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론

올림픽은 종종 개최국 내외의 정치적인 상황과 역학관계, 그리고 민족주의를 반영하고 굴절시키는 일종의 프리즘과 같은 구실을 한다(Cha, 2017). 예컨대 1988 서울 올림픽의 경우 냉전의 벽이 무너지기 직전에 더 춥고 어두웠던 새벽의 상징이자 ‘반쪽짜리 올림픽’이라 불렸던 1980 모스크바,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의 아쉬움을 청산한 대회였다(Kim & Yang, 2014; Min & Hwang, 1996).

그렇다면 이번 2018 평창 동계올림픽 대회는 어떠한 역사적 의의를 지니는가? 남북한과 한반도 주변의 긴장관계를 해소시키는 해빙의 역할을 했다는 국내외의 평가도 지당하다. 반면에, 대회 개최 전후의 남북단일팀 이슈를 함께 떠올리게 된다. 물론 이러한 단일팀 논의와 구성이 역사상 처음은 아니었다. 국외에는 동독과 서독의 수많은 단일팀 구성 사례가 있고, 범위를 한반도 내로 좁힌다 하더라도 많은 숫자의 단일팀 구성 논의가 있었다. 더 나아가 1991년 탁구 세계선수권대회, 같은 해의 세계청소년 축구선수권대회에는 실제 남북단일팀이 성사되어 성공적으로 활동한 기억도 있다.

스포츠는 비정치적인 대중문화의 형상으로 보이기 쉬우나, 실제로는 스포츠와 무관한 정치 영역에서도 정치적 메시지의 전달에 빈번히 사용된다. 이는 스포츠가 독특한 정치적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고, 비합리적 상징조작의 주요한 수단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 중 정치적 상징조작은 정치적 상징을 이용하여 반복적으로 국내외 심리를 자극함으로써, 일정한 의식과 태도를 형성하도록 하는 일종의 심리공작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엘리트 정치집단은 스포츠를 통하여 드러나는 정치적 상징성을 그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이입시키는, 일종의 정치사회화 과정을 형성할 수 있다(Yang, 2010). 남북단일팀 구성 논의와 실현화의 사례도 이와 무관하지는 않다.

지금까지 메가스포츠이벤트에서의 남북단일팀이 정부 및 여당 측에서 제의되고 성사된 총 세 차례의 사례를 정치적 시기로 보면 크게 두 시기로 요약될 수 있는데, 1990~91년의 정치 상황과 2017~18년의 정치 상황이다. 전자의 경우 동구 공산권 몰락에 따른 북한의 위기감과 남한에서는 북방정책이 정치상황을 조성했고, 후자의 경우 북핵 위기에 따른 대화의 모색 국면을 조성하는 것이 정치적 이슈였다. 남북단일화를 제의 및 성사시킨 시대와 주체는 서로 다르나, 두 시대 미디어 텍스트 상에서 보이는 정치적 주체들이 스포츠에서의 남북단일팀 이슈를 어떻게 프레임화하여 국내외 정치 상황에 이용하였는지 비교하면 스포츠와 정치와의 연관성 및 도구화가 더 선명해질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하여 미디어 텍스트 상에서 보인 정치권력과 스포츠의 관계 내지는 역학에 대하여 더 잘 보여주는 것이 본 연구의 의미다.

따라서 본 연구의 목적은 평창 동계올림픽 대회에서 이슈화되었던 ‘남북단일팀’이라는 하나의 스포츠 관련 아이디어가 국내 정치의 구도적 조건과 국면 및 담론의 지형 속에서 특정한 정치적 의제와 사안, 이슈로 부상하여 쟁점화 되는 양상을 역사적 맥락으로 구성하여 비판적으로 해석하는데 있다. 이를 위하여 스포츠와 정치 역학의 관계 내지 담론화에 관한 시각을 정리하고, 나아가 시대가 다른 두 정치적 시기에서 이루어진 스포츠 분야의 ‘남북단일팀’이라는 아이디어가 정부 및 여야의 입장에서 각각 어떠한 논리와 담론으로 구조화되고, 어떤 가치 지향과 성격들로 이야기되었는지를 당시의 미디어 텍스트들을 중심으로 분석하고 논의하고자 한다. 또한 이 과정에서 보이는 정치와 스포츠의 역학 관계가 일종의 회전 무대로 보이는 바, 그에 대한 과정을 미디어 텍스트의 흐름으로 보여주고자 한다.

논의를 위하여 국내에서 발행되어 검색되는 모든 언론 미디어 텍스트를 대상으로 검토했으며, 1990~91년의 해당되는 2,374건 및 2017~18년의 직접 해당되는 875건을 대상으로 분석하였다. 분석은 관련된 미디어 텍스트를 1차적으로 각 시대의 사건별로 범주화하여(예, 1990∼91 남북단일팀 협상, 제4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등) 분류한 뒤, 사안에 대하여 각 언론사별로 입장이 크게 다르지 않게 동일한 목소리를 낸 것을 유의하여 선정하였다.

2017∼18년의 상황이 이전의 활자 중심 미디어 환경에서 다양한 매체 중심의 변화된 환경임을 고려하였으나, 사회의 발전과 변화가 현격한 두 시대를 함께 한 지면 위에 드러내는 것은 매우 조심스럽다. 이러한 미디어 텍스트 중 핵심적인 일부를 직접 인용하여 논의할 것이며, 인용과정에서 연구자의 주관적 견해와 해석을 가급적 배제하고 미디어 텍스트 원문에서 보이는 장면에 충실하도록 노력할 것이다. 따라서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대회에서 이슈화 된 ‘남북단일팀’이라는 현상과 관련하여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별하는 것이 아닌, 현상을 둘러싼 정치적 의미 및 언론 상에 보이는 행간의 복합성과 다층성 등을 잘 보여주고 해석하는데 연구의 의의를 두고자 한다.

스포츠와 정치의 관계에 대한 문제의식

이 장에서는 2018 평창 동계올림픽 대회의 스포츠와 정치 담론의 산물이었던 남북단일팀에 대한 이슈를 논하기 위해, 어떠한 프레임으로 1991년의 남북단일팀 이슈와 2018년의 남북단일팀 이슈로 접근할지에 대하여 정리하고자 한다.

스포츠의 정치사회화 기능

정치적 상징조작의 대상을 물색하는 입장, 정치 엘리트층의 심리공작물로서 스포츠만한 것이 없다. 정치적 상징조작에 의해서 정치권력은 물리적 강제력을 동원하지 않고도 국민의 심리를 자극할 수 있고, 설사 실패한다고 하더라도 그 파급을 최소화하여 스포츠 국면에서 국한시킬 수 있다(Choi, 2008). 스포츠에 잠재된 비합리적 정치적 상징성은 그 내면에 내재된 문화적인 주제를 정치적인 의미로 전환 및 해석하게 만드는 것을 가능케 하며, 이러한 정치권력에 대한 대중의 지지는 스포츠에 내재된 상징에 대한 지지를 매개로 이루어진다(Gu & Kim, 2008; Yang, 1999; Yang, 2010).

스포츠의 문화적 상징성이 특정한 문화적 맥락에 의하는 것과 동일하게, 정치적 상징성 역시 특정한 정치문화적 맥락에 의한다. 따라서 스포츠는 양 방면에서 정치사회화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적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정치사회화 매개체로서의 스포츠는 큰 파급효과를 지닌다. 미디어가 일반적으로 지닌 보수적 성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점이 곧 스포츠를 매개체로 한 정치권력이 원하는 소통의 방향이 된다고 볼 수 있는데(Choi, 2008), 대량성, 동시성, 일방성 등이 그것이다(Seol, 2010). 즉, 엄청난 관객의 숫자와 정보전달의 동시성은 스포츠를 정치적 상징성의 매개체로 사용하고자 하는 큰 유혹이며, 정치권력이 이를 모를 수 없다. 그리고 정치권력의 스포츠를 통한 정치 메시지의 전달은 그 어떠한 매개체를 통한 것보다 강력하다.(Choi, 2008; Kim & Kim, 2016).

