공동체성의 관계

앞서 스피노자를 통해 모든 사물에는 자기 보존의 역량인 코나투스가 있으며, 이 코나투스는 생명 활동의 기저에서 무의식적으로 작동하는 생의 원리라는 점을 살펴보았다. 코나투스가 정신에 관계되면 의지로, 신체와 정신 모두에 관계되면 욕구로, 욕망은 이 욕구를 의식하는 것으로 이해되었고, 여기서 정신을 구성하는 관념은 오직 ‘현실에 있는 그대로의 신체’만을 그 대상으로 한다는 점 또한 언급되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데, 결국 세계를 살아가고 타자와 대면하는 것은 1차적으로 우리의 몸이라는 것을 지시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정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최초의 것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신체의 관념”(E. Ⅲ. 정리 10. 증명)이다. 정신은 신체가 자극에 의해 변용될 때 그 느낌을 갖는 기능을 함에 따라 결국 신체를 기반으로 하는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16) 이런 맥락에서 감정과 신체가 맺는 관계 또한 파악될 수 있다. 감정은 신체의 변용에 대한 관념으로서 신체가 기왕에 지니고 있는 감각의 체계를 가지고 새롭게 신체에 전달되는 자극을 코나투스의 원리에 의해 수용하는 기능이다. 이처럼 감정이 등장하는 맥락을 고려할 때, 이제 우리가 본 논문의 주제와 관련하여 규명해야 할 부분은 스피노자가 말한 바에 따라 감정이 신체의 역량 증진에 어떠한 위상을 갖느냐가 될 것이다. 감정이 신체와 정신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철학적 차원의 분석은 왜 체육이 감정에 친화적인 활동이 될 수 있는지, 감정의 건강에 순기능을 할 수 있는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줄 수 있다.
스피노자는 <E. Ⅲ. 정의 3>에서 감정에는 능동과 수동이 있는 것으로 구분한다. 이때, 능동의 감정은 우리 스스로가 신체의 변용에 대해 타당한 원인으로 작용하는 것이고, 수동의 감정은 외부의 자극인 타당하지 않은 원인에 의해 변용된 신체에 대한 관념이다. 즉, 능동은 신체의 변용(에 대한 관념)이 스스로 일어나는 원인이며, 수동은 순전히 외부 자극에만 의해 신체의 변용(에 대한 관념)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감정은 “신체의 활동능력을 증대시키거나 감소시키며, 촉진하거나 억제”(E. Ⅲ. 정의 3)하기 때문에, 증대와 촉진, 그리고 감소와 억제는 각각 인간을 “보다 큰 완전성으로, 때로는 보다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E. Ⅲ. 정리 11. 주석)시키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스피노자(2014)는 기쁨과 슬픔을 다음과 같이 이해한다.

나는 이하에서 ‘기쁨을 정신이 보다 큰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수동’으로 이해할 것이며, ‘슬픔을 정신이 보다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수동’으로 이해할 것이다. ‘정신과 신체에 동시에 관계되어 있는 기쁨의 감정’을 나는 쾌감 또는 유쾌라고 부르고, ‘그러한 슬픔의 감정’을 고통 또는 우울이라고 부른다(E. Ⅲ. 정리 11. 주석).

이 부분에서 스피노자는 기쁨과 슬픔의 감정 모두를 수동으로 이해한다. 수동의 감정 중에서도 기쁨은 쾌감과 유쾌를 일으키며 신체 활동능력의 증대와 촉진을, 슬픔은 고통과 우울을 일으키며 신체 활동능력의 감소와 억제를 결과한다.17) 그리고 기쁨과 슬픔은 욕망과 함께 감정을 구성하는 요소가 된다. 즉, 감정은 욕망, 기쁨, 슬픔이 가장 근원적 구성 요소이다. 기쁨, 슬픔과 함께 정신과 신체에 동시에 관련되는 코나투스인 욕구를 ‘의식’하는 욕망 또한 욕구를 충족시킴으로써 인간을 큰 완전성으로 또는 작은 완전성으로 이끈다는 점에서 <E. Ⅲ. 정의 3>에 의해 감정의 범주에 포함된다.18) 결국 인간의 감정에 기쁨, 슬픔, 욕망이란 3가지가 있으며, 기쁨은 인간을 더 큰 완전성으로 이끌고 슬픔은 더 작은 완전성으로 이끌어간다는 점을 이해한 이 지점부터 필요한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감정이 인간의 존재 역량인 코나투스를 상향시킬 수 있느냐가 된다. 감정은 어떻게 인간의 존재 역량을 높이는 것일까?
코나투스의 원리에 따르면 인간은 자기의 존재 역량을 증진시키는 것을 바란다. 코나투스는 우리의 신체와 정신을 최상의 상태로 이끌어가려는 본원적 노력이다. 여기서 감정은 우리의 신체가 외부 사물과의 마주침에 의해 변용되거나 그 신체의 변용에 대한 관념이므로, 결국 신체가 외부 사물과 어떠한 만남을 갖느냐갸 감정에 영향을 미치고 이 만남의 성격이 코나투스의 작동에 관건이 된다고 볼 수 있다.
외부 사물과의 마주침에 의한 신체의 변용에 대한 관념인 감정은 기본적으로 기쁨과 슬픔으로 나뉜다. 코나투스의 원리에 따른다면 우리의 존재 역량은 외부 자극 시 기쁨의 감정이 생길 때 상향되며 슬픔에 의해서는 하향된다. 코나투스에 의해 우리는 당연히 기쁨을 바라고 슬픔을 멀리하려 한다. 그런데 슬픔의 감정이 발생하면 슬픔은 어떻게 극복될 수 있는가? 스피노자(2014)에 따르면 그것은 다음과 같이 더 큰 기쁨의 감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기쁨에서 생기는 욕망은, 다른 사정이 같다면, 슬픔에서 생기는 욕망보다 강력하다(E. Ⅳ. 정리 18).

스피노자(2014)에 따르면 “감정의 힘은 인간의 기타의 작용이나 능력을 능가”하고, 심지어 그 “감정은 인간에게 끈질기게 달라붙”(E. Ⅳ. 정리 6)기까지 한다.

감정은 그것과 반대되는, 그리고 억제되어야 할 그 감정보다 더 강력한 어떤 감정에 의해서가 아니면, 억제될 수도 없고, 제거될 수도 없다(E. Ⅳ. 정리 7).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부정적 감정에 대항하는 힘은 그러한 감정을 다른 이성과 의지가 아닌 그것보다 더 큰 긍정적 감정에 의해서만 억누를 수가 있다는 점을 확정하기 때문이다(Oh, 2017). 그러면 이 긍정의, 기쁨의 감정은 어떻게 촉발되고 유지될 수 있는가? 인간에게 기쁨의 감정을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에 의해 가능한가? 인간에게 가장 큰 기쁨을 주는, 코나투스를 강화시키는 조건과 활동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들은 인간의 존재 역량은 어떠한 상황에서 지속적인 상향 운동의 선순환 속에 놓일 수 있는가를 묻고 있는 질문이기도 하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인간만이, 즉 우리와 본성에서 완전히 일치하는 다른 인간만이 존재 역량을 상향시키는 데 가장 유리하다. 물론 다른 존재들도 인간의 생존과 존재 역량의 보존에 유리할 수 있지만, 인간만이 그것을 가장 극대화시킬 수 있다. 이를 스피노자(2014)는 다음과 같이 분명히 한다.

사물은 우리의 본성과 일치하는 한에 있어서 필연적으로 선이다(E. Ⅳ. 정리 31).

스피노자에 따르면 사물이 인간의 본성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을수록 인간의 삶에 유익하며, 그만큼 그것은 선으로 간주된다. 반면 사물의 본성이 인간의 본성과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그것은 인간의 삶에 유해하며, 그만큼 그것은 악으로 인식된다. 이런 원리에 의해 인간의 본성과 가장 많이 일치하는 본성을 지닌 다른 인간이 인간에게 가장 유용한 선의 존재가 된다. 이로써 인간은 자기의 존재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타자를 요구한다. 스피노자의 윤리학과 정치학이 궁극적으로 목적하는 바가 바로 같은 본성을 갖는 인간들의 조화로운 삶이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이는 당연한 결론이다. 인간이 유한한 한에서 인간은 자기와 같은 본성을 갖는 인간, 가장 많은 선을 서로에게 주고받을 수 있는 인간을 요청할 수밖에 없다. 스피노자(2014)는 개개의 사물과 그들의 일치된 운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해한다.

