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스포츠아버지 칼딤(Carl Diem)의 재고찰

Reconsideration of Carl Diem, the Father of German Spor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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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Sport Sci. 2015;26(2):356-367
Korea Institute of Sport Science
한국스포츠개발원
Received 2015 April 09; Revised 2015 May 13; Accepted 2015 May 13.

Abstract

이 연구는 육상선수, 체육행정실무가, 저널리스트, 스포츠학자 및 대학 총장 등을 역임한 현대 독일스포츠계의 한축이었던 칼 딤의 역사적 의의와 가치를 재조명하기 위한 것이다. 국내에서는 독일스포츠선구자로써 독일스포츠의 중심 역할로 높게 평가받고 있으나 자국인 독일에서는 1936년 베를린올림픽 사무총장이었던 그는 친나치 인물이며, 이로 인해 그의 이름을 딴 지명이 삭제되는 등 역사적 논란의 중심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 딤은 육상선수 출신으로서 스포츠클럽의 조직 및 회장을 역임하였고, 다양한 경기 대회를 조직·개최하였으며, 미국에서 스포츠학을 전공함으로써 독일스포츠의 학문적 길라잡이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는 성화봉송을 탄생시킨 주인공이자 올림픽 아카데미 창설을 통해 올림픽에 대한 의의를 정립하는 데에 주력하였다. 그의 학문적·실용적 역량은 독일체육대학교 설립을 통해 증명되었고, 현재까지 칼딤연구소가 운영되고 있다. 따라서 이 연구는 칼 딤이 쏟은 열정을 통해 독일스포츠는 물론 올림픽까지 발전 양상을 살펴보는 동시에 당시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 평가된 그에 대한 기록과 흔적을 다각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Trans Abstract

The research is to shed new light to historical meaning and value of Carl Diem who was a pillar of modern sports in Germany and also served as an athlete, PE administrator, journalist, sports scholar and dean of a university. He has been highly regarded in Korea as a trail-blazer of German sports, but in his own country, he who once served as the secretary general of the 1936 German Olympics was at the center of controversy since he was named as a pro-Nazi, and even the name of a place named after him was deleted. Having said that, as an athlete, he played a huge role in organizing sports clubs where he worked as an chairman; organized and held various sports competition events; laid the academic groundwork for the modern sports in Germany by majoring in Sports in the United States. Above all, he is the one who came up with the torch relay and staved to define the significance of the Olympic Games by founding the International Olympic Academy. His academic and practical capabilities were proven through the establishment of Deutsche Sporthochschule Köln, also known as German Sport University Cologne. And Carl Diem Research Institute is still up and running to this day. Thus, in this research, I’d like to take a look at his passion for sports and changes of German sports including the German Olympics and offer a multi-faceted view on him who was evaluated during a historical turmoil back then.

서론

독일 노스라인베스트팔렌주 쾰른 린덴탈 시의회는 2008년 1월 1일을 기점으로 “칼딤백(Carl-Diem-Weg)” 지명을 “암 스포츠파크 뮌걸스도르프(Am Sportpark Müngersdorf)”로 개명할 것을 결정하였다(Kölner Stadt-Anzeiger, 2006년 3월 30일자). 칼 딤(Carl Diem, 이하 딤)은 1882년 출생하여 1962년 사망한 스포츠계의 전설로 불리는 독일의 역사적인 인물이다. 독일스포츠계 영웅의 흔적은 위와 같이 거리명에도 이름이 새겨져 있을 정도이다. 교육학자로 유명한 디볼트 밴 딜런(Deobold Van Dalen, 1911~1995)은 『체육의 세계사(World History of Physical Education)』(1953)에서 “딤은 20세기 독일 스포츠계의 거인으로 모든 국가, 모든 시대의 스포츠의 위대한 지도자 그룹의 가장 앞에 위치하고 있고”(정상옥, 1999), “근대 가장 열정적인 스포츠교육자”(Mandell, 1974)라고 평가하였다. 1900년부터 1960년까지 학교, 올림픽기구, 체육행정기관 그리고 클럽 조직까지 그가 스포츠계에 미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이다(Buss & Nitsch, 1990).

엘리트선수로서, 스포츠클럽의 사무국장 및 지도자로, 지도자를 위한 코치아카데미의 창설자, 독일스포츠배지 프로그램의 창시자, 독일연방청소년대회 창립자, 올림픽 성화봉송 제작자, 독일체육대학교를 설립하고 1936년 베를린올림픽 사무총장을 역임하였다. 딤은 스포츠학을 끊임없이 탐구했던 학자로서 독일은 물론 세계스포츠계에 한 획을 그었던 인물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상술한 바와 같이 독일체육계의 중추적 역할에도 불구하고 나치 정권 시기 민족사회주의의 대변인이었다는 이유로 칼딤백(Carl-Diem-Weg) 지명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하지만 지명이 바뀌었다고 해서 그의 자취 또한 희석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독일의 스포츠교육 학자인 클루게(Kluge)는 “그는 나치가 아니다, 딤의 부인 리제롯 바일(Bail) 또한 유대인이고, 1933년에는 독일신체운동제국위원회(DRAfL)에서 이미 사무총장직을 그리고, 동년 체육대학교 학장도 그만두었기 때문에 나치에 대한 논쟁을 더 이상 할 필요가 없다”라는 반론도 있다(Kluge, 2002). 지속적이고 적극적인 동조론에도 불구하고 이미 공공연하게 보여주었던 히틀러 옆의 딤의 모습으로 인하여 그에 대한 논쟁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사회가 먼저인가, 개인이 먼저인가 하는 문제는 암탉과 달걀의 문제와 같고, 개인이란 한 사회의, 아니 아마도 한 개 이상의 사회 -그것을 집단, 계급, 부족, 국민, 또는 그 밖의 무엇으로 부르든-의 구성원이다(Carr, 1993: 53)”라고 했듯이 한 인물에 대한 논의는 특히 이분법적 해석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어 위험하다.

따라서 정치적 측면의 이분법적 논리를 극복하고, 객관적이며 개방적인 태도로 딤을 살펴봄으로써 개인의 역량이 어떻게 독일스포츠계는 물론 세계스포츠계에까지 영향을 끼쳤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이러한 노력은 우리나라 수많은 금메달 리스트들과 스포츠영웅이 있지만 객관적인 평가와 논평을 자유롭게 하지 못하는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도록 시사점을 던져주는 데 시발점이 되리라 기대한다. 인물사에 대한 연구는 한 개인에 대한 사실적 논의 외에도 타자의 평가가 항상 공존해있기 때문이다.