스포츠가 가진 오락성과 현장성은 비의도적으로 행해지는 비체계적인 정치사회화 과정을 촉진한다. 의도되어 디자인 된 정치교육 내지는 모종의 정치메시지 전달이 광범위한 대중의 지지와 이해를 구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스포츠는 그 오락성과 현장성, 무의식성에 힘입어서 정치적 메시지가 수용자의 반감을 덜 받게 하며, 더러는 정치적 메시지라는 존재조차 느끼지 못하는 상태에서 정치권력이 원하는 방향으로 의식화되기도 한다. 특히 아동기에 경험한 스포츠에 내재된 잠재적 정치 경험은 기초 사회화과정에서 성인기의 정치정향으로 전이 및 투사되며, 장차 여론형성에 그만한 도구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Yang, 2010).

한편, 공동체 의식 배양이나 정치문화 전달 등도 스포츠의 정치사회화 기능에 속하는데, 특히 공동체 의식의 배양은 주요 골격을 이룬다고 볼 수 있다. 공동체 의식은 피아의 구분이나, 정반대로 공동체 내 소속감 모두 해당되는 개념이다(Kim, 2006). 즉 가상적 공동체의 차별화에는 다양한 동일시 상징들이 이용되기도 하며, 한 개인이 자신을 가상적 공동체로 인식한다는 것은 곧 가상적 공동체 상 동일시의 상징을 공유함을 의미한다(Seol, 2010). 그러므로 개인이 스포츠 행사에 참여하고 관람함으로써 상징을 공유하며, 이로써 자신의 가상적 공동체를 재확인하게 된다(Gu & Kim, 2008; Yang, 2010).

스포츠 교류의 국제정치

정치권력은 비 정치권력을 통제하거나 제한할 수 있다. 이것을 스포츠에 접목할 때, 정치권력은 정책결정에 관계한다고 파악하여 스포츠가 권력 유지의 기능을 수행한다면, 정치권력은 스포츠에 가치를 부여하여 정책으로서의 스포츠의 발전을 지지하고 원조한다(Seol, 2010). 반면 그렇지 않을 경우, 스포츠는 어떠한 형태로서 제한되거나 통제될 수 있다. 요약하면 스포츠는 정치권력과 관계되는 면을 가지고, 정치권력은 스포츠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서 다양한 형태로 스포츠 정책에 관여하게 된다(Lee & Kim, 2006; Yang, 1999; Yoo, 2011).

오늘날 스포츠는 소프트파워를 구성하는 주요인으로 꼽히며, 국가 안팎을 넘나드는 정치사회적 현상으로 부각되었다. 한 국가 단위를 울타리로 볼 때, 스포츠는 국가 내·외부적으로 모두 영향을 주게 된다. 국가 내부적으로는 통합 및 소통의 기제 등으로 기능하나, 외부적으로는 외교적인 자원의 원천이자 상호의존적 교류로서의 의미가 강조된다. 따라서 공식적인 외교관계나 교류가 없는 국가 간에도 정치적으로 큰 부담이 될 수 있는 고위 정치 영역에서의 교류보다는, 비교적 덜 위험하고 효과도 큰 스포츠에서의 교류를 먼저 실행하게 된다. 스포츠 교류는 대결보다는 협력, 갈등보다는 선린 관계의 메시지를 지향하기 때문이다(Seol, 2013; Yoo, 2011).

정치학 관점에서 국가 간 분쟁의 평화적 해결 내지 평화 상태 유지에 관한 방법으로 D. Mitrany의 기능주의적 통합이론을 주목할 수 있다. 비정치적 요인들의 교류와 협력이 선행됨에 따라, 두 체제 간 정치적 통합의 가능성이 점증된다는 것이 그 주요 골자다. 또한 정치 주체들 사이에서 필요에 따라 기능적인 협력이 성사되는 경우, 그 협력은 다른 분야에 파급되어 전체적인 확대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두 체제의 구성단위 간 교류가 발생한 후, 점진적으로 확대되고 나아가 통합에까지 도달한다는 것이다(Lee & Kim, 2006; Yoo, 2011).

따라서 기능주의 이론에 따르면, 두 사회 간에 기능적 상호의존관계에 따라 공동의 이익이 생겨나고, 이 공동의 이익은 두 사회를 불가분의 관계로 만들어 통합 촉진의 가장 큰 요인이 된다. 분단국에 있어서 스포츠 교류가 큰 중요성을 갖게 되는 이유는, 분단의 주요 원인인 이데올로기적 갈등 및 정서적 적대감을 상당 부분 해소하는데 직접적 효과를 제고할 수 있고 나아가 통합을 촉진할 수 있기 때문이다(Seol, 2013; Yang, 2010).

메가 스포츠이벤트의 정치화

스포츠의 영향력과 무게감이 커짐에 따라서 올림픽, 월드컵과 같은 메가 스포츠이벤트는 주요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영향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게 되었다. 스포츠 자체는 정치 및 경제적 이해관계에 중립적이나, 메가 스포츠이벤트는 정치적 상징조작의 대상으로서 정치적인 재생산 과정에 불과한 존재로 인식되기도 한다(Lee & Kim, 2006).

또한 스포츠는 정치권력에게 대내적으로 정치적 상징조작의 수단을 제공함으로써 다양한 정치적 목적에 공헌하고, 대외적으로는 다양한 외교적 목적에 활용될 수 있는 비정치적 유형의 정치적 수단을 제공한다. 즉, 스포츠는 문화적 상품인 동시에 일종의 권력 자원으로, 우리 시대에 하나의 상징적 기호로서 작용하는 것이다(Lee, 2003). 따라서 메가 스포츠이벤트는 그 자체의 규모와 영향력으로 세계 각국이 유치하고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실정이며, 어떠한 내용이나 유형으로든 정치적인 메시지를 필연적으로 담게 된다(Lee & Kim, 2006; Yang, 2010).

스포츠와 스포츠정신에 대한 전통적으로 가장 강력한 유해세력은 ‘정치권력’이다. 대중 민주주의 사회에서 대중이 즐기는 모든 것은 당연하게도 정치권력의 관심사가 된다. 원론적으로 올림픽은 올림픽 헌장 9장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정치적 요소가 배제된 개인경기이지 국가 간의 경기가 아니며, 개최의 주최도 국가가 아닌 개최도시가 주관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올림픽은 실상 국가 간의 국제적 경쟁스포츠이며, 투쟁 스포츠로서의 정치적 속성을 지닌다. 올림픽의 정치도구화 현상은 무력 충돌을 통해 정치적 강화와 보상을 받던 국제정치의 양상이 올림픽과 같은 국제 스포츠무대를 통해서도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Lee & Kim, 2006).

이렇게 스포츠 내 이데올로기적 내용의 침투는 스포츠가 모든 사람이 향유하는 문화로 존재하는 가운데,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침투시켜서 체제적 야망을 실현시킬 수 있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정치와 스포츠는 유사한 기능을 수행하는 측면도 있는데, 정치권력이 공동체를 유지하고 사회통합을 이루는 요소라면, 스포츠 역시 사회통합의 한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Kim, 2004; Kim, 2006).

스포츠 그 자체는 특정한 정치적 목적에 대하여 중립적 존재지만, 정치 엘리트들은 메가 스포츠이벤트를 국가의 일반적 정치적 이익을 위해서든, 자신들의 특수한 분파적 이익을 위해서든 이용할 수 있다. 국가 정책수단으로서 스포츠를 활용하는 것은 스포츠를 정치화하는 전형적 수단이기도 하다(Yang, 2010). 결국 메가 스포츠이벤트는 국가의 주도에 의해 조장되고, 그 성공이 대체로 정치적 지지도 상승으로 직행되며, 나아가 정치권력과 스포츠정책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Lee & Kim, 2006). 이러한 관점에서 중요한 스포츠의 정치적 상징조작에 대한 요건은 메가 스포츠 이벤트에 대한 국가 개입의 정당화 문제다(Park, 2013).