개개의 사물들이란 한정된 존재를 갖는 유한한 것들이라고 나는 이해한다. 만일 다수의 개물[개체]들이 모두 동시에 한 결과의 원인이 되도록 한 활동으로 협동한다면, 나는 그러한 한에 있어서, 그것들 모두를 하나의 개체로 간주한다(E. Ⅱ. 정의 7).

스피노자에 따르면 이렇게 여러 개체가 완전에 가까운 협동을 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개체가 된다. 이 협동은 매우 인간에게 유익하고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두 개체의 결합으로 “단독의 개체보다 두 배의 능력을 가지 한 개체가 구성되기 때문”이고,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인간만큼 유익한 것이 없”(E. Ⅳ. 정리 18. 주석)기 때문이다. 마침내 코나투스를 최대화시키려는 노력은 같은 본성을 지닌 인간과 함께 단일한 운동을 하려는 연합과 연대를 요청한다. 스피노자(2014)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타자와의 조화로운 관계에 진입하고 이 운동을 유지할 때 인간은 존재 역량을 강화시킬 수 있다.19)

인간 신체의 부분들이 서로에 대해 갖고 있는 운동과 정지의 비율이 유지되도록 하는 것은 선이다. 이에 반하여, 인간 신체의 부분들이 서로에 대해 운동과 정지의 다른 비율을 갖도록 하는 것은 악이다(E. Ⅳ. 정리 39).

인간들이 서로 운동과 정지의 비율을 맞추며 나아가는 협력적 운동은 결과적으로 인간 서로에게 유익하다. 개인은 고립된 상태에서보다는 공동체의 한 성원으로 함께 타자와 동일한 원리 속에서 운동할 때 훨씬 더 자기 보존과 역량의 강화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공동체의 안정과 연대 속에서 개인들은 존재론적 안정감을 확보하고 더 높은 존재의 고지로 올라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다른 타자들과 운동과 정지의 비율을 맞추어 나갈 수 있는 것인가? 이 지점에서 1차적이고 결정적인 기여를 하는 것은 다름 아닌 감정이다. 스피노자(2014)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감정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서적 관계에서 그들을 관계맺음 하는 데 강력한 전염성을 일으킨다.

자기가 사랑하는 것이 기쁨 또는 슬픔으로 자극받아 변화되는 것을 표상하는 사람도 역시 기쁨 또는 슬픔으로 자극받아 변화될 것이다. 그리고 사랑받는 대상의 그러한 감정이 커지거나 작아짐에 따라서 사랑하는 사람의 감정도 더 커지거나 더 작아질 것이다(E. Ⅲ. 정리 21).

『에티카』 Ⅲ부 정리 21에서 26은 인간들 사이의 상호작용에서 감정이 어떻게 작용을 하고 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Oh, 2017). 감정이입하는 타자의 기쁨과 슬픔은 곧 감정이입 주체의 기쁨과 슬픔의 감정으로 이어진다. 이성에 의해 인도되기 전 인간을 타자와 관계 맺고 살아가게 하는 1차적 장치는 바로 감정인 것이다. 다른 사물, 특히 타자와의 마주침에 의한 신체의 변용에 대한 관념인 감정은 우리가 신체를 갖고 타자와 교유할 때 계속적으로 발생되는 존재의 역동성을 확인시켜주는 신호이다. 이것은 감정(정서) 모방으로 나아간다. 스피노자(2014)는 이를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우리와 유사한 것으로서, 그것에 대하여 우리가 아무런 감정도 갖고 있지 않은 것이 어떤 감정으로 자극받아 변화되는 것을 우리가 표상한다면, 우리는 그것으로 인하여 유사한 감정으로 자극받아 변화된다(E. Ⅲ. 정리 27).

이에 따르면 우리는 감정을 서로 모방하면서 타자가 기쁨과 슬픔의 감정에 빠져있을 때, 동일하게 그 기쁨과 슬픔의 감정을 표상함으로써 모방하게 되고 유사한 신체적, 정신적 상태에 머무르게 된다. 이 “표상은 이 감정에 유사한 우리 신체의 변용”(E. Ⅲ. 정리 27. 증명)을 표현하게 만들기 때문이다.20) 이것은 타자의 감정을 모방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나의 감정을 타자가 모방하고 있다는 표상에 의해 그 역의 관계도 성립한다. 이러한 상호주관성에 의해 인간은 감정의 에너지에 의해 서로가 서로에게 존재의 역량에 대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대상이 된다. 스피노자(2014)는 이러한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이 우리에 대하여 보다 큰 감정으로 자극받아 변화되어 있다고 우리가 표상함에 따라서, 우리는 더욱더 의기양양해질 것이다(E. Ⅲ. 정리 34).

따라서 감정의 표출은 개인과 개인이 관계를 맺게 하는 출발점이 되며, 우리는 타자의 위치에 대한 감정이입과 정서모방을 통해서 그와 함께하려 노력하는 도덕적 지각을 형성한다. 그러므로 비록 감정의 발산이 역사적으로 구성된 문화적 풍토와 표현 체계의 지배를 받는다 하더라도, 가장 기본적으로는, 그것이 다른 이의 감정에 의한 공감을 일으킬 수 있는 수준에서 표출되고 확산되지 않는다면 인간사회의 도덕적 체계는 감정 교류에 기반하지 않게 됨으로써 사상누각의 질서에 지나지 않게 된다. 반면, 감정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곳에서 사람들은 ‘의기양양’해지는 감정의 긍정적인 상향 운동의 경험을 통해 자신의 존재 역량이 고양되는 경험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하에서 우리는 감정이 어떻게 공동체의 구성과 유지에, 그리고 개인들의 활력에 에너지를 분유하는지를 뒤르케임의 종교사회학에 기대어 분석한다.

4. 축제와 공동체적 열정의 생산

가. 사회와 감정의 관계

뒤르케임은 사회학계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감정이 사회의 구성과 재생산에, 그리고 인간의 사회적 참여와 집단 소속감의 강화에 미치는 영향을 체계적으로 연구한 고전 사회학자이다(Kim, 2016; Kim, 2013). 그는 자연과학이 자연을 대상으로 하듯이 사회학은 사회를 대상으로 학적 체계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였고, 자연에 대비하여 ‘사회적 사실’이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사회적 사실은 고정되었든 아니든 개인에게 외부적인 구속을 행사할 수 있는 모든 행위양식”21)으로서 개인에 선재하는 구조화된 질서이다. 사회적 사실은 자연과 같이 존재하는 집합적 행위양식이다. 그것이 행위양식인 것은 사회적 사실이 개인에 선행하면서 개인을 사회화시키는 힘으로 작용하면서 개인에게 판단과 행위의 규범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즉, 개인에 앞서 사회(적 사실)는 존재한다. 이 맥락에서 뒤르케임(2001)은 교육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우리는 아이의 삶에 처음부터 규칙적으로 먹게 하고 마시게 하며 자게 한다. 우리는 그에게 청결과 정숙, 복종을 강요하며, 좀 지나서는 타인에 대한 적절한 배려와 관습과 규칙에 대한 준수, 노동의 필요성 등을 배울 수 있도록 압력을 가한다…… 교육의 목표란 엄밀히 말해 인간의 사회화이며, 따라서 교육의 과정은 간단히 말해 사회적 존재가 만들어지는 역사적 양식에 우리를 집어넣는 것이라는 점이다(58).

