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N : 1598-2920
This study is to examine the historical facts about the integration of the Korean Sports Association, the Korean Olympic Committee, and the Korean School Sports Association in 1968.
Primary and secondary data were used to understand the integration process of the three organizations.
First, immediately after liberation, the Korean Sports Association was reorganized and a number of new sports organizations were founded. Second, in the 1960s, the military regime exerted the government's control, making all social groups essential to register in accordance with the Act on Social Group Registration. Third, the Korea Olympic Committee and the Korean School Sports Association frequently caused friction as they operated overlapping projects with the existing Korean Sports Association. Fourth, in February 1968, the government consolidated three groups that were considered social issues based on the experience of dissolving the Korean Special Sports Association. Fifth, the integration of the three organizations is significant in that it prevented redundant projects and wasted budget, and resolved the discord in the sports world.
The first integration of the Korean Sports Association in 1968 was a historical event that absorbed the Korean Olympic Committee and the Korean School Sports Association. The integration of the three organizations is viewed as a solution for the systematic operation of the sports administration, but on the one hand, it has become the top-ranking organization in the Korean sports community since this time by well blocking the checks of the Korean Olympic Committee and Korean School Sports Association. It can be understood as maintaining absolute power.
세 단체의 통합과정을 파악하기 위해 1·2차자료를 활용하였다. 특히 문교부 행정개혁조사위원회의 『체육행정의 개선을 위한 조사보고서』, 문교공보위원회의 회의록, 대한체육회사, 대한학교체육회의 『한국각급학교보건체육에 관한 실태조사 보고서』, 대한체육회 『體育』, 그리고 당시 언론매체를 활용하였다.
첫째, 광복 직후 대한체육회의 재정비, 신생 체육단체들이 다수 창립하였다. 둘째, 60년대에 들어 군사정권은 사회단체등록에 관한 법률에 의거하여 모든 사회단체들을 필수적으로 등록하도록 만드는 등 정부의 통제권을 발휘하였다. 셋째, 대한올림픽위원회와 대한학교체육회는 기존 대한체육회와의 중복된 사업을 운영하면서 자주 마찰을 일으켰다. 넷째, 정부는 한국특수체육회를 해산시켰던 경험을 토대로 사회 문제시되는 세 단체를 1968년 2월 통합하였다. 다섯째, 세 단체의 통합은 중복 사업 및 예산 낭비를 방지하고, 체육계 불협화음을 해소했다는 데에 의의를 두고 있다.
체육개혁에 자주 논의되었던 대안으로 “체육단체 통합”이라고 망설임 없이 제기된 때가 있었다. 2016년 3월 21일 대한체육회와 국민생활체육회가 통합되자 “스포츠복지사회를 향한 선진체육시스템의 출발점이며 대세”(Ahn, 2015), “체육단체 통합은 역사적 과업으로 후손에게 길이 물려줄 유산(Ahn, 2015)”, “대한체육회와 생활체육이 통합된 것은 한국 스포츠 사상 가장 혁명적이며 새로운 스포츠 패러다임의 개막을 알리는 것(Kim, 2016)”이라 하며 긍정적 효과를 강조하였다.
하지만 ‘가시밭길’, ‘주도권 싸움’, ‘산 넘어 산’, ‘통합 합의도출 결렬’(Choi, 2015; Jang, 2015) 등 통합에 대한 부정의 목소리 또한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육 단체 통합은 정확히 규정하자면 지난 반세기 동안 대한민국 스포츠를 지탱해 온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수정하는 혁명적인 변화의 상징이다(Chung, 2015)”라고 하였듯이 오랜 여정을 끝으로 드디어 통합 대한체육회(Korean Sport & Olympic Committee)가 탄생되었다. 2016년 당시 아흔여섯살인 대한체육회, 그리고 스물다섯살인 국민생활체육회의 통합은 대한민국 체육계의 역사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51년전인 1968년, 대한체육회는 이미 한번 통합하였던 경험이 있다. 즉 대한올림픽위원회와 대한학교체육회가 대한체육회로 통합된 사실이다. 당시 문교부 행정개혁조사위원회에 따르면, “정부는 체육단체의 일원적 통합 주장에 따라 1968년 3월 1일 대한체육회와 대한올림픽위원회, 대한학교체육회를 사단법인 대한체육회로 통합하였다”고 하였다(Ministry of Education, 1966). “5·16 이후 유사단체 통합”이라는 정부 시책과 1966년 방콕아시안게임에 국제대회 선수 선발 및 임원 선정 문제로 대한체육회와 KOC가 대립하면서 사회적 문의를 일으켜 통합의 단초를 던져주었던 것이다.