북한의 스포츠 이념과 남북 스포츠 교류의 한계점

그간 남북단일팀을 위한 협의 및 성사, 가시적인 성과 등이 여러 차례 있었음에도, 북한의 스포츠이념 고찰에 따른 남북 스포츠교류의 성과에 대한 회의적 시각도 존재한다. 스포츠 분야의 교류는 가능하지만, 분명한 한계점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정치학의 시각으로 본 스포츠 교류가 정치사회화 기능을 갖는다거나, 또 국제정치에 미치는 기능주의적 이론으로 남북의 단일팀 교류를 보는 시각과는 반대의 입장이다(Lee, 2003).

북한의 스포츠 이념은 혁명 사상 강화 이념, 집단주의 이념, 노동력 증진과 국가 보위 이념, 대중화와 생활화 이념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Kim, 2004). 이 가운데 혁명 사상 강화 이념은 헌법적 체계와 노동당 규약을 통해 기타 모든 영역을 지도하는 이념으로, 당연히 스포츠 영역에서도 지도적 이념이 된다. 따라서, 당과 수령, 또는 지도자의 교시나 체제 수호 이익이 존재하지 않을 때는 스포츠 영역이 활성화될 수 없다(Kim, 2004).

K. Deutch의 교류 이론에 의하면, 우선적으로 비정치적 부분의 교류는 점차로 정치적 부분의 교류로 이어지고, 낮은 단계의 지지가 높은 단계로 나아가는 지지의 확산을 통하여 통합을 달성한다고 본다. 체제가 다른 남북의 교류에서는 수많은 여타 분야보다도 문화교류, 그 중에서도 특히 스포츠 교류가 중심이 된다. 스포츠 교류는 특별한 정치적 이념과 무관하게, 교류 당사자들의 동질성을 증진시키기 좋은 분야이기 때문이다(Kim, 2004; Lee & Kim, 2006).

그러나 지난 세월의 교류 속에서 보인 북한과 스포츠 교류 양상은, 북한 당국이 스포츠 교류를 단순히 문화적이고 비정치적 교류의 장으로 인식하지 않는 사실을 보여준다. 북한의 스포츠 교류를 본질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스포츠 정책과 저변의 구조를 이해해야 하는데, 정치 구조와 이념화가 그 중심이 된다. 요약하여 말하면, 북한의 정치와 체제 구조가 비정치적인 것을 독립적 요소로 인정할 수 있는 시스템이 전혀 아니다. 노동당 규약에서 보이는 의사결정 과정, ‘당-수령(지도자)-인민’의 유기체적 시스템이 그것이다.

단적으로 노동당 규약에서는 “혁명적 사상과 깊은 지식과 건강한 체력은 공산주의적 인간이 반드시 갖춰야 할 풍모이며 자질이다.”라며 체력의 증진과 체육교육이 인민의 사상을 강화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밑거름에 있음을 명확히 하고 있다. 북한의 체육, 스포츠에는 명확한 사명이 주어져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남한에서 북한과 스포츠 교류를 중요시 하는 이유는 정치적 통합을 위한 중요한 교두보라는 사고가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Kim, 2004). 즉 앞서 언급한 기능주의적 논리에 입각한 스포츠 교류를 강조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교류의 전제조건이 되는 체제 개방성과 다원성 정도의 격차가 가장 큰 문제가 되며, 이는 아직까지 극복되지 않고 있는 문제다. 개방 정도와 다원성 정도가 낮은 권위주의적 체제가 비정치 분야의 독립적 교류를 허용하거나 인정하지도 않고, 체제 유지를 위하여 상대와의 교류를 거부하거나 회피할 수 있다는 한계가 명백하다(Ha & Choi, 2014; Kim, 2004; Yang, 2010).

이 시각에서는 과거 1991년의 남북단일팀 교류 후 여러 차례의 시도가 이어졌지만 27년간 중단되었던 이유로, 북한 측의 필요를 충족시키지 못한 것에 있다고 본다. 기능주의 이론에서 교류의 전제는 이익과 합리성에 있는데, 북한에서의 스포츠는 정치 사상적으로 독립적이지 않고 남북단일팀 등의 교류가 체제 유지에 크게 이익이 되는 부분도 아니라는 인식이 있었던 것으로 평가된다(Kim, 2004; Lee & Kim, 2006). 따라서 그들의 입장에서는, 스포츠 교류가 민간 영역에서 자유롭게 다룰 부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살핀 바, 스포츠에는 정치사회화 기능이 있으며 기능주의에 따른 통합화로 국제정치적인 이슈화가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비교적 파급효과가 큰 메가 스포츠이벤트가 정치화 되는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반면, 북한의 스포츠 이념을 살펴볼 때 남북 스포츠 교류에는 분명한 한계점이 있다는 인식도 존재한다. 이러한 정치와 스포츠의 관계를 보는 프레임으로. 남북단일팀이라는 현상을 논하고자 한다.

1990~1991년 기사 분석:정치 지형 및 남북단일팀 이슈

시 남북단일팀을 정책적 목표를 했던 체육계를 둘러싼 정치 지형을 살펴보기 위하여, 1990년 아시안게임1) 단일팀 협상 결렬을 우선적으로 논할 필요가 있다.

1990년 남북단일팀 협상 결렬과 국내 정치 지형

노태우 정권에 와서 바뀐 기조, 북방정책2)의 최종 목적지는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통한 평화통일 구축이었다. 이 과정에서 서울올림픽이 진행 중이던 1988년 10월 7일에 정부가 ‘대북한 경제개방 7개조치’를 발표한다. 나아가 국제정세가 사회주의세력의 개혁과 개방이 대세임을 재빠르게 확인했던 정부는 북방외교를 더 강력하게 추진하기 시작한다.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 준비 즈음 구 동구권 공산정권들이 급격히 몰락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남북단일팀에 대한 국민적인 여론이나 기대감이 높은 상태였다. 따라서 노태우 정권에서 추진한 북방정책의 정점이자 최종 목적지였던 북한과의 관계 개선은 여야를 막론하고 한 목소리로 찬성하면서, 반드시 이루어야 할 과제로 여겨졌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1990년 북경 아시안게임 단일팀 구성 협상은 실패했다.

국제 정세의 변화와 남북단일팀의 탄생

해빙 분위기 조성을 위하여 남한과 북한의 정치엘리트가 택했던 카드는 역시나 정치권력이 으레 스포츠를 무대로 택하는 그것과 동일했다. 그리고 정치권력이 그렇게 마음을 먹은 이상, 1990년 북경 아시안게임을 위한 협상이 그 해 초에 실패했던 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던 듯하다. 남북단일팀 구성을 위한 협상 제의가 얼마 지나지 않아 북으로부터 들어왔고, 절호의 기회를 기다리던 남한은 바로 협상에 응하게 된다.

<북한, 남북 단일대표팀 제의> 북한올림픽위원회 김유순 위원장은 18일 성명을 발표, 제11차 북경아시아경기대회 기간 중 남북 올림픽 관계자들의 접촉을 통해 내년에 일본에서 열리는 제41차 세계탁구선수권대회와 92년 바르셀로나에서 개최되는 제25차 올림픽대회의 남북단일팀 구성문제를 협의할 것을 제의했다. 김은 이날 북한선수단이 북경으로 떠나는 것과 때를 같이해 발표한 이 성명에서 앞으로 있게 될 국제대회의 남북단일팀 구성과 함께 북경 아시아경기대회에서 남북한 선수들이 다른 국가와 경기할 때 공동으로 응원하는 문제도 협의할 것을 제의하면서 “이러한 문제들이 실현되면 북남회담 분위기, 통일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키고 통일문제에 훌륭한 기여를 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한 것으로 북한 방송들이 보도했다. (The Kyunghyang Shinmun, 1990a)

당시 기사들을 들여다보면, 사상 첫 남북단일팀 구성을 위한 협상은 탁구 등 종목으로 논의가 시작되었으며 남북한 간 교류전까지 논의하였다.