앞의 서술은 다름 아닌 사회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뒤의 서술에서 뒤르케임은 정확히 그 사회화가 바로 교육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근대 이후 자유주의 교육관에 따르면 개인은 자율적인 이성의 주체로서 자유의지를 갖고 행위하는 역량을 지닌 존재이기에 이러한 뒤르케임의 교육에 대한 시각은 당시의 일반적 통념과는 어긋나는 접근으로 볼 수 있다. 자유주의 교육관에 따르면 교육은 자율적 주체인 개인의 이성을 계발하고 권리 주체로서 사회생활에 요구되는 지식을 제공하는 것이다(Hong, 2007). 그런데 뒤르케임은 정확히 그 반대에서 그러한 개인이 사회의 행위규범을 우선적으로 수용하고 그것을 습관화하는 것을 통해 사회의 구성원으로 편입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22) 나아가 뒤르케임은 “사회적 구속은 개인적 퍼스낼리티와 반드시 모순되지 않는다.”(56)는 점을 강조하기도 한다. 그러면 사회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 것인가? 뒤르케임에 따르면 사회는 “개인의 외부에 있고, 또 강제적인 힘을 부여하며, 그렇기 때문에 개인을 통제하는 행위양식, 사고양식, 그리고 감정의 양식”(55)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의 논의에서 특히 주목을 끄는 부분은 바로 사회가 개인들에게 감정양식을 제공하는 위치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회적인 행위가 인간의 감정적 운동과 강력한 밀착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을 암시한다. 사회가 감정양식을 개인들에게 분유한다는 것은 사회의 작동에는 인간 상호관계의 인지적, 실천적 측면만이 아니라 감정적 교류 역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사회라는 공동체의 구성과 공고화는 인간 상호간의 행위 양식, 사고 양식뿐만 아니라 감정의 운동을 필수적으로 요청한다. 이때 감정양식을 소유한 사회란 단지 우리가 상상하는 국가에 비견될 거대 사회만을 지시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모든 중요한 사회적 과정의 최초의 기원은 사회집단의 내적 구성 속에서 찾아”(177)질 수 있는 만큼, 사회적인 것을 구성하는 개인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사회적 성격을 띠는 집단 모두가 포함될 수 있다. 따라서 우리의 과제와 관련하여 뒤르케임의 감정양식에 관한 이론을 빌어 작은 규모의 학급, 수업 집단에 대해서도 동일한 이론적 분석을 적용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한다. 특히 다음에서 다룰 종교 생활에 관한 뒤르케임의 분석은 원시 종교과 문명들에 대한 탐구로부터 시작하는데, 그것은 원시 문명들이 매우 단순하면서도 유익한 여러 사례들을 풍부하게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뒤르케임은 말한다. 따라서 소규모의 집단의 감정적 연대와 교류에 대해서도 우리는 동일한 맥락에서 이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굳이 복잡한 고등 종교와 거대 사회에 대한 분석을 경유하지 않고서도 뒤르케임의 종교사회학 이론을 통해 학급이나 수업 집단과 같은 소규모 공동체 단위에서 이루어지는 사회적 과정에 대한 분석을 하는 데에 무리가 따르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뒤르케임이 “모든 숭배와 믿음 체계의 근저에서 반드시 어떤 기본적인 상징들과 의식적(儀式的)인 태도들을 찾아볼 수 있다.”23)고 지적하기 때문이다.

나. 감정 에너지를 생산하는 축제

뒤르케임이 사회학의 대상으로서 제안한 사회(적 사실)에서 감정양식이 차지하는 역할에 대한 보다 정교하고 체계적인 탐구는 『종교 생활의 원초적 형태』에서 펼쳐진다. 우리가 다루는 주제와 관련하여, 여기서는 공동체의 축제가 사회의 결속, 도덕적 질서의 구축에 어떠한 방식으로 기여하는가를 제시한다. 특히, 사회, 즉 공동체 또는 집합체의 축제에서 인간들의 상호작용에 깃든 감정적 요소들이 어떻게 공동체를 강화하고 그에 참여한 개인들에게 생의 활력을 불어넣는지를 분석한다. 결국 뒤르케임이 주장하려는 바는 종교의 핵심에는 사회, 곧 사회가 그 신학적 질서의 정점에 위치해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인데, 종교는 곧 사회에 대한 찬양이며 숭배로 이해될 수 있다. 뒤르케임의 종교는 사회로, 또한 공동체로 읽어도, 아니 오히려 그럴 때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보다 명확하게 드러내준다.
뒤르케임에 따르면 사회는 사회 속 행위자들의 생존을 위해 타인의 도덕적 지지와 동조를 요구한다. 이러한 개인들의 동조에 의해 사회는 그 권위를 행사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사회의 결속력을 높인다. 사회가 “분열을 예방하기 위해 그 구성원들에게 사회의 모든 권위를 행사”(42)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종교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종교적 신앙체계들은 항상 어떤 특정한 집단에 공통되는 것”(76)이며, 구성원들은 “자신들의 공통적인 관념을 공통적인 의례로 함께 옮긴다.”(77) 종교는 “믿음들과 의례들이 결합된 체계”이며, 그것은 “단일한 도덕적 공동체 안으로, 그것을 신봉하는 모든 사람들을 통합”시키는 기능을 한다. 사회는 종교와 마찬가지로 인간을 단일한 공동체 속에 포섭하며, 이를 위해 신앙체계들과 같은 이데올로기와 의례를 지닌다. 원시 문명에서는 토템이 이러한 역할을 하는데, “토템은 씨족의 도덕생활의 근원”(274)이 된다. 특히 종교는 구성원들이 “좀 더 큰 확신을 가지고 세상을 직면하게 해주는 일종의 수단”(275)이 된다. 그것은 개인이 사회와 강하게 결속되어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되는 장면에서 사회적 힘으로서 개인에 앞서면서 공동체 다수의 승인과 지지를 통해 개인에게 힘을 준다. 뒤르케임(1992)은 이를 다음과 같은 서술을 통해 분명히 한다.

이러한 행동양식들은 공동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것들이 각 사람의 마음 속에서 생각되어지면서 동반되는 활기는 다른 모든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도 보존되면서 서로 간에 영향을 미친다(297).

공통된 열정에 자극된 회중들에 둘러싸이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만 한정되어 있을 때는 할 수 없는 행위들과 감정들이 생겨나게 된다…… 개인으로 내버려두면 곧 약화되어질 감정들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감정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모이게 하여 서로서로 좀 더 긴밀하고 적극적인 관계를 맺도록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힘의 증가는 그가 호소하고 있는 바로 그 집단으로부터 온다. 그의 말이 불러일으키는 감정들은 커지고 증폭되어 그에게로 다시 돌아오는데, 그러한 감정들은 그 자신의 감정을 더욱 강화시킨다(300-301).

회중 사이에서는 감정들이 발생하고, 그로부터 개인에게 활기를 주는 힘이 솟아난다. 개인은 공동체를 구성하는 다른 개인들과의 도덕적 조화를 통해 “더 많은 자신감과 용기와 대담성을 가지게 된다.”(302) 이것은 회중에 들어간 개인들 간 정서 모방을 통해 가능한 것이다. 그것이 없다면 이는 원천적으로 작동될 수 없는 원리이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것은, 스피노자의 주장을 입증하듯이, 종교적 축제 속에서는 이러한 정서모방이 흔하게, 그리고 강력하게 드러난다는 점이다. “정열에의 도취”(308)가 일어나고, “한 데 모인다는 사실 그 자체가 마치 비할 데 없이 강력한 흥분제”(308)가 되고, 특히 “외부에서 들어오는 인상들에 대하여 매우 개방적”(308)이 된다. 집단에 공유되는 단일한 감정은 “행동과 협동을 가능케 하는 어떤 질서를 준수한다는 조건에서만 집단적으로 표현될”(309) 수 있다. 뒤르케임은 따라서 “종교적 힘은 도덕적 힘”(318)이라고 단언한다. 결국 개인들 간 동일한 감정의 연대와 공유는 공동체가 지니고 있는 도덕적 권위를 강화시키고, 권위로부터 도덕적 세례를 받은 개인들의 감정 에너지로, 삶의 활력으로 전화된다. 그리고 이것이 다시 공동체에 대한 개인의 신뢰로 되돌려지면서 공동체와 개인 간의 관계에 선순환이 발생한다. 이처럼 축제와 의례 속에서 인간은 도덕적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묶이면서 그들을 같은 동질 집단의 성원으로 의식하게 되는 것이다. 뒤르케임(1992)은 의례의 가치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의식은 이러한 믿음들의 생명력을 유지하고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다시 말해서 결국 집합적 의식(意識)의 가장 본질적인 요소들을 소생시키기 위해서만 오직 쓰이고 또 그렇게 쓰여질 수 있다(520).