1968년과 2016년 두 번의 체육단체 통합. “통합(統合)”이라는 공통된 명제는 있으나 1968년 통합은 사회단체통합이라는 정치적 상황 속에서 그리고 2016년 통합은 체육계 구조 변화를 위한 일환 등 각각의 통합 배경 및 목적이 다르다.
체육계에서는 가장 큰 역사적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1968년에 있었던 첫 번째 통합은 『대한체육회 칠십년사(대한체육회)』, 『한국체육백년사(이학래)』 등에서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몇 개의 단체가 대한체육회로 통합했다고 단 몇 줄로 기술되어 있는 등 체육학계에서 크게 알려진바 없다. 종목별 경기가맹단체들을 대표하는 최고 상위단체이자 국가를 대표하는 대한체육회에 대해 과거로부터의 성장 과정을 이해하는 것이 본 연구의 필요성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연구는 1968년 첫 번째 통합단체였던 대한체육회의 역사적 배경과 목적, 과정 그리고 통합 이후 체육계의 변화 등 역사적 사실을 살펴보고자 한다. 다만, 기존 대한체육회와 대한올림픽위원회에 한정했던 두 단체간 통합이 아닌 대한체육회, 대한올림픽위원회, 대한학교체육회 세 단체의 통합 과정을 파악하고자 한다. 이는 역사학자 카(Carr)가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듯이 과거 대한체육회의 통합을 통해 현재는 물론 100년 후의 체육계 미래상을 예측해볼 수 있고, 무엇보다 후속 연구인 두 번째 대한체육회의 통합에 대한 지속적 논의를 위한 첫 번째 단계라 볼 수 있다.
대한체육회 통합과 관련된 선행연구들은 정석희(2015)의 『체육단체 통합을 통한 발전 방안』, 정원옥(2016)의 『대한민국 체육단체 통합 갈등과정 분석 연구』, 김원풍(2017)의 『한국 올림픽위원회의 현황과 운영방향에 관한 고찰』 등 석사논문이 몇몇이 발표되었다. 학술지로는 김은경(2015)의 『통합체육회 정관 및 제반 규정 정비를 위한 과제』, 박주한(2016)의 『통합 대한체육회의 비전과 정책목표』, 손석정(2017)의 『대한체육회의 자율성 확보 및 재정자립 기반마련을 위한 일 방안 고찰』, 이해령 외(2017) 『옹호연합모형으로 본 체육단체 통합 과정』, 홍승후(2018) 『체육회의 통합과정과 정책과제』등이 있는데 통합에 대한 논의가 언론에 대두되고 한창 통합과정이 진행되고 있을 때인 2015년부터 2018년까지 발표되었다. 단행본으로는 대한체육회의 『대한체육회 칠십년사』, 대한올림픽위원회의 『KOC 50년사 1946~1996』, 이학래의 『한국체육백년사』가 있다. 정부 자료로는 1966년 12월 14일에 발표된 행정개혁조사위원회의 『체육행정의 개선을 위한 조사보고서』가 있다.