딤이 세운 성과에 비해 국내에 그에 대한 연구는 많지 않다. 1992년 김상순의『스포츠사상사』저서에서 “독일 국민스포츠의 사도(使徒)”로 딤을 소개하였고, 1999년 정상옥의 석사논문인『Carl Diem의 체육 사상과 활동』에서는 국내에서 딤의 첫 번째 학술논문으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다만, 딤의 시각으로 본 당시 “스포츠”에 대한 개념을 정리하였는데 주로 일본서적을 참조하였기에 딤이 갖고 있는 스포츠에 대한 사상을 이해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무엇보다도 딤이 독일인임에도 불구하고 “체조”가 아닌 “스포츠” 개념을 정의하는 데 왜 그가 스포츠 이론에 몰입하였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배경이 배제되어 있다. 이어 2004년 김선종의 석사학문인 『칼 디임의 사상이 독일 체육·스포츠계에 미친 영향에 관한 고찰』은 역시 딤의 스포츠에 관한 사상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또한 독일스포츠 발전의 디딤돌인 딤의 역할 등 논의 외에 정상옥의 논문 내용과 큰 차이가 없다. 이외에도 2003년 김기용의 『Carl Diem의 스포츠觀에 관한 연구』, 동년 황옥철·박정희의 『독일 스포츠 선구자 칼 딤의 생애와 사상에 관한 고찰』이 학술지로 발표되었다. 황옥철·박정희는 딤의 생애를 서술함으로써 스포츠에 대한 관심과 활동, 역할 그리고 그가 갖았던 스포츠사상에 대한 논의도 제시하였다. 다양한 컨텐츠를 통해 딤의 활동을 소개함으로써 다른 논문보다는 폭넓은 이해를 도모할 수 있었다. 이 외 1972년 4월에 발간된 『體育』紙(70권)에 이의태가『스포오츠의 뜻에 대하여 Carl Diem의 학설을 중심으로』라는 제목으로 딤의 스포츠 개념을 그리고 1982년 6월 『體育』紙(172권)에서 이원방은 『巨步를 내딛던 그 前夜의 回想 - 파리 콩그레스와 올림픽 競技의 復活-』이라는 글을 통해 딤의 올림픽에 대한 회고를 옮겨 적은 글이 있다. 독일 체조아버지라 불리는 프리드리히 얀(Friedrich Ludwig Jahn, 1778-1852) 이후 국내에 독일체육 인물 중 그래도 자주 등장하는 인물로서 딤의 지명도는 높은 편이다.

하지만, 선행 연구들 대부분이 딤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갖기에는 한계를 갖고 있다. 즉, 그의 업적에 치중한 나머지 지속적으로 논란의 중심이었던 민족사회주의자, 나치주의의 편에 섰던 체육계 관료 등 陽에 의해 가려졌던 陰이 망각되었었다.

한편, 홀츠케(Holzke, 2001)의 박사논문인 『유럽법과 독일스포츠 개념』에서 독일에 스포츠 유입 경로와 스포츠 개념 그리고 중심이었던 딤이라는 인물을 기술하였다. 논제에서 내비추었듯이 독일 내 스포츠의 관념과 특성, 법으로써 스포츠의 속성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술하였다. 이어 브로이어(Breuer, 2008)의 박사논문은 『경쟁과 게임 사이의 스포츠 - 칼딤의 스포츠개념을 중심으로-』라는 논문을 통해 스포츠교육학적 시각에서 게임, 경쟁, 스포츠에 대한 관념을 비교·분석하였다. 뒤스터하우스(Düsterhaus, 2005)의 석사논문은 칼딤의 『1913년 미국여행과 스포츠배지』라는 제목으로 미국 유학시절 스포츠체험과 대국민 건강체력 향상 프로그램인 스포츠배지에 대한 연구이다. 이 외 대다수 논문은 석사논문이 주이며 대부분이 시기별, 직책별, 사업별 등으로 구분하여 하나의 항목에 집중·연구하였다. 석박사 논문은 대부분 딤의 성과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반면 학술지와 매거진은 논쟁거리들이 대다수이고, 단행본 증 베커(Becker)와 크뤼거(Krüger)의 『칼딤의 기억』(2009)은 “학자로서의 딤”과 “민족사회주의 신체교육: 이론과 조직 체계에 관한 문서”라는 제목으로 구성되어 역사가의 시각보다는 기록의 해석에 충실한 글이다.

따라서 이 연구의 목적은 딤을 통해 개인의 업적은 물론 독일스포츠의 발전 양상, 그리고 한 인물을 둘러싼 독일의 다양한 시각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는 한 개인의 삶이, 한 국가가 선진 스포츠국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고찰할 수 있는 중요한 소재가 될 것이며, 아울러 한국의 체육인재에 대한 논의의 장을 적극적으로 개방하는데 일조하고자 한다.

딤의 성장과 그 배경

딤의 개인적 성장과 사회적 배경

1882년 6월 24일 뷔르쯔부르크(Würzburg)에서 태어난 딤은 5살 해를 맞이했던 1887년 베를린으로 이사했다(김상순의 『스포츠사상사』, 황옥철 외 『독일스포츠 선구자 칼 딤의 생애와 사상에 관한 고찰』에 의하면 모두 1888년이라고 표기되었으나 독일쾰른체육대학교에서 발간한 『FORUM』, Wikipedia, 그리고 대부분의 독일 기록에 의하면 1887년으로 되어 있다). 기성복가게를 운영했던 아버지의 사업 실패 이후 딤은 학교생활을 하지 못할 정도로 베를린 생활 또한 매우 어려웠다. 소파나 부엌 마룻바닥은 그의 침실로 사용되었고, “햇살이 없는 대부분이 암울한 비 내리는 날”(Diem, 1974)이라고 표현했듯이 베를린에서의 어린 시절은 가난의 연속이었다. 이러한 가정환경은 수업 성적이 좋지 않는 등 그대로 학교 생활에도 영향을 끼쳤지만 음악, 미술, 체조에는 좋은 성적을 보였다(Breuer, 2008).