<체육교류는 통일지름길 공감대> 23일 열린 북경 남북체육장관회담은 분단 45년 만에 처음으로 이뤄진 남북한체육최고책임자의 만남이란 점에서 관심을 모았다. (중략) 이와 함께 체육교류가 남북통일과 교류의 지름길이라는 두 장관의 공동인식과 이를 기초로 한 체육회담 재개결정은 남북대화와 교류의 또 다른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평가를 받고 있다. 게다가 91년 일본에서 예정된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세계육상선수권대회와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단일팀 구성 필요성에 대한 인식의 일치는 재개될 남북체육회담의 장래에 청신호를 던졌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은 것으로 분석된다. (The Kyunghyang Shinmun, 1990b)

1988년에 서울올림픽 대회를 유치하여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던 당시의 남한은 이제 북한보다 확실히 우세하다는 것이 대내외의 평이었다. 그러나 스포츠 분야에서의 기량은 종목에 따라 북한의 선수들이 더 낫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국력의 차이도 현재의 그것보다는 훨씬 작았다. 따라서 남북한 단일팀을 구성하는데 ‘우리가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해야 하는가?’라는 2018년 이슈와 같은 여론은 거의 확인되고 있지 않으며, 미디어 텍스트 상에서도 잘 보이지 않았다. 당시 여론에 비쳐지는 북한과 관계 개선의 최종 목적지는 위협의 제거가 아닌, 통일이었다. 남북 체육장관회담이 성공적으로 마무리 된 시점에 국제탁구연맹의 적극적인 협력과 중재로, 밝아진 스포츠계의 ‘해빙 분위기’에 ‘현실화’라는 추진 동력이 더해진다.

그리고 마침내 1991년에 있을 국제대회에서의 남북 단일팀 구성이 합의된다.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 있을 남북단일팀의 구성을 놓고, 단가와 국기 등 여러 가지 논의를 수차례에 걸쳐 협의하였다. 이전에는 국가의 자존심을 놓고 양보 없이 대결하였던 수많은 것들이, 양측 정치엘리트들이 양보와 타협을 전제로 협의를 시작하자 거짓말처럼 빠르게 진전되었다.

<남북 단일팀 구성 합의: 세계 탁구, 청소년 축구대회> 남북 분단 46년, 남북체육회담이 시작된지 28년 만에 남북한이 단일팀을 구성해 국제대회에 나가게 됐다. 12일 판문점 우리 측 지역인 평화의 집에서 열린 제4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4월, 일본) 등의 단일팀구성을 위한 제4차 남북 체육회담에서 남북 양측은 세계탁구대회와 제6회 세계청소년축구대회(6월, 포르투갈) 단일팀 구성에 완전합의, 남북 화해의 새로운 전기를 만들었다. 이날 우리 측 장충식 수석대표는 그동안 쟁점이 되어왔던 선수훈련, 선수단 단장 선임 문제에 대해 북측 안을 전폭수용, 완전합의를 이끌어 냈다. 선수훈련의 경우 우리 측은 그동안 남북을 왕래하며 합동훈련을 갖자고 제의했었으나 이날 이를 철회, 남북에서 각기 훈련한 뒤 대회개최지인 일본에서 합동훈련을 갖자는 북측 안에 동의했다. 선수단 단장의 경우 탁구는 북측이 맡고 축구는 남쪽이 단장직을 맡기로 했다. (Maeil Business Newspaper, 1991a)

당시 정권의 외교정책의 기조였던 북방정책이 스포츠 분야에서 현실화됨에 따라, ‘스포츠 통일’이라는 용어도 미디어 텍스트 상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여당과 야당을 막론하고 남북단일팀과 북한과의 관계 개선에 반대하는 여론은 딱히 관찰되지 않았다.

<스포츠 통일> (전략) 그동안 수없이 많은 체육회담을 거치면서 단일팀구성에 관한 원칙에는 합의하면서도 양측이 세부절차에서 번번이 마찰을 빚어 무산되는 것을 지켜본 우리로서는 이번의 극적인 회담성공에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다. (중략) 물론 사안이 스포츠에 국한돼 단순한 측면도 있지만 양측이 서로 자기주장을 대폭 양보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었다는 점에서 남과 북이 한민족으로 어떻게 만나야 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중략) 국민들은 통일조국을 향해 더욱 벅차고 눈물겨운 마음으로 이번 회담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Maeil Business Newspaper, 1991b)

남북단일팀으로서의 첫 여정을 시작했던 여자 코리아 탁구팀은 당시 세계 최강이던 중국을 누르고 우승을 했다. 이전에는 언론 상에서라도 남북한 모두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을 관철시키는 것이 주였다면, 이 시점에서는 유독 유연하고 긍정적인 표현으로 일관하고 있다.

<하나된 남북 세계 정상 서다> 코리아팀은 29일 일본 지바의 닛폰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제4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여자단체전 결승에서 9연패에 도전하는 중국을 3시간 40여분의 접전 끝에 3대 2로 꺾고 우승했다. 남북이 이 대회 단체전에서 우승한 것은 지난 73년의 사라예보대회(유고)에서 한국여자팀이 우승한 이래 18년만이다. 이날 코리아팀은 북의 유순복이 첫째와 마지막 단식을, 남의 현정화가 둘째 단식을 따냈다. 특히 유순복이 첫 단식에서 예상을 뒤엎고 중국의 에이스 덩야핑을 2대 1로 잡아준 것이 우승의 밑거름이 되었다. (The Dong-A Ilbo, 1991a)

아주 작은 분량의 일부 기사만으로도, 단일 종목의 세계선수권이었음에 불구하고 사회에 미치는 파장이 작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미디어 텍스트 상에서 보이는 정치엘리트는 여야를 막론하고 세계탁구선수권대회의 우승이 민족의 축제로 받아들였고, 사회 분위기가 상당히 고무되었다.

<‘통일로 가는 이정표’ 노 대통령 등 축전> 노태우 대통령은 29일 오후 제4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여자단체전에서 ‘코리아’ 선수단이 우승한데 대해 “남북한 단일팀이 세계를 제패한 것은 7천만 겨레의 큰 기쁨이며 남북한 민족이 화합을 이뤄 통일의 길로 나아가는데 빛나는 이정표를 세운 것”이라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이번 성과를 바탕으로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남북한 단일팀 출전이 이뤄지기를 온 국민과 함께 기대한다.”고 말했다. 김영삼 민자당 대표최고위원은 축전에서 “우리 선수단의 쾌거는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세계인 앞에 드높인 것”이라고 격려했다. 김대중 신민당 총재도 축전을 보내 “이번 우승은 남북한 간의 화합과 교류를 증진시키는 역사적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The Hankyoreh, 1991a)

곧 이어진 두 번째 남북단일팀은 앞서 언급했던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한 코리아팀이었다. 이를 위하여 남북은 미리 서울과 평양을 오가는 치밀한 평가전을 통해 실력 검증을 통한 대표팀 구성을 합의하여 진행했다. 뒤에서 언급할 2018년의 남북단일팀 구성과정에 아쉬움을 남기는 대목과 완전히 상반되는 예다.

<북쪽 개인기량, 남쪽 국제경험 ‘접목’, 청소년축구 세계8강 노린다.> -남북 가르지 않고 선수 섞어 2차례 평가전- (전략) 남과 북을 나누지 않고 평가전에 출전한 양쪽 18명씩 36명의 선수를 섞어서 두 팀으로 편성, 경기를 치른다. 이번 경기는 단일팀인 ‘코리아’를 구성하기 위한 평가전이기 때문에 어느 팀이 이기고 지느냐가 결코 문제가 될 수는 없지만 개인기량이나 전력에서 북쪽이 단연 우세한 편이다. 따라서 남북이 똑같이 9명씩 대표선수단을 구성하지만 본 대회에 출전할 ‘베스트 11’은 7대 3의 비율로 북쪽 선수들이 참가할 것으로 보인다. (후략) (The Hankyoreh, 1991b)

한편, 성공적으로 구성되어 마쳤던 세계탁구선수권에서 활약한 최초의 남북한 단일 대표팀인 코리아 탁구팀의 존속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보였다. 세계탁구선수권 대회가 종료된 후 이렇다 할 기약을 하지 못하고 해단 되었고, 남북 체육회담도 지지부진하게 되었다.