상술한 석사논문과 학술지들의 공통점은 최근 대한체육회와 국민생활체육회의 통합 문제 및 방향 그 중에서도 통합과정 중 충돌할 수 있는 법적 문제점에 대한 논의를 주로 다루었다. 『대한체육회 칠십년사』, 『KOC50년사』는 “통합했다”는 간략한 사실 그리고 이학래(2000)의 『한국체육백년사』는 ‘중앙단체 통폐합’이라는 제목으로 통합 이후부터를 조명하였기에 그 이전 통합 배경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이외 대한체육회에서 1965년부터 매달 발간하는 “體育(현재 Sports1으로 개칭)”은 체육통합에 대해 당시 체육계 환경을 알 수 있는 데 가장 큰 도움을 주는 잡지라고 할 수 있다.
첫 번째 통합에 대한 직접적인 자료로는 1966년 12월 발표된 문교부 행정개혁조사위원회 『체육행정의 개선을 위한 조사보고서』이다. 당시 체육과 관련한 구체적인 통계(관계법, 재정, 지도자수, 시설, 체육학교, 한국인과 외국인체위에 관한 통계 등), 체육단체일람표(대한체육회, 대한학교체육회, 대한올림픽위원회) 및 현황이 담겨져 있다. 오늘날 매년 발간되는 문화체육관광부의 『체육백서』라고 할 수 있다. 이 외 『동아일보』, 『조선일보』, 『경향신문』 등 당시 발간된 신문을 활용하였다.
일제는 조선체육진흥회, 학교체육진흥회 등 총독부방침에 순응할 외압단체를 결성 발족시켜, 체육운동은 국가의 사업이라는 미명 아래 운동경기가 아닌 국방경기라는 전기훈련(戰技訓練)을 강요하여 그야말로 공백의 상태에 놓여 있었다(Nah, 1981).
그러나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민주주의를 기초로 정치 경제 문화 그리고 체육계 대부분이 패러다임의 대전환기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학교체육, 사회체육 또한 민주화의 체제로 재편되기 시작하였고, 체육단체들이 빠르게 재건하였는데 대표적인 단체가 바로 대한체육회라 할 수 있다.
1945년 8월 15일 조국광복 이후 在京體育人들은 中央基靑을 중심으로 빈번한 회합을 위하여 조선체육회가 일인들의 손에서 해방된 지 7년 만에 다시 조직을 갖기 위해 조선체육동지회를 구성하여 대한체육회 발기를 하였다(KSOC, 1965, Shim, 1977).
1945년 8월 15일 광복 3개월 후인 11월, 조선체육회의 재건, 1946년 조선올림픽위원회 조직 그리고 각종 경기단체의 통괄기관을 완비하여 체육 재건에 활발한 기초작업 전개와 각자의 활동은 사회혼란과는 대비적으로 가장 모범적으로 운영되었다(KSOC, 1972).
조선체육동지회의 결성으로 조선체육회의 재건을 계획하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새 국호에 따라 대한체육회로 개칭하게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를 배경으로 해방 직전 1945년 7월 27일 조선송구협회를 시작으로 조선체조협회(9월 1일), 조선육상경기연맹(9월 23일), 조선탁구협회(9월 28일), 조선연식정구협회(10월 1일), 조선아마추어권투연맹(11월 10일), 조선빙상경기연맹(11월 24일), 조선유도연맹(11월 28일), 조선자전거경기연맹(11월 30일)이 창립되었고, 조선축구협회(12월 3일)와 조선농구협회가 재건되었다(KSOC, 2011). 이듬해인 1946년 조선궁술연구회(2월 10일)를 필두로 배구, 럭비, 레슬링, 수상경기, 야구, 스키, 승마, 연식야구가 1947년에는 아이스하키, 필드하키 등 경기단체들이 줄지어 출범하였다.
한국전쟁 중에도 1952년 4월 27일 부산에서 개최된 대한체육회 정기총회에서는 산하단체들(36개)이 기존 임의단체에서 사단법인체로 바꾸는 절차가 시작되었다. 이어 배드민턴, 수박도 단체가 그리고 한국레크리에이션협회, 사회체육추진회, 학도체육회가 결성되었다(Nah, 1981).