딤의 스포츠활동은 누구보다도 적극적이었는데 “이미 10대 중반 학교 체육수업이 불충분했기 때문에 나는 투룬넨 코라브클럽 청소년부에 가입하였고, 곧 조장이 되었다”(김상순, 1992), “14세 때에는 첫 번째 스포츠클럽을 결성하였고”(Breuer, 2008), 이어 스케이트클럽 아르고(Argo), 뫼베(Möve), 에스씨 코멧(SC Comet), 푸스라우프세종(Fußlaufsaison)이라는 다양한 스포츠클럽을 창단할 정도로 스포츠계에서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사실 10대에 스포츠클럽을 조직하고 운영하기란 쉽지 않은데 그의 나이 16세에 클럽 창설은 물론 정관을 만들어 클럽운영에 대한 전문가임을 증명하였다. 딤의 10대는 대부분 클럽을 창설하고 운영하는 데 열중하였다.

20대에 들어서는 소규모 클럽이 아닌 베를린을 중심으로 한 육상클럽을 창설(1908), 아테네올림픽 선수단트레이너 및 신문기자로 활동하였으며, 특히 대규모의 경기대회를 최초로 개최하는 등 중규모 클럽 조직 구성 및 대회 개최에 몰두하였는데 1905년 크로스육상, 1908년 포츠담-베를린 계주, 그리고 첫 번째 실내스포츠축제(Hallensportfest)를 개최하였다.

육상수업을 초록 잔디위에서 듣는다. 오늘날 이러한 대회를 실내에서 개최한다면 스포츠를 알릴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상태이며... 짧은 시간 안에 새로운 삶을 발전시킬 수 있고, 내적 가치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1908년 1월 19일 제1회 실내스포츠축제 개최 기념 담화문 중, Olympische Flamme, Bd. 3, 1177).

특히 “독일육상스포츠청”의 주집필자로 활동을 시작한 딤은 독일에서 확립되지 않은 스포츠에 대한 인식과 개념을 설정하는 데 몰두하였다.

그러던 중 1904년 10월 1일, 1년 단기병으로 지원한 후 직업군인으로 전환하였다. 군인생활은 그의 인생에서 스포츠로 관심을 갖는 중요한 시기로 강인한 군인 교육을 위한 일환으로써 스포츠가 적극적으로 활용하였기 때문이다(독일 Wikipedia, 2015년 3월 5일). 즉 딤은 군인체력장을 위해 스포츠를 활용할 것을 제안하였고, 이에 국방클럽에 훈련 대용으로써 스포츠가 대체될 수 있었던 것이다(Carl-Diem-Institut 2, 1982).

한편 딤은 고등학교 졸업시험을 못 친 상태에서도 베를린대학에서 철학, 미학, 문헌학, 심리학, 사회학, 그리고 언론학 수업에 참관하는 등 공부에 대한 남다른 관심이 컸다. 교양수업에 참가하면서 베를린대학의 연구생이 되어 육상경기의 트레이닝과 스포츠생리학에 많은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Wieland, 1968; 황옥철과 박정희, 2003 재인용).

30대의 딤은 국내가 아닌 국제 활동으로 무대를 옮기게되는데 “올림픽 독일제국위원회(Deutschen Reichausschusses für Olympische Spiele: DRAfOS)” 초대위원회 및 경기위원회 위원으로서 1912년 스톡홀름대회 대표단 단장, 1916년 베를린올림픽 개최를 위한 사무총장으로 활동하였다. 국제 무대에서의 활동과 동시에 스웨덴의 스포츠배지(Idrotts-Mäket)를 모방하여 전국민을 대상으로 한 건강육성프로그램 사업을 독일 최초로 전개하였고(김미숙과 김대희, 2012), 2012년 100주년을 맞이하였다. 아울러 체육시설법의 모체라할 수 있는 경기장법(Spielplatzgesetz)은 그의 나이 30대 중반으로 5천명 기준, 공동경기장을 위해 국민 1인당 4평방미터를 설치하도록 제시하였다(Carl-Diem-Institut 2, 1982). 이러한 일련의 활동들은 베를린이라는 거대 도시에서 이루어지는데 베를린은 스포츠에 대한 의지를 펼칠 수 있었던 중요한 공간적 무대이기도 하다.

딤의 가장 큰 노력은 전통적인 독일체조와 새로운 신체문화인 스포츠의 조화를 추구했다는 데 있다. 체조라는 기존 독일의 신체문화와 스포츠라는 새로운 영국의 신체문화의 충돌을 해결하는 데 딤은 남다른 노력과 역량을 발휘했다. 가령 두 번의 미국 유학은 딤의 스포츠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구축하고 확신을 갖는데 중요한 요인이었다. 딤은 “미국을 매우 좋아했다”라고 할 정도로 미국에 대한 선호도가 높았다. 그 이유는 스포츠라는 소재를 중심으로 학자로써, 그리고 직접 운동에 참가했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Mandell, 1974). 소위 “시찰 여행(Inspection Tour)"이라고 일컬었던 미국 여행의 계기는 1912년 스톡홀름올림픽에서 미국선수들과 독일선수들의 현저한 경기력에 따른 의문점에서였는데 당시 첫 번째 해외 지도자로써 알빈 씨 크랜츠라인(Alvin C. Kränzlein)을 영입한 사실도 있다(Carl-Diem-Institut 2, 1982). 또한 미국 여행 이후 딤은 1947년 쾰른체육대학교를 설립하는 등 이론정립과 스포츠과학의 심도 있는 연구를 위해 대학교육기관을 설립했다(http://library.la84.org/SportsLibrary/NASSH_Proceedings/NP2005/np2005zzn.pdf).

40대의 딤은 독일에서 전형적인 스포츠학자로 대표된다. 그의 나이 40살이 되던 해 베를린대학 의학과 명예박사 학위 수여 이후 제1회 독일신체교육 학술대회, 독일스포츠포럼, 독일올림픽위원회 편집장, 베를린대학 강사, 국제레크리에이션학회 독일 대표 등으로 그의 명성을 이어갔으며 50대 이후 국내·국제올림픽 및 스포츠기구의 각 임원으로 활동하였다.

딤의 스포츠에 대한 이론과 실천

본 장에서는 딤의 학문적 이론과 실천이라는 논제를 달았다. 왜냐하면 그 동안 딤의 생애는 대부분 체육 官僚로 활동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자신이 갖고 있는 고유한 학문적 견해와 이념을 끊임없이 저서로, 원고로 발표하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러한 이론적 근거를 토대로 스포츠클럽을 조직하고, 지도자 육성을 위한 아카데미를 설립하였으며 1936 베를린올림픽 개최를 위해 사무총장으로써 독일체육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활동하였기 때문이다. 즉 이론과 현장 능력을 고루 갖춘 인물이라 할 수 있다.