이러한 의식이 정기적으로 행해지면 개인들에게 지속적으로 감정 에너지를 공급하는 공정이 완성된다. 사회는 개인들의 사회에 대한 신실한 마음이 유지될 수 있도록 주기적인 의식의 장치, 즉 축제를 마련해놓음으로써 개인들 간 강력한 정서 모방이 일어나게 하고 감정 에너지가 개인 상호 간에, 그리고 사회에 정향될 수 있도록 만든다. 뒤르케임의 종교사회학을 감정 교환의 상호작용 이론으로 접근하는 콜린스는 정서 모방과 전염의 조건을 의례들이 지닌 다섯 가지 특징적 모습에서―고프먼을 빌어―찾아낸다. 그것은 의례가 상황적 공현존(situational copresence)과 신체적 공현존을 가능하게 하고, 사회적 유대, 성스러운 대상의 발견, 도덕적 불편의 감각을 준다는 것이다.24) 특히 “상황적 공현존”은 “인간의 몸이 같은 장소에 모여 있을 때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방식”(56)을, “신체적 공현존은 ‘초점이 맞추어진 상호작용(focused interaction)’이 되면서 온전한 만남으로 전환”(56)되는 인간관계를 가리킨다. 축제는 이처럼 상황적 공현존과 신체적 공현존을 요청하며, 이 두 개의 공현존에서 발생한 감정 에너지는 매우 강력한 힘을 개인들에게 행사한다. 콜린스 역시 뒤르케임과 같이 “의례가 내는 효과 목록의 마지막 항목은 ‘도덕성’”(77)이라고 말한다. 콜린스(2009)는 지금까지 우리가 논의한 의례와 축제가 낳는 중요한 4가지의 결과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1. 집단 유대, 집단 성원으로서의 소속감.

2. 개인의 정서적 에너지 생성: 자신감, 의기충천, 힘, 열정, 진취적 행위 의욕.

3. 집단을 표상하는 상징: 상징적 표지 또는 자신들이 집단 성원임을 떠올리게 해주는 집합적 재현물(아이콘, 구호, 몸짓). 이들은 뒤르케임이 말하는 ‘성스러운 대상’이다. 집단 유대감으로 고양된 사람들은 크나큰 외경심으로 상징을 다루고 불경스러운 외부인이나 반역적인 내부자로부터 상징을 수호한다.

4. 도덕 감정: 집단을 신봉하고 상징을 받들어 모시며 내부자의 위반으로부터 집단을 지키려는 정의의 감각. 이와 함께 도덕적 악 또는 집단 유대와 그 상징적 표지를 거스르는 부도덕에 대한 감각(88)

뒤르케임이 축제와 의례가 신이 아닌 사회 그 자체에 대한 숭배라고 정리하며 제시한 테제는 축제가 구성원들이 집단의 도덕을 승인하고 따름으로써 집단을 강화하려는 이와 같은 노력에 다름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스포츠 행사가 종교 의례보다 더욱 강력한 정서 모방과 전염에 따른 이러한 감정 에너지를 산출하고 도덕 감정을 생성한다는 점이다. 콜린스는 스포츠 행사가 종교 의식이 의도적으로 설정한 감정 고양의 장치를 동원하지 않고서도 무의식적 차원에서까지 더욱 강력하게 참여자들에게 감정 에너지를 만들어낸다는 점을 밝힌다. 스포츠 행사야말로 참가자들에게 공식적인 의례보다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으면서 절정의 의례를 경험하게 하는 데 탁월한 기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100). 이상의 논의는 상식적으로 이해되는 사회 구성의 원리와는 전혀 다른 지반에서 사회가 구성, 운영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사회나 공동체가 개인들의 생존의 필요에 따른 이해타산과 인지적 차원의 요구, 교섭에 따라 형성, 유지, 발전되는 것이 아니라, 감정에 의해 유지되고 강화된다는 점을 뒷받침한다.
이하에서 지금까지 전개한 감정 자본주의 비판, 감정과 몸에 관한 스피노자의 철학, 사회의 구성과 감정 에너지의 생성에 대한 이론을 근거로 이러한 접근이 체육수업과 체육교육에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를 논의한다.