<코리아 탁구팀 그대로 존속할 것인가: 지바세탁 뒤 기약없는 이별> (전략) 김창제 총감독 등 탁구협회 관계자들도 헤어지는 자리에서 앞으로 모든 국제대회에 단일팀으로 출전토록하자고 북측 탁구인들에게 거듭 당부하면서 남북이 단독으로 출전하게 될 바에는 차라리 대회출전을 포기하자고 다짐했었다. 현재 남북한 탁구인들은 한 달 동안의 전지훈련과 세계대회 참가를 통해 화합과 동료애로 굳게 다져져있어 서로 예전으로 돌아가 동포가 다시 적으로 돌변하고 대결하는 상황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다는 분위기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코리아 탁구팀이 앞으로도 계속 존속할지 여부는 양측 탁구인들의 바람만으로 결정될 수 없는 성질의 문제로 일반적인 남북관계 등 외적인 변수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쉽게 예측할 수 없는 형편이다. 하지만 남북 탁구인들은 한결같이 단일팀 출전을 강력히 희망하고 있고 또 세계대회에 출전했던 코리아가 다른 국제대회에 각각 단독으로 출전, 대결할 경우 전 세계의 이목도 무시할 수 없어 종전으로 환원되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밝은 전망도 나오고 있다. 북측이 원하는 한 언제든지 공동으로 출전한다는 확고한 입장을 갖고 있는 남측.. (후략) (The Chosun Ilbo, 1991)

여러 미디어 텍스트를 종합적으로 볼 때, 스포츠 분야에서의 남북단일팀으로 대화에 물꼬를 트는데 성공했던 정부는, 이것을 스포츠 전 영역에 확대하기를 희망했던 것이 확실해 보인다. 다만 정치 외 민간차원에서의 교류에는 다소 소극적이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남북단일팀 추진 관련부처 냉담> 대한배구협회는 오는 12월 문화방송 주관으로 남한을 포함, 북한, 일본, 중국 등 4개국이 참가하는 친선배구대회를 연다는 전제로 남북 단일팀을 추진 중이나 통일원과 체육청소년부에선 ‘나 몰라라’하고 있어 불만을 보이고 있다. (중략) 이에 대해 주위에선 일본 세계탁구선수권과 청소년 축구의 단일팀 구성으로 남북교류에 기대 이상의 효과를 본 정부가 더 이상 민간교류에는 관심이 없는 것 아니냐고 꼬집었다. (The Hankyoreh, 1991c)

포르투갈에서 있었던 제6회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에 참가하여 8강에 올랐던 코리아 축구선수단은 평양체육관에서 해단식을 가졌다. 그 뒤 육로를 통하여 판문점을 통하여 남쪽으로 복귀하는 평화의 개선 행진을 전 국민에게 선보였다. 다만 이 이후에 진전이 없었고, 체육회담은 북한의 이창수가 남한으로 귀순한 1991년 8월 이후에는 무기한 중단되게 된다.

<청소년 축구도 갈라질 위기> 지난 6월 단일팀으로 세계 본선에 나갔던 남북 선수들이 다시 갈려져 내년 10월 아랍에미리트연합에서 열릴 아시아 본선티켓 2장을 놓고 싸우게 된 것. 또 현재 진행 중인 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아시아지역 예선에서도 남북 대결 가능성은 없지 않다. (중략) 탁구와 청소년축구에서 단일팀을 구성했던 남북한이 다시 대결구도에 들어선 것은 남북 양측이 뚜렷한 이유 없이 체육회담을 미루고 있기 때문. (The Dong-A Ilbo, 1991b)

뚜렷한 돌파구를 찾지 못했던 정부는 1993년에 있을 세계 탁구선수권 대회를 남북 공동개최로 도전할 것을 시사했다. 당시 쏟아진 수백 건의 기사를 통해서 보이는 유치 가능성은 다소 확실해 보였으나, 이것이 무산된 뒤 허탈함을 토로한 기사가 많다.

<93년 세탁 유치 무산: 체육부, 탁구협회 안이한 대처> (전략) 유치 실패는 당초 정부와 협회가 계획 없이 단독 유치를 결정한 뒤 남북 공동개최로 선회하고 북의 남북 체육회담 연기에 대처하지 못함으로써 빚어진 것. (중략) 이때 체육부와 탁구협회는 북측과의 접촉에서 공동개최에 따른 어떤 언질도 받지 못했고 막연히 북도 합작의 원칙에 따라 공동개최에 동의할 것으로 예상했다. (중략) 정부와 협회는 오기무라 회장이 8월 초 평양을 방문, 김유순 국가체육위원회위원장을 만나 공동개최의사가 없음을 감지하고 이를 통보해줬으나 단독개최 등 아무런 대비책을 마련치 않았다. (The Dong-A Ilbo, 1991c)

북방외교정책의 스포츠에 대한 파장과 한계

당시 정부의 외교적 역량이 북방정책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고, 따라서 정부의 지위를 강화시켜주는 효과 또한 분명했다. 다만 한계점도 분명했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데, 공산권 국가와 관계 개선에는 크게 성공하였으나 북한과 관계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키는데 한계를 보인 점이다. 또한 북방정책이 공산권 국가와 관계 개선이라는 정치적 목적만이 강조되고, 정책추진과 집행 과정에서 스포츠와 외교실무 당사자들의 참여가 배제된 채 집권 정치엘리트층에 의해 정치적으로 주도되었다는 점도 들 수 있다. 이것은 후속 정권에 정책 미 계승 및 단절이라는 결과로 귀결되었다.

당시 체육 주무부처의 수장의 인터뷰도 아울러 소개한다. 다만 그는 원래부터 체육계에 몸담은 인물이 아닌 만큼, 스포츠를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 통로로 보는 시각이 분명히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인터뷰 박철언 체육청소년장관: 북방정책의 실세> (전략) “올림픽 남북단일팀 구성은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는게 나의 소신입니다. 이를 위해 지난 7월 23일 북측에 체육회담을 제의해 놓고 있으며 북측에서도 이 문제와 관련해 이미 작년 체육회담에서 원칙적인 합의를 한 상황이고 또 긍정적인 의사를 보이고 있어 실현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중략) 통일의 한 방안으로 스포츠교류는 정치적 이념과 사회제도의 차이에 관계없이 서로 이해와 협력을 해 나가는데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이라고 봅니다. (중략) “현재 금강산과 설악산을 연결하는 관광특구 조성 문제를 놓고 남북 간의 대화가 조용히 진행 중입니다. 이것이 실현되면 북한은 부족한 외화수입을 늘릴 수 있고 우리는 북한의 개방과 변화를 유도할 수 있게 됩니다.” (중략) “93년 2월 말, 노태우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기 전까지는 남북정상회담을 실현시켜 한반도에 화해와 협력의 시대를 열고 99년까지는 통일을 이뤄야한다고 봅니다.” (The Kyunghyang Shinmun, 1991)

위 과정에서 보이는 정치엘리트의 결속, 그리고 이듬해 대통령 선거 과정의 미디어 텍스트 상에서 보이는 모습은 당시 정치엘리트층의 주요 관심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이후에는 이렇다 할 체육회담, 스포츠 분야에서의 남북관계 개선, 단일팀 협상 등 소식이 없다. 일련의 목적을 달성한 정치엘리트는 더 이상 스포츠 분야에서의 양보와 타협을 보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2017~2018년 기사 분석:정치 지형 및 남북단일팀 이슈

국내 정치 지형과 사회적 분위기

평창 동계올림픽 대회 유치 후 개최까지의 준비과정에 있어서 가장 큰 변수 중 하나는, 최근에 있었던 북한의 핵 개발과 미사일 실험이었다. 북미간 대립으로 전 세계의 이목이 한반도에 집중되었고, 그 집중된 이목의 상당한 부분이 긍정적 평가보다는 우려와 불신의 시선이었다. 2017년 5월에 정권이 교체된 후, 지속적으로 이 부분을 해결하려는 노력이 있었으며 현재도 계속 진행 중이다. 다만 정치와 외교에서의 냉정한 현실과는 달리, 올림픽에 관해서는 북한의 태도가 다소 유보적이었다.

그간 평창 동계올림픽 개최 자체를 외면하다시피 일관했던 북한이 장웅 북한 IOC 위원의 입을 빌어 “스포츠와 정치는 별개”라며 전향적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고 그것이 하나의 시발점이 되었다. 또한 북한의 평창 동계올림픽 참여를 검토하고, 마침내 남북한 고위 관계자 회의를 통하여 대규모 방문단을 파견하기로 합의했던 것이다(Lee, 2017).