“Turnen”과 “Sports” 사이에서

영국에서 유입된 스포츠와 독일의 투르넨의 충돌은 개인은 물론 독일사회에서도 작은 문제는 아니었다. 체조의 아버지 얀으로부터 정착된 독일의 투르넨이라는 신체문화는 이미 19세기를 지배하였고, 1820년부터 1842년까지 투르넨 수업을 금지(Turnsperre 또는 Turnverbot)할 정도로 정치적 논쟁의 중심축인 때도 있었다. 투르넨은 독일의 대표적인 신체문화이자 체육수업이다.

체조는 기사도, 자부심, 인내심, 건강유지라는 틀에서 얀의 체조정신을 고스란히 보이고 있다. 우리는 빈부, 계급, 서열에 차별 없이 체조로써 맺어진 형제애는 모두가 평등하고, 이는 곧 조국이라고 할 수 있었다(Hansgeorg Kling, 2009).

국민 교육운동 중의 하나였던 투르넨은 독일의 국가통일을 위해, 연령이나 신분을 초월한 모든 주민이 이용할 수 있는 공공체육학교에서 행해졌으며, 체조(맨손, 기계) 운동뿐만 아니라 주, 도, 투, 레슬링이나 구기 등을 포함하고 있고, 동료의식이나 국민의식의 각성과 고양이 꾀하여 질만큼(김상순, 1998) 독일의 고유한 신체활동으로 규정지었다. 투르너(Turner)들은 "스포츠는 숫자와 목적에 의해 학대를 당하고 있고, 인간의 신체는 운동 수행 능력을 창조하고 측정하는 기계가 되어버렸다고 스포츠에 대한 비난을 했다"(김선종, 2004). 독일 민족의 전통적인 신체문화에 대한 대대적인 옹호에 스포츠에 대한 인식 확산은 쉽지 않았다. 고전적 레파토리를 상영하던 연극, 보수주의 성향의 작가와 표현주의 작가의 마찰은 전통적인 것과 현대적인 것의 충돌은 곳곳에서 일어났다(하겐 슐체, 2000).

한편, 독일에는 19세기 말 스포츠가 유입되었는데, 1883년 독일조정연맹, 1900년 독일축구연맹은 스포츠 종목명이 클럽명으로 반영된 대표적인 클럽이다. 당시만해도 스포츠는 운동, 최고의 경기력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육상, 테니스 골프, 축구 등 센티미터, 그램, 초 등 측정을 통한 기록 달성이 특징이 있다(http://www.oetb.at/fileadmin/images/btz/JahnsBedeutung.pdf).

딤은 스포츠를 정의하는 데에 있어 “놀이(Spiel)"와 “경쟁/싸움/전투(Kampf)”라는 용어를 제시하였다. 그 중에서도 “경쟁”이라는 뜻은 스포츠를 정의하는 데에 있어 매우 가치가 높은 통합적인 작업이라고 말했다(Breuer, 2008). 이에 더하여 딤은 스포츠 개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경쟁/싸움/전투라는 뜻을 가진 캄프(Kampf)와 내기(Wett)라는 단어가 합해진 “시합/운동경기(Wettkampf)”가 절대적으로 스포츠와 함께 다루어져야 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딤은 스포츠의 기저를 유희로 보았는데 “유희는 인간의 유쾌함과 불유쾌함을 통해 조작되는 자연의 섭리이고, 이 섭리가 인간에게 활력을 제공한다”라고 생각하였다(김기용, 2003). 그리스의 짐나스틱과 영국의 스포츠를 동질의 것으로 이해의 출발을 시작하였으나, 스포츠의 본질론에 관해서 딤은 근대 이후 영국의 스포츠를 중심으로 스포츠론을 전개하였다. 게다가 “룰의 통일”과 “선수권 대회의 개최”를 통해 스포츠의 경기화가 급속도로 발전할 수 있었다.

스포츠는 전쟁과도 관계가 있는데 세계1차 대전 후 독일국민이 심리적·신체적으로 병역을 치룰 수 있도록 딤은 스포츠를 활용하는 것이 가장 최적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즉 ʻ전쟁은 곧 스포츠를 통해 시민을 그리고 국민을 강하게 만든다.ʼ라고 여겼다. 따라서, 건강한 군인을 양성하기 위해 스포츠를 교육적으로 활용하였고, “민족의 미래는 곧 운동경기자”라고까지 강조하였다(Diem, 1941). 자연스럽게 맺어진 스포츠와 전쟁과의 관계는 경기장, 딤의 담화들을 통해 널리 전파되었다. 또한 히틀러청년단과 독일연방소녀단 교육 시 스포츠수업은 단연 우선시 되었다(Joch, 1982).

딤이 항상 강조했던 교육으로써 스포츠의 역할은 추후 연방정부의 규정에도 제시되었다. 1999년 노스라인 베스트팔렌주는 움직임, 놀이와 스포츠의 성장촉진은 움직임문화, 놀이문화 그리고 스포츠문화를 개발하는 척도가 된다고 하였다(Breuer, 2008).

스포츠를 포함하지 않는 교육은 생각할 수 없고, 스포츠를 포함하지 않는 아름다움도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신체적으로도 형성된 인간만이 교육의 가치가 있으며, 그러한 인간만이 현실적으로 아름답다. 이 아름다움이란 소크라테스도 생각한 선과 본질적으로 동질의 것이다(Diem, 1960; 김기용, 2003 재인용).

체조와 스포츠는 확실히 개념적 차별성을 띠고 있다. 상술한바와 같이 스포츠는 최고의 경기력을 목표로 두고 있지만, 얀은 체조를 “신체를 활용한 전인교육”, “스스로 극복을 통한 가장 좋은 경기력을 달성”에 초점을 두었다는 데에 큰 차이점을 둘 수 있겠다.