5. 수업의 축제화와 도덕성 발달

시덴탑이 스포츠교육 모형에서 제시한 6가지의 특징적 요소들 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부각시킨 축제화는 비단 스포츠교육 모형을 따르는 수업뿐만 아니라 모든 체육수업 운영에서 필히 요청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무엇보다 흥미가 없이 운동 기능만을 강조하거나, 수업에 대한 학생들의 외양적 태도만으로 수업의 성공을 평가하려는 것은 체육수업의 고유한 본질을 도외시 하는 것이다. 시덴탑이 축제화를 강조하는 이유는 체육수업은 어느 교과 수업보다도 흥미와 열정으로 충만했을 때 가장 큰 교육적 효과를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교과 수업에 축제화가 매번 도입된다면 어색할 법도 한데, 체육수업은 축제화로 인해 가장 성공한 수업으로 될 수 있다. 시덴탑이 체육수업의 축제화를 이처럼 강조한 것은 소위 ‘신나는 체육수업’을 하라는 요구일 것이다. 학생들의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의 감정이 넘실대고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수업 참여가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신나는 체육수업임에 틀림없다. 지금까지의 이론적 분석에 근거해 볼 때 이러한 신나는 체육수업은 크게 두 가지 요인들을 갖춰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그것은 일루즈가 분석한 감정 자본주의의 가장 큰 두 가지 문제점을 통해 파악될 수 있다. 일루즈는 감정 자본주의는 감정을 계산과 추리의 영역으로 포섭하면서 감정의 본성을 인지적 영역 안으로 끌어들여 이를 길들이려 한다는 점과, 웹 기반 문화에서 신체 활동이 감소되고 인간들 사이의 신체적 만남이 축소됨으로써 인간들 사이에 제한되고 계산된 감정 교류만이 이뤄진다는 점을 지적한다. 후자의 문제는 몸을 움직이는 것 자체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체육수업은 학생들의 활발한 신체 활동을 이끌어내야 한다는 것으로, 전자의 문제는 신체 활동을 활발히 하면서 학생들의 감정 에너지를 극대화할 수 있는 전개를 통해 체육수업이 학생들에게 감정 에너지를 공급하고 그들의 도덕 발달을 꾀해야 한다는 요구로 이해된다. 이하에서 이를 두 가지로 요약하여 구체적으로 다룬다.
첫째, 체육의 가치는 스피노자적 맥락에서 몸을 움직이는 것이 인간의 감정과 신체 건강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인식에 근거해 조명되어야 한다. 스피노자에서 감정은 신체의 변용 내지는 변용에 대한 관념으로 이해된다. 곧 신체가 자극받아 움직이는 것은 감정을 일으키는 바탕이 된다. 이때 중요한 것은 감정이 신체의 활동능력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이다. 감정은 신체의 활동능력을 증대시키기도 하고, 감소시키기도 한다. 신체의 활동능력이란 존재의 건강성과 같다. 이 생명과 건강의 중핵에는 스피노자가 인간의 존재 역량이라고 말한 코나투스가 자리하고 있다. 코나투스는 생명체가 갖는 삶에 대한 본원적 욕구이다. 코나투스는 항상성의 원리와도 같이 무의식적으로 생명체의 건강성을 최종적으로 담보하는 존재 역량이다. 그런데 일루즈의 지적처럼 현대사회에서 신체 활동의 감소와 웹 기반 문화에서의 인간관계 형성에 따른 감정의 제한적 표출, 계산적 교환은 인간의 존재 역량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이와 함께 감정 자본주의에 만연한 냉소의 감정은 개인이 감당할 수 없이 확장된 현대사회의 인간관계에 고갈된 감정 에너지로 대처해야 하는 상황에서 선택한 감정 양식인데, 이는 현대사회에서 인간이 항상적인 감정 에너지의 고갈에 시달리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러한 위기를 타개할 전략으로 당연히 몸의 움직임을 근본으로 하는 체육이 요청될 수밖에 없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감정은 그것과 반대되는, 그리고 억제되어야 할 그 감정보다 더 강력한 어떤 감정에 의해서”(E. Ⅳ. 정리 7)만 제거될 수 있다. 즉, 슬픔의 감정은 반대되는 그보다 강한 기쁨의 감정에 의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 이는 코나투스의 원리가 뒷받침한다. 코나투스의 원리에 따라 인간은 기쁨을 존재 역량을 상승시키는 것으로 받아들이기에 슬픔을 멀리하고 기쁨을 가까이하려 한다. 그런데 슬픔의 감정이 계속 지속되고 이러한 악순환으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하는 한 우리는 우울과 불쾌에 빠져 존재 역량의 하강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스피노자는 이 우울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한다. 그것은 몸을 많이 움직이는 것이며 그로부터 기쁨에서 발생한 욕망이 슬픔에서 발생한 욕망을 억누르고 극복할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다. 이때 주의할 점은 스피노자가 요구한 바대로 몸을 많이 움직이는 것 자체가 반드시 기쁨을 가져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몸을 움직여서 타자, 대상과 마주칠 때 그것이 기쁨의 감정이 아니라 우연히 슬픔의 감정을 초래할 수도 있는 가능성 또한 농후하다. 특히 감정 자본주의와 같이 고갈되고 변질된 감정의 기운으로 살아야 하는 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체육을 강력히 요청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체육수업은 특정한 시공간 속에서 계속적인 몸의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체육은 긍정과 기쁨의 감정이 생성되고 모방되는 통로이다.25) 수동의 감정들인 기쁨과 슬픔의 대결에서 기쁨이 슬픔을 이기도록 하려면 기쁨의 감정이 산출될 수 있는 조건들을 만들어줘야 한다. 체육은 신체의 기쁨이 생성되고 감정이 삽시간에 전염될 수 있는 조건을 형성한다. 특히, 코나투스를 가장 강력하게 고양시키는 동일한 본성을 갖는 개체들과의 연대의 운동을 체육수업에서 만들어낼 수 있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다. 따라서 우리의 존재 역량도 유한하다. 그런데 우리는 코나투스의 원리에 따라 그 존재 역량을 무한에 가까이 갈 수 있도록 희구한다. 개개인이란 결국 “한정된 존재를 갖는 유한한 것들”(E. Ⅱ. 정의 7)이며, 만일 다수의 인간이 “모두 동시에 한 결과의 원인이 되도록 한 활동으로 협동한다면”(E. Ⅱ. 정의 7) 다수의 인간은 무한으로 향하는 더 큰 단일한 역량을 만들어내며 그 안에서 개개인들 역시 더 큰 역량을 갖게 된다.
스피노자는 스포츠가 그러한 활동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에티카』를 완성하는 Ⅴ부에서 명확히 밝힌다. 스피노자에서 현자는 덕스러운 사람이며, 유덕한 사람은 사물들의 이치와 관계에 내재한 필연성에 대한 인식으로 자유를 얻는 길에 서 있는 사람이다. 따라서 덕은 더 큰 자연의 존재 역량을 따라 살아가도록 만드는 힘이며, 다른 사람과 상호작용 하여 선을 만들어낼 수 있는 힘이다. 덕은 더 많은 외부 작용과 사물과 상호작용할 수 있도록 해주는 존재의 역량인 것이다. “어떤 신체가 동시에 많은 방식으로 작용을 하거나 또는 작용을 받는 데에 다른 신체들보다 더 유능할수록, 그것의 정신도 동시에 많은 것을 지각하는 데 다른 정신들보다 그만큼 더 유능”(E. Ⅱ. 정리 13. 증명)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스피노자(2014)의 진술은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아름다움, 장식, 음악, 스포츠, 연극, 그리고 다른 사람을 해치치 않고 누구라도 이용할 수 있는 이런 종류의 다른 것으로 자신을 상쾌하게 하고 원기를 북돋우는 것은 현자에게 어울린다. 왜냐하면 인간의 신체는 본성을 달리하는 매우 많은 부분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부분들은, 몸 전체가 그것의 본성에서 나올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하여 똑같이 유능하게 될 수 있도록, 따라서 정신도 많은 것을 동시에 인식하는 일에 똑같이 유능하게 될 수 있도록, 여러 가지의 새로운 영양분을 끊임없이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E. Ⅴ. 정리 45. 주석).

스피노자에 따르면 스포츠는 결국 인간 신체의 운동과 정지의 비율을 단일하게 조정할 수 있는 활동이 될 수 있다(E. Ⅳ. 정리 39). 운동과 정지의 비율이 일정하게 유지되어 여러 개체가 하나의 개체로 되면 그것은 반드시 선이다. 우리는 체육수업에서 여러 학생들이 하나의 개체로 되어 하나의 팀으로 활동하는 것을 늘 보지 않는가. 같은 감정을 공유하며 하나의 단일한 목표를 향해 움직이는 것은 새롭고 더욱 강한 개체를 탄생시키고 그 개체 안에서 개인은 강한 존재 역량을 획득할 수 있다. 체육수업의 축제화는 감정을 최고조의 기쁨이 가득한 에너지로 만들어내기 위해 낱낱의 감정들을 조직화하고 하나의 목적을 향해 이를 정향시켜나가는 것으로서, 이 과정에서 개인들의 감정 하나하나는 연대와 연합의 원리에 의해 더욱 큰 감정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
둘째, 체육수업의 축제화는 학생들의 삶에 활력을 불어넣는 감정 에너지를 고양, 극대화시키고 그것으로 학생들이 공동체의 도덕을 자연스럽게 수용하고 바라게 만든다. 이는 개인의 도덕성이 상향하는 것은 물론 그것이 공동체의 건강성으로 되돌려질 수 있도록 한다. 우리는 앞서 감정은 인간의 몸의 움직임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을 확인하였다. 인간 몸의 움직임은 곧 감정의 움직임이기도 하다. 감정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전략은 어떻게 기쁨의 몸의 움직임을 조직화해 나가느냐는 것으로 수렴된다 할 수 있는데, 몸과 몸이 부딪치고 이때 긍정과 기쁨의 감정이 극대화될 수 있도록 만드는 일에 축제가 긴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뒤르케임은 보여준다. 이에 따르면 우리는 축제화의 요소가 감정과 존재 역량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야 한다.
여기서 일루즈의 문제의식을 다시 상기해보자. 일루즈는 감정이 생활세계와 같은 친밀성의 영역에서 절차성과 합리성에 의해 지배되고 미세하게 조절, 억제되면서 그 자체의 건강성을 상실하고 있다는 점을 감정 자본주의 사회의 감정이 처한 가장 큰 위기로 진단한다. 생활세계에서 감정이 자본주의의 합리성이 요구하는 방식에 의해 주조된다는 점은, 스피노자에서 감정은 신체의 변용에 대한 관념으로서 기쁨, 슬픔, 욕망의 세 가지 기본 범주로 구성되며 이들의 작용에 의해 신체의 활동능력, 즉 건강성이 증대되기도 하고 감소되기도 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우리의 감정 능력에 기반한 건강한 삶에 무언가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볼츠에 따르면, 현대 사회는 제한 없는 기쁨의 감정을 느낄 기회, 그리하여 존재의 에너지가 충만되는 느낌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기회를 거세당한 사회이다(Bolz, 2017). 이로 말미암아 현대 사회의 인간은 “감정의 공백 상태”(Bolz, 2014: 23)에 항상적으로 시달린다. 감정의 공백 상태는 인간의 활동능력이 저하되고 하향되는 것인 바, 볼츠는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다른 무엇보다 스포츠에 주목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자연적 열정, 감정 에너지는 인위적으로 고안된 장치, 즉 놀이와 스포츠에 의해 복원될 수 있다. 스포츠는 현대인들의 잃어버린 열정을 되살릴 수 있는 형식과 절차를 제공한다. “열정 자체가 죽어버렸다고 해도 그 열정의 표현 형식 자체에 대한 숭배를 통해 죽은 열정을 되살리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Bolz, 2017: 161)이라면서 스포츠 행사와 경기의 축제성과 형식성에 주목한다. 스포츠에서 열정의 표현 형식 자체는 축제 속에서 확장, 강화된다. 축제와 같은 상호작용 의례에서 인간은 “상호 주관성과 정서적 합류”26)를 일으키고 여기에 인지적 상징을 결부시키며 매우 강한 집단 소속감을 개인들에게 선사한다(80). 그 의례가 스포츠 행사와 같이 강렬하면 강렬할수록 공동체 또한 변화를 일으킨다. “상호작용 의례는 변동의 기제”(81)이다. 특히 뒤르케임은 사회에 대한 종교적 찬양을 통해 근대의 일반적인, 개인 중심의 주체화론에 대한 반격을 가하고자 하는데, 그는 인간은 사회를 통해 우리가 “우리의 동료들과 공통적인 것을 소유하고 있는 것”27)을 알게 되며, “우리가 개체화되면 될수록 더욱더 인간적이 된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383)라는 점을 강조한다. 결국 인간 앞에 사회적 사실로서 주어지는 어떤 공동체에 대한 감각과 그것을 지지하는 열정적 참여 없이는 온전히 성립하는 개인도 있을 수 없다는 점을 뒤르케임은 보여준다. 뒤르케임(1992)은 다음과 같이 인간이 의식과 축제를 통해서 도덕의 길로, 그리하여 인간의 길로 들어설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들이 몸짓, 외침들, 태도 등을 통해 토템을 닮고자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 그들은 서로 간에 자신들이 같은 도덕적 공동체의 구성원이라는 것을 보여주며 그들을 묶고 있는 친족관계를 의식하게 된다. 의식(儀式)은 이러한 친족관계를 표현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의식은 이러한 관계를 만들거나 회복시킨다(497).