이 맥락에서 볼 때, 평창 동계올림픽의 남북한 화해의 분위기 조성과 그 뒤에 이어진 평화를 위한 남북 정상회담, 북미 정상회담 등은 스포츠 외교의 관점에서 보면 상당히 고무적인 사건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를 두고 정치권의 설전과 날이 선 공방이 연이어 이어졌다. 과거1991년 상황에서는 이런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고, 국민들도 남북단일팀 협상에 우호적이던 점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모습이다.

<남북단일팀 구성은 이명박 정부 평창 특별법에 명문화 돼 있는 것> 노웅래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평창 올림픽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 구성은 이명박 정부 때 만든 평창 특별법에 명문화 돼 있는 것” (중략) “올림픽을 국내 정치적 정략적 정파적으로 이용해서는 안 된다.”며 안타까움을 토로했습니다. 다만, “북한이 갑자기 올림픽에 참여한다고 하는게 우리 올림픽 무대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하는 거 아니냐. 이걸 경계할 수는 있고, 또 우리 여자 아이스하키 선수들이 열심히 연습했는데 출전기회가 제한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선수들이 느낄 상대적 박탈감이란 부분에서 아쉬움은 있다”고 말했습니다. (Buddhist Broadcasting System, 2018)

위 기사에서 볼 수 있듯, 2011년에 2018 평창 동계올림픽 대회를 유치했던 시점에 정부에서는 과거의 1991년 남북단일팀 구성 사례를 염두에 두었던 듯하다. 따라서 평창 대회 지원 특별법에 단일팀 구성을 할 수 있도록 명문화 하였는데, 2017년 북핵 위기가 강하게 고조됨에 따라 반북한 정서가 강해졌다. 이에 힘입어, 2011년에 특별 법안을 발의하여 만들었던 당시 집권 정당이자 2018년의 야당이 자신들이 과거에 만든 법안 프레임을 공격하는 아이러니한 형국이 만들어졌다. 여기에 여자 아이스하키 대표팀의 엔트리 구성에 대한 문제가 불거졌으며, 1991년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전개되었다.

<평창 동계올림픽 ‘남북 여자아이스하키 단일팀’ 논란 확산: 靑, "北 참가는 올림픽 성공 기여할 것"> (전략) 이 선수는 "아예 벤치에 들어가지도 못하는 선수가 생길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선수들이 이 상황을 기분 좋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생각하시는지"라고 말했다. 이는 이낙연 국무총리 발언을 정면으로 비판한 것이다. (중략) 남북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을 둘러싸고 논란을 반복하자 청와대가 직접 진화에 나섰다. (중략) 윤 수석은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 구성을 놓고 그동안 땀과 눈물을 쏟으며 훈련에 매진해왔던 우리 선수들 일부라도 출전 기회가 줄어드는 것은 아닐까 우려하는 것도 당연하다"며, "문재인 정부는 우리 선수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미칠 부정적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최선을 다 하겠다."고 강조했다. 이와 함께 "이 같은 우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평창 올림픽을 반드시 성공시켜야 하고, 북한의 올림픽 참가는 평창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르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자신했다. (Newshankuk, 2018)

평창 동계올림픽 대회 개최를 전으로 야당과 여당이 바뀌었고, 이것이 곧 입장의 차이에 반영되었다. 미디어 텍스트 상에서 보이는 정치엘리트층의 태도도 무관하지 않다. 즉 여당과 야당이라는 입장보다도, 남북단일팀이라는 스포츠 이슈를 자신들이 처한 상황이나 정세에 이용하는 측면이 더 크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는 1990년대에도 그러했고 그 이전에도 동일했다. 이번 2018년 초에 불거졌던 남북단일팀 문제도 무관치 않다.

<평창 남북단일팀, 과연 공정한가?> (전략) 이낙연 국무총리는 여자 아이스하키팀에 대해 “메달권에 있는 팀도 아니다.”고 말했는데요, 20∼30대 젊은 층의 반발이 큽니다. 지난해 대통령 탄핵의 계기가 됐던 게 개인적인 인연이 판치고 공정함이 사라졌다는 점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북한이 한 달도 남지 않은 올림픽에 들어오면서 단일팀을 구성하고 태극기를 사용하지 못한다면 그동안 고생한 우리는 뭐냐? 그게 공정하냐?"는 물음이 들어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Catholic Pyeonghwa Broadcasting Cooperation, 2018)

앞서 살펴본 1991년의 단기와 단가, 단일 대표팀의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이것을 협의하고 타결했던 주체가 어느 입장이었는지를 이해하면 2018년에 불거진 남북단일팀 이슈가 더욱 선명하게 보인다. 물론 27년여 흐르면서 협상의 주체와 입장은 바뀌었다. 누가, 또는 무엇이 옳고 그르냐의 문제를 논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정치엘리트들의 스포츠에 대한 파장과 정치 메시지화, 그리고 국민들의 남북단일팀에 대한 이전과 확연히 다른 태도는 분명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2018 평창 동계올림픽 남북단일팀 구성의 명암

그간 북한과의 단일 대표팀 구성에 대한 남북한의 협의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남북단일팀의 구성을 위한 협의를 장장 3년에 걸쳐 네 차례나 진행했지만, 북한이 끝내 IOC의 수정안을 거부하고 올림픽에도 불참했었다. 평창 동계올림픽 대회 이전의 남북단일팀은 앞서 언급하였듯이 1991년에 이루어진 두 번의 사례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앞서 살펴본바와 같이 1990년대 들어 남북한 화해 무드가 조성되면서 남북한이 수차례에 걸친 만남 끝에, 1991년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및 같은 해에 있었던 세계청소년축구대회에 남북 단일팀인 ‘코리아팀’으로 출전했다. 이후 남북한은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에 남북단일팀 구성을 다시 시도했지만, 경기단체의 반대에 부딪혀 포기했던 사례도 있다. 평창 동계 올림픽의 경우도 북한의 대규모 방문단 파견이 결정된 순간부터 남북단일팀 구성에 대한 각계의 의견이 쏟아졌다.

평창 동계올림픽의 남북단일팀 구성을 두고 보도되었던 언론의 시각에서는, 앞에서 살펴본 1990~1991년의 언론에서 보이는 상황과 비슷하거나 반대로 눈에 띄게 달라진 점이 있다. 먼저 비슷한 점은, 여야의 이념이 바뀌었음에도 정치가 스포츠에 가했던 파장의 유형은 본질적으로 동일했다는 것이다. 1990년대 초와 이념을 달리하는 2018년의 여당도 평창 동계올림픽이라는 메가 스포츠이벤트로 국내외에 평화의 메시지를 던져서 긍정적 분위기 조성을 위한 절호의 기회로 판단했던 듯하다.

반면 과거에는 보이지 않았던 계층의 모습도 비춰졌는데, 바로 남북단일팀의 급작스러운 구성으로 인하여 당황하였던 스포츠 분야 당사자들의 목소리다. 선수층과 관련된 코치진 등이 해당한다. 과거 1990년대 초 언론의 기사에서는 이러한 보도 자체를 찾기가 힘들었다. 설사 목소리를 냈다 하더라도 시대 및 사회상을 고려할 때 크게 보도가 되기는 쉽지 않았을 수도 있다.