“독일 국민 스포츠의 사도“(김상순, 1992), ”스포츠를 위한 딤의 생애“라는 다수 기고문을 자주 접하게 되는데 스포츠발전을 위한 딤의 공헌 평가는 매우 높다. 즉 딤은 스포츠에 대한 견해를 단지 구술과 강의가 아닌 다수의 저술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의 본격적인 저서 활동은 1910년 발표한 “대회 경기 입문서”를 필두로 1910년부터 1923년까지 16편, 1924년부터 1936년까지 14편, 1937년부터 1949년까지 12편, 1950년부터 1960년까지 6편으로 총 48편을 저술하였다. 그 중에서도 “Sports"라는 용어를 직접 사용한 책자는 무려 17편으로 35%를 차지하고 있다. 아울러 저술 외 학술지로는 905편이 발표되었다(Körbs et al., 1962). 세계2차 대전 이후 스포츠에 대한 학문적 열정을 쏟아 부은 딤은 인재 육성에 특히 관심이 컸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1920년 베를린에 독일체육대학교를 설립함으로써 독일에 첫 번째 스포츠학을 교육하는 전문 학교를 설립하였다. 체육대학교의 설립은 우선 스포츠학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과 연구, 지속적인 경력 개발에 초점을 두었다(https://www.dshs-koeln.de/einrichtungen-a-z/). 당시 사회적 분위기는 ”아는 것이 곧 힘이다“라는 모토가 일반적이었고, 그 중 대학교육은 높은 수입과 사회적 지위가 보장되는 직업을 얻기 위한 입장권과 같은 것이었다(슐체, 2000). 딤의 학문적 관심과 성과는 스포츠와 관련된 2천여개의 연구물을 통해 알 수 있는데 기존 독일의 신체문화인 투른과 새로운 스포츠와의 이해를 돕기 위한 노력을 확인할 수 있다.

딤은 “Sportvater" 즉 스포츠아버지라고 불려질 만큼(Jungbauer, 2004) 독일의 스포츠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독일 스포츠의 역사를 살펴보려면 딤의 생애를 살펴보면 된다(http://www.dosb.de/fileadmin/fm-dsb/arbeitsfelder/wiss-ges/Dateien/CSI-Beitrag-Kr_ger-Jahresmagazin-2004-05.pdf)라고 할 정도로 딤과 스포츠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이는 19세기 근대 민주사회 체제가 확립된 시기로 근대과학이 발전하면서, 신체 및 신체운동에 대한 과학적 연구 즉 심리학, 생물학, 교육학, 사회학 인류학, 역사학 등을 통해 종합적인 연구가 시작된(김상순, 1998) 시기적 환경에 개인의 신체활동에 대한 관심이 독일의 스포츠 발전을 이루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딤은 과거와 현재의 충돌이 아닌 융합을 추구했던 인물로 스포츠의 개념과 스포츠의 현장 적용 등 발전을 가장 처음으로 도모하였다. 투르넨을 이미 독일민족의 유일한 신체활동으로 여겼던 기존 세대 및 인식과 어찌보면 “대적”하는 데 대표적인 인물이다. 마치 전통적인 건강 관리법을 유지했던 조선인들이(심승구, 2010) 근대식 학교와 서구의 선교사들로부터 전파된 체육교육 사이에서 고민했던 그 상황과 유사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만큼 전통과 현대라는 경계선에서 딤은 체조와 스포츠를 동시에 고민했던 인물이었다.

딤은 올림픽가족으로써 독일스포츠가 인정되기를 원했고, 무엇보다도 독일 체조인들이 오랜 시간동안 스포츠에 유입되기를 기대하는 의지가 없다는 데에 큰 걱정을 갖고 있었다(http://www.dosb.de/fileadmin/fm-dsb/arbeitsfelder/wiss-ges/Dateien/CSI-Beitrag-Kr_ger-Jahresmagazin-2004-05.pdf).

세계1차대전 발발로 인해 1916년 베를린올림픽은 개최되지 못했기 때문에 올림픽개최를 위한 독일제국위원회 사무총장이었던 딤은 다음 올림픽 개최를 위해 누구보다도 적극적이었다. 게다가 스포츠클럽과 종목별 스포츠연맹이 조직적으로 현대화되고, 재정비되면서 스포츠의 발전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체조와 스포츠에 대한 개념화 작업은 국가적인 과제”라고 할 만큼 딤은 스포츠의 아버지로써 스포츠에 대한 기원과 기능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미국의 스포츠사학자인 발 달렌 역시 그의 저서인 『세계 체육의 역사(World Education of Physical Education)』에서 “20세기 독일의 스포츠와 체육계의 거인은 딤이다. 체조와 스포츠의 대립을 배제하고, 독일스포츠헌장을 제정하고(1913),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에 체육대학 개설에 노력하고(1920) … 모든 국가, 모든 시대의 스포츠와 체육의 위대한 지도자 중에서도 가장 선두에 위치하고 있다(Dalen, 1971; 정상옥, 1999)”라고 칭송하였다. 상술했듯이 딤의 스포츠에 대한 효과성과 높은 선호도는 미국과 영국의 장기간 여행의 영향으로 따른 것으로 추측된다. 1893년부터 시카고, 캘리포니아, 워싱턴, 뉴욕 그리고 런던의 대학과 스포츠클럽을 방문하였고, 1913년과 1929년 두 차례에 걸쳐 미국에 공부를 목적으로 유학을 떠났다.

미국인에게 경쟁 없는 체력운동은 없다 … 미국인들은 대부분이 순수한 남성성을 갖은 그리고 강인한 신체는 강한 의지와 지혜로운 이해력이 결합된 승리한 파이터가 되길 원한다(Carl-Diem-Institut 1, 1982).

이러한 경쟁을 위한 최상의 장소로 딤은 학교를 꼽았다. 학급 대 학교, 학교 대 학교, 이외 기업 대 기업, 상점 대 상점은 물론 소규모의 클럽, 종교집단에 속한 “팀”이 경쟁의 중요한 주축이었다. 경쟁을 통한 승리는 최종적으로 “자존심, 자부심”을 얻을 수 있고, 이는 자신이 소속된 클럽, 학교, 대학교, 교회 등에 자존심과 자부심을 갖게 되는 유일한 포상이라고까지 정의하였다(Carl-Diem-Institut 1, 1982).

하지만 딤은 독일 또한 오래전부터 스포츠를 시작하고 있었다는 역사적 소견을 밝혔는데, 남자아이들(여자아이들은 소수)은 아버지의 손을 잡고 한 운동을 스포츠로 비춰진다고 하였고, 체조는 학교에서만이 허락된 신체운동이었으며 스포츠는 전 생애(직업을 포함하여)에 걸쳐 행할 수 있다고 하였다(Carl-Diem-Institut 1, 1982). 특히 청소년기 스포츠활동이 많은 경우 20~30대 최고의 경기력을 보일 수 있고, “스포츠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신체적 수행능력과 최고의 활력에 달렸다”라고 밝혔다. 아울러 청소년기, 성년기의 스포츠활동은 노화를 예방하고, 40대에 노젓기, 50~60대 여행하기 등에도 효과가 있는 등 스포츠에 대한 딤의 견해는 전생애에 걸쳐 긍정적인 효과를 주고, 학교에서 주로 행하는 체조와 가장 큰 차별성을 띠고 있다고 하였다(Carl-Diem-Institut 1, 1982).