특히 뒤르케임(1992)은 다음과 같은 서술을 통해 사회, 도덕, 집합 의식, 감정이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우리가 직접적으로 습득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은 필연적으로 도덕적인 힘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힘들은 당연히 비인격적이다. 왜냐하면 비인격적 힘의 개념이 가장 먼저 구성되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두 가지 조건을 만족시키는 유일한 힘들은 공동생활로부터 나온 힘들이다. 그것들은 바로 집합적인 힘이다. 사실상 한편으로 그 힘들은 전적으로 정신적인 힘이다. 그 힘들은 오로지 객관화된 관념들과 감정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 힘들은 당연히 비인격적인 힘이다. 왜냐하면 그 힘들은 협동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힘보다 더 전염적이고 결과적으로 더 전달이 잘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506).

집단적 의식, 공동체의 축제에서 발생한 정신적 힘은 비인격적인 것으로서 사회 자체 내에 존재하며 개인들에게 정서적 에너지, 공동체에 대한 헌신성, 사회를 유지하고자 하는 도덕적 힘을 만들어낸다. 이미 만들어진 힘은 더 이상 개인에게 최종 귀속되는 인격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협동의 산물로서 그 자체 객관화되어 있는 강력한 에너지의 저장고가 된다. 그리고 사회로 편입되는 누구에게나 그 에너지를 나누어주고, 개인들은 서로 간 연대적 감정의 고양을 통해 그로부터 자신의 도덕성을 강화하는 것으로, 그리고 그 힘을 사회로 되돌린다.
이러한 맥락에서 체육수업이 축제화가 되어야 한다는 시덴탑의 주장이 의도하고 있는 것이 보다 명확해진다. 그것은 체육수업을 통해 학생들의 강고한 감정적 연대와 결속력을 만들어내고 그것으로부터 삶의 에너지를 보충 받고 도덕적 삶을 살 수 있는 기틀을 다질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재미없는 수업, 축제화에 실패한 수업, 학생들의 열정을 이끌어내지 못하는 수업은 어떤 모습일까? 콜린스의 실패한 의례에 대한 묘사는 이를 잘 보여준다. 이 묘사는 시덴탑이 지루한 체육수업이라고 규정한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콜린스(2009)의 다음과 같은 서술은 이를 상상할 수 있게 한다.

의례의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기준은 무엇일까? 참여자들이 ‘공허한 의례’, ‘행사에 불과한 것’, ‘김빠진 것’이라고 말하는 공식적 의례가 있다…… 가장 즉각적으로 알 수 있는 실패는 집합적 열기도 낮고, 순간적으로 쏟아지는 환호 소리도 없고, 정서적 합일을 느낄 수 없거나 실망스러운 정도로 낮은 경우이다. 의례의 산출물 쪽에서도 실패의 표지를 볼 수 있다. 집단 유대감이 거의 또는 전혀 생기지 않는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감각이 강화되지도 않고 변화를 일으키지도 않는다. 집단의 상징에 아무런 경외심을 느끼지 못하고 정서적 에너지도 높아지지 않는다. 의례의 영향을 받지 못하고 평범한 감정에 머물거나 더 나쁜 경우는 질질 끌려간다는 느낌, 지루하고 구속당하는 느낌, 심지어는 우울증, 피곤함, 도망가고 싶은 의례도 있다.28)

재미없는 체육수업은 위의 진술을 뒤집어 적용하면 시작부터 공허하게 의무감으로 줄을 세워 학생들을 모아놓고 시작하는 수업, 상황적 공현존과 신체적 공현존이 학생들을 휘감아 돌지 못하는 수업, 그리하여 집합적 열기가 낮고 함성과 웃음소리 한 번 없는 수업, 친구들과 어떠한 정서적 합일도 이루지 못하고 있는 수업, 유대감이 형성되지 않고 순간순간 낱낱으로 공허하게 존재한다는 느낌을 주는 수업, 그로 인해 학급에 새로운 소속과 헌신의 감각을 촉발시키지 못하는 수업, 흥분의 맥동과 감정적 요동침 없이 냉소적 감정만이 지배하는 수업, 수업 관리의 효율을 위해 구속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수업, 갖은 핑계와 변명으로 빠지고 싶은 수업, 그리하여 공동체에 대한 그 어떠한 감각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도덕적 의무감을 세례하지 못하는 수업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 반면 성공한 체육수업은 이를 정확히 뒤집어 놓은 수업이 될 것이다.

6. 결론

베버가 자본주의에 대해 합리성의 테제를 통해 분석을 가한 이래 감정은 자본주의의 변두리에 위치해 있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사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감정은 지속적으로 요청되어 왔다. 비록 그것이 사회에 대한 합리적 조율의 필요성에 따른 것이었더라도 말이다. 사실 가장 큰 문제는 친밀성의 영역에서까지 감정 표현이 합리적 절차에 의해 규제, 조정되어왔다는 점이다. 가정, 학교 등의 일상적 영역에서 감정은 이제 합리적 절차와 방식에 의해 표현되고 조율된다. 때로는 상황에 따라 제한 없이 표현, 표출되어야 할 감정은 공사의 영역 모두에서 인간의 비이성, 동물성, 과격성, 폭력성을 드러내는 주범이란 오명을 쓰고 있다. 그러나 앞서 살펴보았듯이 감정은 인간의 건강한 활동능력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이러한 감정은 몸의 움직임과 매우 큰 관련성을 맺고 있으며, 인간과 인간을 연결하여 강력한 사회적, 도덕적 질서를 구축하는 핵심 역할을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체육수업은 몸의 움직임과 감정의 관계에 주목해야 함은 물론, 감정의 자연적 표출과 정서 모방과 결속에 따른 인간의 건강한 발달과 도덕성의 고양에 대한 충분한 고려를 해야 한다.
이 연구는 체육수업이 강력한 도덕 감정 형성의 기제로 작동할 수 있다는 하나의 이론적 단초를 제공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체육수업이 참여자에게 어떠한 원리와 효과로 도덕성을 형성할 토대로 작용할 수 있는지에 관한 보다 정치한 논의로는 나아가지 못했다. 타자에 대한 감정적 고려와 연대를 의식하는 것은 도덕의 출발점이지만, 이 글에서의 논의는 개인의 도덕성이 어떻게 출발하고 다듬어지는지를 보여주는 데는 한계가 있다. 나는 향후 연구에서 공동체적 감정의 발생이 선악의 구분을 초월하는 집합의식으로 연결된다는 문제의식 하에 그것에 도덕적 판단을 가하는 일은 유보되어야 한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서, 스포츠가 어떻게 인간을 도덕의 세계로 안내할 수 있는지를 도덕 형성 이전의 덕에 관한 새로운 이해를 열어줄 미학의 관점을 빌어 찾아보고자 한다.