노태강 문화체육관광부 제2차관은 12일 “지난 9일 남북 고위급 회담에서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 구성과 개회식 공동 입장 등을 포함해 북한에 여러 가지 제안을 해놓았다.”고 말했다. 당시 정부는 고위급 회담이 끝난 뒤 3개항의 공동 보도문을 발표했지만, 단일팀 구성 방안은 포함되지 않았다. (JoongAng Ilbo, 2018b)

당시 주무부서 차관에 따르면 올림픽 약 2달 전까지 남북단일팀에 관련한 사안을 급히 제안만 했을 뿐, 구성 방안이 확정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단일팀 구성은 논란의 중심이 되어, 올림픽까지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상황에서 많은 혼선이 발생했다. 먼저 대한민국(당시 세계랭킹 22위)은 개최국 자격으로 출전이 확정되었으나, 북한(당시 세계랭킹 25위)은 자체 출전권이 없었다. 만일 북한의 선수단이 합류를 하게 된다면, 이미 국가대표에 선발되어 출전 준비를 마친 선수들이 탈락하게 되는 역차별이 발생하게 된다. 여자 아이스하키 대표팀이 자국 내 실업팀이 전무한 상황에서 오직 일 6만원의 국가대표 수당만을 받으며 올림픽을 준비해왔다는 문제도 불거졌다. 결정적으로 온 정치권과 국민이 환영했던 1991년 단일팀 구성과는 달리, 남한 국민의 반응이 싸늘했다.

가장 큰 문제는 정작 당사자인 우리 선수들은 공식 채널 통해 어떤 입장도 전달 못 받았다는 점이다. 이날 미국 미네소타 전지훈련을 마치고 귀국한 한수진은 중앙일보와 전화통화에서 “전지훈련에서 막 도착해서 처음 듣는 이야기다. 적게는 5년 많게는 10년 이상 평창올림픽만 바라보고 운동해온 선수들의 노력이 헛되어 지는 것 같아 아쉽다.”고 말했다. 지난해 6월 문재인 대통령이 남북 여자아이스하키 단일팀 언급했지만 강한 반대 여론에 부딪혔다. 당시 중앙일보가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단일팀 구성에 반대한다.’는 쪽이 95%(1649명 중 1562명)였다. ‘빙판 위 작은 통일’은 의미 있는 일이고, 현재 IOC의 의지와 분위기를 고려하면 단일팀을 무조건 반대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익명을 요청한 한 아이스하키 관계자는 “자칫 ‘정치 쇼’에 우리 선수들이 피해를 보는 역차별은 막아야 한다. 단일팀이 구성될 경우 주체는 정치인이 아니라 선수들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1991년 일본 지바 세계탁구선수권에서 남북단일팀으로 참가했던 현정화 감독도 “무조건 이렇게 하라는 식의 단일팀은 안 된다. 선수들과 충분한 대화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JoongAng Ilbo, 2018b.)

이와 같이 평창 동계올림픽에 참가를 한 달도 채 앞두지 않은 국가대표팀 선수단의 사기저하에 대해서도 심각한 우려가 제기되었다. 또한 과거 1990년대 초와는 달리, 아예 단일팀 구성이 아닌 출전 기회 자체를 걱정해야하는 국가대표 선수들에 대한 언론의 보도도 쏟아졌고, 이에 대한 국민의 우려와 정부 및 여당에 대한 비판도 많았다. 기본적으로 집권 정권이 진보 성향으로서 인권을 중시하는 이미지의 정책이 많음에도, 정치적 목적 달성을 위하여 선수들 인권을 돌보지 않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인다는 비판도 있었다.

평창올림픽 하나만 보면서 힘들게 외길을 걸어온 김규은-감강찬 조에게 최근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최문순 강원도지사가 “피겨 남녀 싱글과 아이스댄스 세 종목에는 한국 선수를, 페어에는 북한 선수 염대옥(19)-김주식(26) 조를 출전시키자.”고 의견을 낸 것이다. 이렇게 되면 김규은-감강찬 조는 평창올림픽에 출전하지 못할 수도 있다. 김규은은 “한국에 페어 조가 있는지도 모르는 현실이 너무 슬펐다. 우리가 지난 2년간 올림픽만 바라보며 노력한 걸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호소했다. (JoongAng Ilbo, 2018a)

이에 IOC가 북한 선수단의 평창 동계올림픽 대회 등록 마감 시한을 연장하겠다는 발표를 했고, 북한이 동계올림픽에 아이스하키의 남북단일팀을 제외하고는 기타 종목들에 독자적으로 참가를 신청했다(Yonhapews, 2018). 그러나 대회 개막까지 얼마 시일이 남지 않은 가운데 선수단 및 체육계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너무나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평창 동계올림픽의 남북 단일팀은 구성부터 경기 후에도 많은 논란이 일었다. 1991년 단일팀이었던 현정화의 입장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2018 여자아이스하키 & 1991 탁구 남북 단일팀의 차이는?> (전략) 아이스하키 대표팀 엄수연은 “아이스하키를 원래 모르셨던 분들이 통일 하나만으로 갑자기 아이스하키를 생각하고 저희를 이용하는 것 같은데, 지금 땀 흘리고 힘들게 운동하는 선수들 생각을 한 번만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호소했다. 대표팀 이민지는 “선수에게는 게임을 뛰는 1분 1초가 소중한데, 단 몇 분이라도 희생하는 게 어떻게 기회 박탈이 아니라고 생각하느냐.”라며 이낙연 국무총리의 발언에 반박했다. (중략) 현정화가 “당시 여자복식과 혼합복식에 5개조가 모두 출전했기 때문에 선수들로선 큰 불만이 없었고, 팀워크도 나쁘지 않았다.”고 회상한 1991년 탁구의 경우와는 다르다는 결론이다. (중략)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 현정화의 말대로 ‘선수들이 큰 불만이 없거나’ 혹은 ‘팀워크가 좋다면’ 그들에게 큰 응원과 박수를 보내줄 수 있을 것이다. (Sporbiz, 2018)

또한 이 과정에서 국무총리와 청와대의 대국민 발표도 있었고, 국무총리의 실언으로 인한 사과 발표도 있는 등 혼란이 이어졌다. 정치를 위하여 스포츠를 희생시킨다는 체육계의 불만도 표출되었으며, 무엇보다도 어려운 여건에서 노력하여 국가대표로 발탁된 여자아이스하키 선수진의 혼란이 이어졌다. 특히 캐나다인으로서 국가대표팀의 감독인 새러 머리는 여러 차례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하여 불만사항을 표하였다.

새러 머리(30·캐나다) 한국 여자아이스하키 대표팀 감독이 정부가 추진 중인 남북한 여자아이스하키 단일팀 구성에 대해 입을 열었다. (중략) “우리 선수들이 노력과 실력으로 따낸 자리다. 이 상황에서 북한 선수를 추가할 경우 우리 선수들의 박탈감이 클 것”이라며 “올림픽이 이렇게 임박한 시점에서 단일팀 이야기가 나온다는 것도 충격적”이라고 말했다. (중략) 이어 그는 “단일팀이 성사되더라도 그게 우리 대표팀이 올림픽에 부진한 결과를 내는 것에 대한 변명이 될 수는 없다.”며 “만약 단일팀이 성사되더라도 (경기 엔트리 구성 권한이 있는) 나에게 북한 선수를 기용하라는 압박이 없길 희망한다.”고 밝혔다. (중략) “선수들에게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문제이니 훈련에만 집중하자고 말할 생각”이라고 했다. (JoongAng Ilbo, 2018c)

단일팀 구성에 있어서의 대조적인 예로는, 앞서 언급한 과거 독일의 단일팀 구성 사례가 있다. 당시 독일은 1956년 이탈리아 코르티나담페초 올림픽에 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올림픽 무대에 참가할 예정이었다. 평창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보도되었던 남북단일팀에 대한 우려와 마찬가지로, 당시 서독 내에서도 단일팀에 대한 우려와 반대의 정서가 만연했는데 정부는 ‘정치적인 안배가 없는 실력으로의 선발’을 원칙으로 하여 국민을 설득했다. 이것은 앞서 언급했던 1990년대의 언론 상에서 보인 한국의 상황도 다르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단순명료하게 실력으로 선발하여 경기력에 도움이 된다는 논리, 그리고 당시 서독의 생활스포츠와 동독의 정부주도 엘리트 스포츠의 결합은 그렇게 빛을 보았다. 시간의 여유를 가지고 단일팀을 성공적으로 구성 및 운용했던 과거 독일의 사례와 1990년대 초 남북단일팀의 사례에서 분명 본받을 점이 있다고 본다(JoongAng Ilbo, 2018d). 물론 시대가 바뀌고 국력이나 스포츠 기량이 우세한 현재는 상황이 다르다고 할 수도 있으나, 남북단일팀이라는 강력한 카드를 정치권이 계속 활용할 의사가 있다면 과거 사례의 명암을 반드시 되짚어야 할 것으로 사료된다.