스포츠를 즐겨라! 건강을 위해, 물리적 위험을 위해, 모든 질병에 대항하기 위해! 단지 창백한 뺨을 붉게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딘 영혼을 강하게 만들고, 스스로가 즐거움을 만들 수 있으며, 원기회복을 할 수 있도록(Carl-Diem-Institut 2, 1982).

딤은 청소년기 스포츠활동을 “특히” 강조하였는데 청소년에게 스포츠의 세 가지 가치란 “성격의 개별화”, “올바른 행동의 가르침”, “이상의 실천”으로 보았다. 무엇보다도 청소년에 대한 관심과 초점을 맞췄던 이유는 자신들의 부모들이 믿었던 일련의 가치들 예컨대 자유주의, 절제된 삶, 사회적 관행, 이성과 인간의 선의 및 시민문화의 규범에 대한 믿음을 온 힘을 다해 거부했기 때문이다(하슐체, 2000). 인종주의적 성향의 민족주의자, 혹은 사회주의자, 혹은 니힐리스트가 되었으며 아니면 청소년 운동이나 반더포겔(Wandervogel) 운동에 참가하였다(하슐체, 2000).

한편, 국내에 딤의 “스포츠에 대한 담론”을 소개하는 글로는 1972년 4월에 발간된 體育紙에서 나타났다. 당시 대한탁구협회 심판원인 이희태는 “스포오츠의 뜻에 대하여 -Carl Diem의 학설을 중심으로-”라는 제목이 있는데 이는 국내 딤에 대한 최초의 글이라고 할 수 있다. 딤은 스포츠에 대한 용어를 아래와 같이 정립하였다.

스포츠라는 말은 신세계가 되어 있는 영어를 통해 전세계에 퍼져 있다. 그러나 원래 영국에서 생긴 말이 아니라 프랑스어에서 생긴 외래어이다. 11세기 경 노르만인들이 고상한 생활의 표현으로 사용해 온 것인데 도어버해협을 건너 수입되어 들어간 것이다. 원래 영국에서는 스포츠를 디스포오트(disport or dysport), 또는 데스포오트(desport)라고 사용하였고, 프랑스 사람들은 desport→depport→deppors→deport→sedepoter→se deporter를 긴장에서의 해방(긴장 완화)의 뜻으로 사용하였다(이희태, 1972).

1957년 그의 저서인『체육의 이론과 실습(Theorie und Praxis der Körpererziehung』에 의하면 근대 스포츠의 기저를 프랑스혁명의 인권 선언에 의거하며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념과 함께 스포츠는 자유를 추구하는 능동적인 근원이요, 자기 교육과 자기 완성이 가능하다고 밝혔다(Krüger, 2009). 딤은 스포츠를 단지 교육의 효과로서 그 가치를 논의하기보다는 스포츠 실천자들의 자발적인 유희와 스포츠 선택, 스포츠 주체자로서 자유와 평등의 추구를 궁극적으로 지향하였다. 스포츠는 놀이라는 인생 전반에 속해있고, 놀이는 자발적이고, 목적이 없으며 이것이 바로 스포츠와 놀이를 비교할 수 있는데 스포츠는 놀이를 향상시킨 것이고, 놀이는 인생을 크게 향상시킬 수 있다고 하였다(Carl-Diem-Institut 1, 1982).

스포츠현장에서

딤의 스포츠 이론 연구에 대한 열정은 그대로 스포츠클럽 회장, 올림픽 사무총장, 스포츠행정, 체육기관의 기관장 등 활발한 활동으로 반영되었다. 상술한 딤의 개인적 성장에서 논의한 내용 외에 특이할만한 사실을 제시하고자 한다.

딤은 이른 나이인 10대에 베를린스포츠클럽 마르코마니아(Marcomannia) 클럽을 시작으로 스키, 달리기, 마라톤클럽을 창설하였다. 이후 1905년부터 1920년까지 베를린육상연맹 회장을 역임하였으며, 1908년 제1회 포츠담-베를린 릴레이육상대회를 개최하였다. 실상 육상대회와 같이 대회수의 증가는 개인은 물론 클럽이 다수 참가하면서 클럽수가 확산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딤은 육상에 대한 강한 애착을 갖고 있는데 봄과 늦은 가을에 발트라우페(Waldlaufe) 즉 “숲달리기”라는 새로운 용어를 개발하였는데 이는 크로스컨츄리라는 영어 단어에서 차용한 것으로 제한된 거리(距離)를 오랫동안 달리기를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스타페텐라우프(Stafettenlauf) 즉 릴레이경주는 마라톤을 발전시켜 만든 달리기 형태로 당시 포츠담-베를린릴레이경주를 개최하였다. 수많은 기록과 사진에서 딤의 달리는 모습을 아래와 같이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림 1.

1920년 동료들과 함께 육상을 하는 딤(첫줄 우측으로부터 세 번째, Carl-Diem-Institut 2, 1982)

그림 2.

학생들과 함께 육상을 하는 딤(첫줄 좌측으로부터 두 번째, Carl-Diem-Institut 2, 1982)

1913년부터 1916년까지 베를린올림픽 사무총장, 1914년 말뫼(Malmö)에서 개최된 발트대회 독일선수단 단장, 1917년부터 1933년까지 17년간 독일체육제국위원회(DRAfL) 사무총장을, 1924년에는 제1회 베를린에서 체육학술대회 조직과 독일스포츠포럼을 계획하였다. 1920년부터 1933년까지 독일베를린체육대학교(DHfL)의 총장을 1930년부터 1933년에는 베를린대학교의 강사였다. 1925년에는 베를린에서 여성체육을 위한 학회를 조직하였고, 동년 프라하 올림픽학회 대표로 참석하였다.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 선수단장으로 1929년에는 일본과 중국에서 개최된 대회에 독일육상선수단 단장으로 활동하였다.