Notes

1) 스포츠교육 모형과 같이 스포츠의 문화적 요소들을 명시적으로 강조하고 모형의 가치, 목적, 내용, 방법에 핵심적으로 위치시킨 또 다른 모형으로는 하나로체육수업 모형을 꼽을 수 있다. 하나로체육수업 모형에 관해서는 Chii, E. C. (2010). Humanities oriented physical education and Hanaro Class. Seoul: Rainbow Books를 참고할 것.

2) Siedentop, D., Hastie, P. A., & Mars, H. (2011). Complete guide to sport education [M. H. Joh, Transl.] Seoul: Daehan media. p. 146. 이하에서 이 책을 인용 시 본문에 쪽수를 표기함.

3) Siedentop, D. et al. 앞의 책. p. 151. 이하에서 이 책을 인용 시 다시 본문에 쪽수를 표기함.

4) Dewey, J. (2010). Interest and effort in education [Y. K. Cho, Transl]. Daegu: Kyowoo. p. 19. 이하에서 이 책을 인용 시 본문에 쪽수를 표기함.

5) 파슨스의 사회 이론을 다른 사회 이론들과의 대별 속에서 파악할 수 있는 연구로는, Kim, D. Y. (2016). Sociology of society: hermetic odyssey for Korean sociological theory. Seoul: Gil을 참고할 것.

6) 사회 이론 내에서 감정이 대두하게 된 배경에 대한 보다 상세한 이론적 설명은 Park. H. S., & Jung. S. N. (2015). How does emotions move society. Seoul: Hangilsa; Park. H. S., & Jung. S. N. (2009). Toward the Macro-sociology of Emotions. Society and Theory, 15. 195-234; Barbalet, J. M (2006). Macro soionlogy of emotions. [H. S. Park, Transl.]. Seoul: Ilsinsa의 Ⅰ장 “사회적 삶과 사회 이론 속의 감정”을 참고할 것.

7) 이 글에서 ‘사회적인 것’의 개념과 하위 구성 범주는 Kim(2013)의 구분에 따른 것이다. Kim은 뒤르케임의 ‘사회적인 것’에 관한 이론을 빌어 그것의 대상 영역을 확정한다. Kim, H. J. (2013). In Search of the Emotional reasonability of the Social: A Reflection on the emotional turn in social theories. Society and theory 23, 23-25를 참고할 것.

8) 일루즈의 감정에 관한 사회 이론은 포괄적으로는 그녀의 ‘사랑의 사회학’으로 이해, 규정된다. 일루즈의 저서와 성과에 대한 체계적인 분석을 시도한 연구로는 Park, H. S. (2014). Emotional capitalism and love: Eva Illouz’s Sociology of Emotion on The Search for a Mate. Journal of Social Thoughts and Culture, 30, 39-82를 참고할 것.

9) Illouz, E. (2016). Cold Intimacies: Making of Emotional Capitalism [J. A. Kim, Transl.] Seoul: Dolbegae. 13-14. 이하에서 이 책을 인용 시 본문에 쪽수를 표기함.

10) Weber, M. (2010). Die protestantsche ethik und der ‘Geist’ des kapitalismus (The protestant ethic and the spirit of capitalism) [D. Y. Kim, Transl.]. Seoul: gil. 16-26. 주지하듯 베버의 이 책은 자본주의 정신의 성장과 프로테스탄트 윤리의 상관관계를 합리성의 테제에 기반하여 분석한다. 그런데 한 가지 주의할 점은―감정 자본주의에 관한 우리의 논의에서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칼뱅주의 하의 구원예정설은 지극히 비합리적인 감정을 요구하며 근검과 절약을 향한 충동을 자극하였다는 점을 이해할 필요도 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비합리적인 감정과 판단, 행위가 자본주의의 합리적 시스템 하에서 자본주의의 발전을 구가할 수 있도록 기여했다는 아이러니를 발생시켰다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말이다. 이하에서 이 책을 인용 시 본문에 쪽수를 표기함.

11) Illouz, E. (2016). 앞의 책. 17. 이하에서 이 책을 인용 시 다시 본문에 쪽수를 표기함.

12) 이 부분은 하버마스의 생활세계의 식민지화 테제의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하버마스는 생활세계가 체계와 분화되는 과정을 조망하면서 다시 “우리에게 문제는 다음과 같은 형식으로 제기된다: 근대사회로 이행함에 따라 생활세계의 합리화가 역설적으로―합리화된 생활세계가 하부체계의 성립과 성장을 가능하게 하지만 그러한 하부체계들의 자립화된 명령들이 다시 생활세계 자체에 파괴적으로 작용하게 된다는 의미에서―진행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고 묻는다. Harbermas, J. (1995). Social theory of communication [E. J. Jang, Transl]. Seoul: Gwanaksa. 256-257. 하버마스가 가정, 학교 등의 생활세계의 영역이 체계의 논리에 침습되면서 합리화되는 과정을 겪으며 고유한 문화와 역할이 훼손되는 점을 지적한다면, 일루즈는 그것의 구체적인 한 모습으로 가정, 대인관계 등의 사적 영역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인 감정이 합리적으로 처리되는 것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하버마스의 생활세계 식민화 테제에 관한 소개와 그것의 의미와 한계에 관한 글로는 Kim, I. M. (2012). theory of communication and Living World Colonization Thesis in Ko, J. & H. Kim (Eds), Theses of the Frankfurt School (201-225). Seoul: Aprilbooks를 참고할 것.

13) 전통적인 사랑의 방식에 관한 이해는 프롬의 다음과 같은 서술에 잘 나타나 있다. “사랑한다는 것은 아무런 보증 없이 자기 자신을 맡기고 우리의 사랑이 우리의 사랑을 받는 사람에게서 사랑을 불러일으키리라는 희망에 완전히 몸을 맡기는 것을 뜻한다. 사랑은 신앙의 작용이며 따라서 신앙을 거의 갖지 못한 자는 거의 사랑하지 못한다.” Fromm, E. (2000). The art of loving (M. S. Hwang, Transl.). Seoul: Moonye. 166. 전통적 사랑은 자기 조회 없이, 어떠한 계산 없이 온몸으로 하는 비이성적 신앙의 에너지를 우리에게 요구한다. 일루즈 역시 프롬과 같은 맥락의 진술을 통해 사랑의 주체가 타자를 과대평가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또한 前인터넷 시대의 로맨틱한 주체의 사랑은 이상화 과정을 통해서 상상력을 촉발했다. 사랑한다는 것은 과대평가한다는 것, 곧 (현실적) 타자에게 실제보다 높은 가치를 매긴다는 것이다. 상대방은 이상화 행위를 통해서 유니크한 존재가 되었다.”(194-195)

14) Spinoza, B. (2014). Ethica (Ethics) (T. Y. Hwang, Transl.). Jeonju: Bihong press. Ⅲ. 부록. p. 158. 스피노자의 이러한 인식은 그의 『정치론』에서 보다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들(철학자들-필자)은 아무 데도 존재하지 않는 인간의 본성에 관하여 터무니없는 칭찬을 늘어놓으며 실제로 존재하는 그것을 욕하는 방법을 익혔을 때 지혜의 절정에 도달해 있다고 믿는다. 사실 그들은 있는 그대로의 인간이 아니라 그렇게 있었으면 싶은 인간을 생각하고 있다. 그 결과로, 대부분의 경우 그들이 쓴 것은 윤리학이 아니라 풍자소설이다. 그들은 결코 실제로 적용될 수 있는 정치이론을 안출한 적이 없고, 단지 공상에 가까운 것이나, 유토피아에서 혹은 그런 것에 대해 본래 필요가 없었을 곳인 시인들의 황금시대에서나 효력을 가졌을 수 있는 정치이론을 안출했을 뿐이다.” Spinoza, B. (2015). Political Treatise (Tractatus Politicus) (T. Y. Hwang, Transl.). Jeonju: Bihong press. Ⅰ. §. 1. 9. 이하에서 『에티카』를 인용 시 본문에 직접 표시함.