한편 현재도 북핵 문제 해결 프로토콜이 계속 진행 중임을 감안한다면, 국내 정치상황에 대한 국제정치의 파급도 고려를 할 필요가 있다. 과거 1990년대 초에 집권 여당으로서 화해 무드를 조성하고 남북단일팀을 준비하며 이끌었던 보수층이 2018년 현재는 야당의 입장인데, 본인들의 과거 입장을 부정하는 목소리를 지속적으로 내는 이유도 ‘그때와는 북핵 문제가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라고 항변한다. 시대가 바뀌고 집권 정당이 바뀌는 역사가 반복되었지만, 정치엘리트의 스포츠에 대한 파장은 크게 바뀐 것이 없는 듯하다.

결론 및 논의

스포츠와 정치의 관계

본 연구는 남북한 단일 대표팀의 어제와 오늘을 논하기 위하여 정치와 스포츠의 관계를 탐색하고, 1991년과 2018년의 남북한 단일 대표팀의 구성을 위한 두 정치적 시기의 협상 과정에서 보인 방대한 미디어 텍스트를 살폈다. 1990년대의 미디어 환경이 활자 중심의 매체였던 것에서 2018년의 다양한 매체로의 변화 등에 따른 의미의 변화 또한 있을 수 있기에, 이에 따른 결론은 조심스럽다. 따라서 논리를 전개함에 있어서 연구자의 주관적인 견해와 해석보다는, 다소 많은 직접 인용을 하더라도 미디어 텍스트 원문에서 보이는 행간에 집중하여 논의하고자 주력하였다.

스포츠는 외연상 비정치적 대중문화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정치와 함께 회전 무대에서 번갈아 대중에게 보이는 춤을 추는 존재로 보인다. 그리고 정치권력의 스포츠에 대한 영향은 시대에 따라 변함없는 유형의 파장을 다음과 같이 종합하여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스포츠는 정치사회화 기능을 하고, 정치권력은 장차 여론형성을 위하여 스포츠를 활용한다. 정치·문화적 맥락에 의하여 스포츠는 일종의 정치사회화 매개체로 사용되는 것이다. 체육인들은 흔히 정치와는 분리되는 체육의 순수성을 강조하고 유토피아적인 순수한 경쟁으로서의 스포츠를 주장하나, 올림픽이 개인 경기가 아닌 국가 대항전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만큼 공허해진다. 스포츠 본연의 기능은 아니지만, 스포츠 경기나 행사에 참여를 함으로써 공동체 의식이 배양되고 그것을 서로 공유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는 1991년 남북단일팀 구성 및 성공 사례에서 비교적 선명하게 드러났다.

둘째, 스포츠 교류는 일종의 국제정치로서 기능한다. 정치권력은 특정 상황이 발발하여 그 필요가 변화함에 따라, 스포츠가 권력 유지의 기능을 수행한다고 판단되면 스포츠에 가치를 부여하고 정책으로서 지원하게 된다. 반면 정치권력, 정치엘리트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되는 경우, 일종의 통제 대상이 된다. 정치권력은 스포츠 정책에 관여하게 되고, 이것이 일종의 국제정치의 한 매개체이자 형태로서 기능하게 되는 것이다. 1991년 남북단일팀의 성공사례에도 불구하고 27년간 단절되었던 것은 이를 증명하며, 2018년에 갑자기 구성되어 부활한 점은 더욱 부각된다.

셋째, 메가 스포츠이벤트는 정치화되고, 정치메시지의 장으로서 기능한다. 스포츠 자체는 정치 및 경제적 이해관계에 중립적으로 평가되지만, 국가에 의한 정치적 상징조작의 대상으로 메가 스포츠이벤트는 정치엘리트층과 정치권력의 재생산 과정에 일종의 도구로서 기능하게 되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는 스포츠와 스포츠 정신에 대한 가장 유해한 세력은 정치권력이라고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국내 미디어텍스트 상에서 잘 보이지는 않으나 북한의 스포츠 이념을 탐색한 결과, 남북 스포츠 교류의 한계점도 제시하였다. 그간의 남북단일팀을 위한 협의와 구성, 성사, 그리고 가시적 성과가 있었음에도 한계가 명확하다. 북한 정치권력 하에서의 스포츠는 민간 영역에서 자유롭게 다룰 부분이 아닌 것이며, 정치 사상적으로 독립적이지도 않다. 따라서 체제 유지나 국가 이익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된다면, 남북단일팀은 허망한 구호일 뿐이다.

남북한 단일 대표팀: 정치와 스포츠의 회전 무대

미디어 텍스트의 행간에서 보인, 그간에 있었던 남북한 단일 대표팀의 구성을 위한 협상 과정과 결렬, 그리고 정치 상황에 따른 정치권력의 스포츠에 대한 영향과 파장을 살폈다. 그리고 남북단일팀이 현실화 되었던 두 시대를 함께 살펴본 결과도 아울러서 논의한다.

첫째, 남한과 북한 모두 정치적 필요가 있을 때에 남북 단일 대표팀 카드를 꺼냈다. 쌍방 간의 정치적인 이익이 확실시 될 때, 양측의 정치엘리트층은 이전의 불협화음과 협상 결렬을 덮어두고라도 남북단일팀을 성사시켰다. 그리고 그것은 1991년의 두 차례 구성과, 2018년 여자 아이스하키 대표팀에서 구체적으로 현실화되었다. 그리고 두 시대 상황 모두, 스포츠에서의 남북단일팀이라는 메시지가 정치적 해빙 무드로 파장되었다.

둘째, 남한과 북한 양측의 정치적 상황의 변화에 따라 남북단일팀의 필요성이 떨어지거나 이에 대한 의지가 약화되는 경우, 또는 남북 화해 모드의 필요성이 감소한 경우,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구호가 되었다. 1991년 남북단일팀 구성 이후 27년간 단절되었던 사유로는 북한의 남북단일팀 구성에 대한 의지약화와 더불어, 남한 입장에서는 남북한 UN동시가입으로 일단의 정책적 목표를 달성한 뒤 이에 대한 의지가 약해졌기 때문이다.

셋째, 정치 권력층이 처한 입장이 남북단일팀에 대한 입장으로 바로 대변되었다. 이는 1990년대의 미디어 텍스트와 최근의 미디어 텍스트를 비교해 볼 때 더 선명하게 보인다. 1991년 남북단일팀의 경우 여야를 막론하고 남북단일팀 구성에 찬성하였고 이것이 여야 정치국론을 초월한 민족적 경사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반면 2018년의 경우는 2011년에 평창 동계올림픽을 유치하고 특별법에 남북단일팀 협상을 할 수 있도록 명문화했던 입장에서, 국내외 정세와 정치상황의 변화에 따라 남북단일팀을 반대하는 입장으로의 전환을 볼 수 있었다.

넷째, 근래로 오면서 남북한의 국력 격차가 더욱 크게 벌어지고 스포츠 선수들의 인권 문제가 불거짐에 따라, 남북단일팀에 대한 우호적인 여론은 점차 작아지고 있다. 과거1991년의 사례와 대조적으로 2018년의 남북 단일 대표팀 구성에서는 선수들의 인권 문제가 부각되었고, 반대의 여론이 강했다. 현재 거론되고 있는 차후 올림픽 남북 단일대표팀 구성에 반드시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사료된다.

Notes

1) 당시 언론에서는 ‘아시아경기대회’라 호칭

2) 북방정책은 사회주의국가 및 북한을 대상으로 했던 외교정책으로, 중국 및 소련과 관계 개선을 꾀하여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는 한편, 경제협력을 통한 이익의 증대와 남북한 교류‧협력 관계 발전을 추구하며 궁극적으로는 그들과의 외교 정상화와 남북통일의 실현을 목적으로 했다(Yoo, 2014).

Ack

이 논문은 2019 스포츠 이슈포럼 및 제31회 88서울올림픽기념 서울국제스포츠컨퍼런스에서의 발표를 수정·보완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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