1931년부터 1937년까지 1936년 베를린올림픽 조직위원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는데 그의 나이 50세였다. 그가 스포츠행정가로 최고의 명성을 얻은 때는 바로 1936년 베를린올림픽 사무총장 시기였다. 1916년 베를린올림픽이 전쟁으로 인해 무산 된 이후 1931년 바르셀로나 올림픽회의에서 1936년 베를린이 다시 결정되면서 딤은 독일은 물론 세계스포츠계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1938년 그는 그리스에 올림픽아카데미를 설립하였고, 미국체육아카데미의 책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올림픽아카데미에 대한 딤이 갖고 있던 교육적 가치는 심오하다.

올림픽의 숭고한 정신은 그리스의 맑은 태양 아래서 사람들의 마음에 새겨져야 한다. 이 연구 활동의 주최 기관은 대학이어야 하고, 3개월간의 시간이 소요되며, 세계 각국의 대학생이 올림픽 연구의 가치를 발견하고, 이것을 대학의 과정에 넣는다면 승부를 하는 사람에게도 좋다고 생각한다(김선종, 2004).

1939년에는 1940년 가르미시-파르텐키르헨 동계올림픽 조직위원회 위원장, 1945년부터 1962년까지 베를린대학교 체육과 학교위생연구소 소장이었다. 1949년부터 1953년까지 그는 독일연방내무부 명예임원이었으며 1950년대 말부터 그의 나이 70대 중반에는 미국, 일본, 남아프리카, 이탈리아 등 국제스포츠 교류를 위한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47년부터 1962년까지 15년 동안 독일쾰른체육대학교 총장으로 그리고 1948년 그의 나이 63세에는 쾰른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로 활동하였다. 1955년 그의 나이 70세에 그는 “체육시설 10개년 계획(안)”을 만들었다. 이후 “골든플랜(1960-1974)”으로 정책화되면서 독일국민의 생활체육 활성화를 마련하는 데 획기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 외 집필자로서의 딤은 1903년 21세의 나이로 독일육상경기협회 집필가로, 1906년에는 아테네올림픽의 저널리스트로, 1907년부터 1913년까지 쉐를(Scherl) 신문의 편집자이자 1934년에는 “베를린올림픽 성화봉송”이라는 제목으로 집필하였다. 1920년대 만해도 2천여개의 스포츠 기사와 40권의 책을 출간하는 등 스포츠의 아버지라고 칭해질 만큼 학술 활동이 매우 활발하였다. 스포츠는 물론 신체활동과 관련된 용어개념, 스포츠시설 및 스타디움, 올림픽, 신체교육 및 훈련 방법 등 스포츠계 다양한 소재거리를 글로 담아냈다. 이러한 영향으로 후학들은 스포츠에 대한 이해를 쉽게 도모할 수 있었다. 그는 독일스포츠의 학문과 실습, 사상과 실재를 구축하였고, 무엇보다도 1936년 베를린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했던 장본인이기도 했다(http://www.dosb.de/fileadmin/fm-dsb/arbeitsfelder/wiss-ges/Dateien/CSI-Beitrag-Kr_ger-Jahresmagazin-2004-05.pdf).

또다른 시선

세계2차대전 이후 개최되었던 1950년 독일연방의회에서는 스포츠 내무부장관 고문이었던 딤에 대한 미미한 논쟁이 제기된 바 있었다. 하지만 2000년대에 들어서야 딤에 대한 격렬한 비판이 제기되었는데 기회주의자, 군국주의자, 민족주의자, 인종차별주의자, 유태인 배척주의자 등 나치정권 동안 가장 활발히 활동했던 요주 인물로 낙인 되었다. 1937년부터 1941년까지 발표된 그의 저서에는 (준)군인부대, 광신적 애국자, 그리고 전체주의자를 위한 스포츠계획에 대한 것이었다(Mandell, 1974).

우리는 투쟁의 기쁨을, 극기의 기쁨을, 위험 속에서 기쁨을 갖게 된다면 프랑스와 노르웨이를 정복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자세로 잘 뛰어보도록 하자. 젊은 청년들의 맥박을 측정하자. 우리들은 스포츠를 통해 성장하고 있다…여성들은 잊지 않도록 하자. 스포츠안에서 함께했던 전우들을. 그리고 여성 또한 전투력에 조력할 수 있다(Olympische Flamme, 1942).

평화주의자인 칼-하인츠 클라이버(Karl-Heinz Klaiver)는 1945년 3월 18일 베를린에서 개최되었던 히틀러청년돌격대 2천여명에게 딤은 “지도자들과 국가에 대한 최종 희생”이라는 담화를 발표한 바 있다고 밝혔다(Andreas Jungbauer, 2004). 또한 1933년 이전 “국가적, 군국주의적 스포츠의 통합”이라는 국가사회주의 사상에 가까운 담화를 발표한 흔적을 찾았다고 했다(Krüger, 1997). 타이힐러 교수는 "딤은 나치 시기동안 스포츠의 효과를 강조하였고", 돔스(Dohms) 교수는 딤은 “직업적”으로 나치정부에 깊게 “빠져있었던” 사람, 특히 스포츠의 군사주의적 의미를 강조하였으며, 뷔르쯔부르크 시장 또한 딤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Jungbauer, 2004).

그림 3.

1936년 베를린올림픽 개막 당시 딤(좌측 하단)과 히틀러(중앙 상단)의 모습(Bönish, 2002)

반면 클루게(Kluge)는 딤에 대한 열띤 논쟁에 대해 “민족사회주의 시스템에 포함되어 독일스포츠를 위해 공적을 쌓은 것은 명백하다”라고 밝혔다(Kluge, 2002). 뷔르쯔부르크 스포츠클럽 회장인 프릭(Frick)은 딤에 대한 세 가지 사실 즉, 첫째, 히틀러유겐트 담화문은 청소년들의 나약함, 자살성향 등으로부터 무장하라는 취지에서, 둘째, 스포츠협회와 관계자들은 나치시대에 자기비판을 하기가 매우 어려웠다라는 현실, 셋째, 나치정권 동안 비판을 받기보다 스포츠과학자로 생을 살았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Jungbauer, 2004). 렌아르츠(Lennartz)는 “백색 유대인”으로써 “습관적이지 않게 많은 유대인을 고용”했다고 기술하면서 군국주의 자체 즉 시대적 배경에 대한 비판을 하였고 그리고 “딤은 국가를 위한 것이 무엇인지 그는 항상 고민하고 지지하였다”(Jungbauer, 2004)고 해석하였다. 논란의 중심인 히틀러의 『나의 투쟁』에서 제시된 “강건한 신체”와 딤의 스포츠관이 어느 정도 공통된 이상이 발견되었다고 할 수 있다.