15) 스피노자의 정리 7에 관한 증명의 일부인 이 서술을 본 연구에서는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자 한다. 그것은 생명체는 그것의 코나투스의 강화를 위해 내적으로 요구받고 있는 존재를 향한 노력이 단지 단일 개체 내에서의 운동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다른 개체들과 더불어 활동을 하려는 노력 속에서도 가능하고, 오히려 그것이 존재의 지속과 역량을 강화시키는 근본적인 힘으로 작동한다는 원리를 설명하기 때문이다. 코나투스 개념은 스피노자의 윤리학과 정치학의 기저를 이루는 개념인 점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해석에는 무리가 따르지 않는다(Park, 2013: 86). 이에 관해서는 이후 논문의 전개에서 보다 명확히 다루어질 것이다.

16) 내들러는 코나투스와 정신의 관계 설정에서, “정신에서 코나투스는(그것이 식별할 수 있는 한) 정신의 안녕과 정신의 실존이 의존하는 신체의 안녕을 증진시키는 것들을 쫓는 의식적 노력”으로 이해한다. Nadler, S. (2014). Spinoza’s Ethics: An introduction (H. J. Lee, Transl.). Seoul: Greenbee. 333.

17) 스피노자가 쾌감, 유쾌, 고통, 우울을 구분하는 이유는 “쾌감이나 고통은 한 인간의 어떤 부분이 다른 부분보다 더 많이 자극받아 변화되는 때의 인간에 관계되어 있지만, 유쾌나 우울은 한 인간의 모든 부분이 똑같이 자극받아 변화되는 때의 인간에 관계”(E. Ⅲ. 정리 11. 주석)되는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쾌감은 기쁨일 수 있어도 인간의 특정 부분만 기쁘게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전체 부분에는 악영향을 미친다. 가령, 흔히 먹는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생각해보면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달콤한 아이스크림은 미각의 단맛을 느끼는 부위를 자극함으로써 뇌에 일시적으로 좋은 쾌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나, 단맛이 초래하는 영향으로 인해 장기적으로는 인체 전체의 건강한 균형을 무너트리며 코나투스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를테면 “신체의 모든 부분이 아니라 신체의 일부 또는 몇몇 부분에 관계되는 기쁨 또는 슬픔에서 생기는 욕망은 인간 전체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는다.”(E. Ⅳ. 정리 60)는 부분이 이에 관한 스피노자의 견해이다. 이러한 구분은 『에티카』에서 매우 중요한데, 기쁨을 일으키며 코나투스를 강화시키리라 기대했던 쾌감은, 즉시적인 만족이 아닌 장기적인 전망 속에서 존재 역량을 강화시킬 수 있는 판단을 할 수 있는 지성의 인도를 받음으로써 유쾌를 촉발하는 만남의 행위로 대체되어야 하고, 이것이야말로 바로 스피노자가 2종 인식으로서의 지성과 3종 인식으로서의 직관에 의해 도달하는 현자를 만드는 전략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18) 욕망이 왜 감정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누구든 의심을 품을 만하다. 이를 정확히 인지하고 있는 내들러는 기쁨과 슬픔이 행위의 역량을 증감시키는 한에서 기쁨과 슬픔이 코나투스가 신체와 정신에 걸쳐 있는 욕구에 대한 의식인 욕망으로 귀속되는 방식으로 이를 설명한다. “일차적 정서(감정)는 엄밀하게 말하자면 기쁨이나 슬픔인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기쁨이나 슬픔은 욕망의 강도가 외부 원인에 의해 증대했거나 감소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Nadler, S. (2014). Spinoza’s Ethics: An introduction (H. J. Lee, Transl.). Seoul: Greenbee. 338.

19) 그러나 이러한 진술에 대해 인간이 서로 다른 이익을 쫓으며 다른 입장과 가치관으로 대결하게 되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간들이 서로 정념에 휩싸여 있을 때 인간은 서로에게 적이며 악이 될 수도 있다. 서로 다른 가치관과 이익을 쫓는 인간이 어떻게 같은 본성을 지닐 수 있다는 말인가? 스피노자는 이 부분에서 코나투스의 원리에 근거한 이성에 따라서 행위하는 인간들만이 그러한 협력과 합치를 이룰 수 있다고 밝힌다. 이성에 의해 장기적 관점에서 이성이 인도하는 덕스러운 삶을 따르고자 하는 인간들 사이에서는 같은 본성으로 단일한 대오를 유지하며 보다 강력한 공동체를 만들고, 그로부터 존재 역량이 상향된 인간들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언급한 이 부분은 스피노자의 정치학 이론의 발판을 마련하려는 『에티카』의 4부에서 주로 다루어지고 있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 논문은 감정이 지닌 힘과 그것이 인간 존재에 갖는 의미를 분석하려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고, 감정이 어떻게 1차적인 수준에서 인간의 존재와 연대를 가능하게 하는지에 대한 논의에 한정하므로 『에티카』의 체계에 모순되지 않는 한에서 이 점을 다루고자 한다.

20) 이러한 감정이입과 정서모방이 인간의 발달과 도덕적 성장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인지과학적 접근에 의해 보여주는 글로는, Thompson, E. (2016). Biology, Phenomenology, and the Sciences of Mind (I. S. Parl, Transl.). Seoul: Bbook. 509-546을 참고할 것. 톰슨은 “마음 상태들을 다른 개체에게 귀속시키고 이 마음 상태들에 비추어서 타자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는 인지적 능력”(526)인 인지적 공감이 타자 이해와 도덕적 지각에서 매우 중요하게 작동한다는 사실을 밝힌다.

21) Durkheim, E. (2001). Les regles de la methode sociologique (The rules of sociological method) (C. H. Park, & B. C. Yoon, Transl.). Seoul: Saemulkyul. 65. 이하에서 이 책을 인용 시 본문에 쪽수를 표기함.

22) 뒤르케임이 자유시민의 교양 교육이 아닌, 시민 교육에 교육의 초점을 맞추었다는 점은, Yi, H. J. (2008). From Humanities To Civility: A Study on Durkheim`s Critical Approach for Secondary Education. (34), Korean Journal of Social Theory, 34, 231-260을 참고할 것. 또한, 뒤르케임이 도덕 발달에 관한 공동체주의자로서 기성 사회의 규범을 강조하면서도 국가가 아닌 시민사회의 발달에 의한 시민사회 영역의 성장과 도덕, 그를 통한 시민사회의 국가에 대한 견제에 무게를 두었다는 연구로는, Yi, H. J. (2003). Two Origins of Communitarian Moral Discourses: Hegel`s "Sittlichkeit" and Durkheim`s "La Morale". Korean Journal of Social Theory, 24, 144-183을 참고할 것.

23) Durkheim, E. (1992). Les formes elementares de la vie religieuse (A primitive type of religious life) (C. J. Noh, & H. S. Min, Transl.). Seoul: Minyoungsa. 26. 이하에서 이 책을 인용 시 본문에 쪽수를 표기함.

24) Collins, R. (2009). Interaction ritual chains (S. M. Jin, Transl.). Seoul: hanulbooks. 56-59. 이하에서 이 책을 인용 시 본문에 쪽수를 표기함.

25) 인간 신체들의 만남이 기쁨을 만들어내고, 존재 역량의 증대로 이어진다는 것은 스피노자의 철학(윤리학)을 역량의 존재론으로 이해, 분석한 들뢰즈의 입장이기도 하다. 들뢰즈는 스피노자에 대한 전통적 해석이 이성과 감정을 대립시키는 것과 달리 감정 내부의 기쁨과 슬픔의 차이에 주목하면서, 비록 수동의 감정이지만 어떻게 기쁨으로 슬픔을 극복할 수 있을지를 고민한다(Delueze, 2003; Yang, 2010: 274). 스피노자 윤리학 체계에서 온전히 자기 원인으로서 능동으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지만, 들뢰즈는 보다 현실적인 차원에서 수동의 감정이더라도 기쁨의 만남을 조직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중요할 수 있음을 발견하고 이를 추구한다.

26) Collins, 2009. 앞의 책. 80. 이 글에서 이 책을 인용 시 다시 본문에 쪽수를 표기함.

27) Durkheim, E. (1992). 앞의 책. 383. 이하에서 이 책을 인용 시 다시 본문에 쪽수를 표기함.

28) Collins, 2009. 앞의 책.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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