국가에 의한 교육은 모두 그저 단순히 지식을 집어넣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철두철미 육체적으로 건강한 신체를 만드는 것을 주요한 목표로 삼아야 한다(히틀러의 『나의 투쟁』 중)(샤이러, 1981 유승근 옮김, 1993).

논란이 가장 컸던 히틀러청년에게 고했던 담화문에 대해 렌아르츠는 스파르타의 궁정 시인인 티르타이오스(Tyrtaios)의 전투와 명예라는 시에서 “조국을 위한 죽음과 조국을 위한 명예로운 전투는 가장 아름다운 죽음이다”라는 시구를 발췌했다고 밝혔다(Jungbauer, 2004). 이외 파이퍼(Peiffer)는 “딤은 민족사회주의의 공범자다”, 부스(Buss)는 “독재시스템에 스스로 편입”했다는 등 현재까지도 논란의 불씨는 꺼지지 않고 있다. 이러한 논쟁은 사실상 한 인물에 대한 단편적인 평가로 끝나지 않는다. 딤의 고향인 뷔르쯔부르크시는 6개월 동안 딤에 대한 논의를 전개한 후 2003년 10월 2일 칼딤할레(Carl-Diem-Halle) 명칭을 변경하자는 의안이 가결되었다. 이어 2008년 1월, 독일쾰른체육대학 앞의 칼딤백(Carl-Diem-Weg) 또한 암 스포츠파크 뮝거스도르프 (Am Sportpark Müngersdorf)로 변경되는 등 역사적 인물로부터 현실적 문제 해결에 대한 과감한 도전을 확인할 수 있다.

결론

제국 시대, 바이마르제국 시대, 나치시대, 그리고 초창기 독일연방국 시기 등 60여년에 걸쳐 딤은 스포츠행정가, 스포츠교육자 등으로 다방면에서 끊임없는 스포츠발전과 정진을 위해 일생을 보낸 인물이다. 한때 뷔르쯔부르크시는 칼딤체육대회, 칼딤스포츠경기장 등 그의 이름을 반영하여 명예와 공적을 되새기기도 했다. 50여권의 단편집, 3천여개의 논문 등 학술 작업, 그리고 세 번의 올림픽조직위원회의 사무총장을 역임, 독일올림픽아카데미(Deutschen Olympischen Akademie)와 독일올림픽위원회(Olympische Komitee für Deutschland)의 편집위원, 국제육상연맹과 신체운동단과대학의 공동설립자, 독일체육대학교의 창설자, 올림픽 성화봉송의 발굴, 국제올림픽연구소 및 국제올림픽아카데미 창립자, 독일스포츠뱃지 및 독일연방청소년대회 주최자 등 독일 스포츠계에 보여준 성과를 모두 열거하기 조차 쉽지 않다. 무엇보다도 스포츠아버지라는 칭호에 걸맞게 현대스포츠의 개념 확립은 현재까지도 스포츠선진국으로써 출발과 발전 방향을 모색하는데 매우 중요한 단초를 제공하였다. 다만, 정치적·사회적 배경에 의해 스포츠에 대한 변질 된 정의가 발견되나 미국과 영국에서 습득한 학문적 시각은 분명 현재 우리가 배우고 체험하고 있는 스포츠와 동일하다.

하지만, 독일 내 끼친 스포츠의 질적, 양적 발전과는 달리 나치주의자, 군국주의자, 반유태주의자, 인종차별주의자 등 비판의 날 또한 날카롭다. 1980년대 말에 시작된 딤에 대한 논쟁이 특히 1931년 히레체육학교에서 “전쟁은 가장 고귀하고 본질적인 스포츠다”라는 담화문을 통해 점화되었고(Körbs, 1986; Wilke, 2009), 1945년 히틀러청년을 대상으로 한 담화문 “총통과 조국을 위해 마지막 희생” 또한 나치주의 선동의 일환으로 해석되었다.

그러나 딤에 대한 기록사진을 보면 1936년 베를린올림픽을 배경으로 한 모습도 많지만 대부분 학생들과 함께 또는 클럽에서의 운동하는 모습 또한 많이 포착되고 있다. 그만큼 스포츠를 진정으로 아낀다는 느낌이 크다. 이러한 모습은 독일쾰른체육대학교나 올림픽아카데미에서 학생들을 지도할 때 풍기는 학구적이고 학자적 자세로부터 더욱 강한 인상을 주고 있다.

인물사는 개인의 정치적 시각, 주관적 정서 등 총체적인 특성은 물론 세대를 이해하고, 기능적 맥락을 파악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딤에 대한 인물사는 대부분 그의 공훈 그리고 나머지는 비평으로 이루어져 있다. 국내에서의 딤은 상술하였듯이 사실상 공적과 성과에 치중되어 있어 딤에 대한 다각적이고 객관적인 시각을 갖는 데에 한계가 있었다. 이에 본 연구의 목적은 딤에 대한 다양한 방면에서 살펴보는 것이다.

그러나 딤의 인물사 연구를 통해 그 동안 제시되었던 일반적 결과 이외에 몇 가지의 유의미한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첫째, 독일스포츠 발전에 지대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한 인물사에 대한 대대적인 작업과 사회적 공감대 형성이다. 즉 한 인물에 대한 음과 양을 동시에 파악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독일 사회의 포용력을 이해할 수 있다. 독일체육회, 독일체육대학교, 국가올림픽위원회가 공공자금 18만유로(약2억7천만원)의 재정적 투입과 30개월에 걸쳐 칼딤의 전기(傳記) 프로젝트를 수행하였다. 둘째, 체육계 인물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와 학자의 다양한 의견 존중이다. 단, “냉정”과 “엄정”이라는 잣대로 사실을 통찰하는 과정이 필수조건이며, 딤을 둘러싼 논란들은 압축적이면서도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따라서, 이 연구는 딤이라는 한 개인의 양면을 살펴봄과 동시에 학자와 사회의 끊임없는 소통의 중요성 그리고 진정한 스포츠영웅에 대한 철저한 논의 과정의 중요성을 제기하는 데에 가치를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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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1936년 베를린올림픽 개막 당시 딤(좌측 하단)과 히틀러(중앙 상단)의 모습(Bönish,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