체육단체의 재건은 곧 국제적 위상과 직결되는 문제이기도 했다. 1948년 런던올림픽에 참가하기 위해 “올림픽 종목 5개 이상 국제경기연맹에 가입되어야 한다”는 규정에 의거하여 육상, 축구, 복싱, 역도, 농구, 사이클 등 여섯 개 경기단체1) 정관을 번역하기도 했다(KSOC, 1990). 이렇듯 광복 직후에는 국내에 대한체육회를 위시로 종목단체들이 재건하였고, 국제적으로 올림픽 참가를 위한 대표 기관으로 대한올림픽위원회가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대한체육회, 대한올림픽위원회, 대한학교체육회에 대한 내용은 아래 “광복 이후 세 단체의 재건과 탄생”에서 구체적으로 기술하였다.
본 장의 제목은 “정치인과 체육단체의 조우”라 했는데 체육회에는 정치인들이 대부분으로, 오래전부터 한국 체육과 정치는 긴밀한 관계가 유지될 수 밖에 없는 역사적 배경이기도 하다. 대한체육회 통합 또한 결국 사람간의 마찰이 주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체육단체의 정치적 중립성을 위해 정치가들의 체육단체장 겸직 금지(국민체육진흥법 제43조의2)가 있지만 당시 만해도 대다수가 정치인들의 권력을 배경으로 체육단체가 힘을 발휘할 수 있던지, 또는 있기를 기대했던 시대라 할 수 있다. 그 때가 바로 5·16군사정변과 제3공화국으로부터 시작되었고, 정치와 체육계의 긴밀한 관계가 체결되는 시기라 할 수 있다. 이동연의 「스포츠 어떻게 읽을 것인가」, 정준영의 「열광하는 스포츠 은폐된 이데올로기」, 허진석의 「스포츠 공화국의 탄생」, 이종원의 「제3공화국의 체육정책 및 체육의 전개에 관한 연구」, Kim Misuk의 「Die Entwicklung und die Charakteristika des koreanischen Frauensports」 등에서 이러한 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한국의 스포츠가 국가경제의 빈곤으로 각 경기 부분이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 정치인이 각 단체의 수장이 될 수 있었던 역사적 배경이라 할 수 있다. 『대한체육회 70년사』에서는 특히 체육단체장과 관련하여 ‘정치인 추대, 선출, 보선, 사임’이라는 빈번한 단어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고,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정치계의 중진, 집권당 소속, 혁명세력, 군인회장” 등으로 표현되고 있었다(KSOC, 1990). 이 때 약간의 혜택을 체육인들에게 제공하는 한편 그 장의 자리를 정치생명의 연장 또는 강화의 도구로 이용한 결과 체육계의 분위기를 흐려 놓고 말았다(Nah, 1981)라는 체육계 문제점을 확인할 수 있다. 혼란의 시대였던 당시 혁명정부는 체육계 폐단을 해소하기 위해 6월 22일 대한체육회수습대책위원회를 조직하고, 대한체육회 및 산하경기단체에서 정치인의 개입을 배제하는 조치를 취했다. 즉 순수한 체육인으로만 개편하여 종래 체육행정 운영의 폐단을 없애고, 국고예산으로 운영하게 함으로서 정상적인 운영을 위한 노력을 시도하였던 것이다. 이 때 전국민에게 체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기 위한 국민체력증진대추진, 종래 문화국에 속해 있던 체육과를 체육국으로 독립·승격시켰고, 체육국 안에는 국민체육과와 학교체육과로 구분하는 등 체육 전반에 걸친 적극적인 개선의 의지와 실행이 보인다. 그 중에서도 재건국민운동본부에서는 “국민체위향상(國民體位向上)은 민족의 힘이다. 체력은 국방력에 직결한다”라는 슬로건 밑에 국민재건체조를 제정하여 전국민에게 보급하는 한편, 문교장관은 특수종목체육진흥회를 발족(1962.9.10.)시켜 전국 4년제 대학을 대상으로 글라이더, 낙하산, 카타, 승마, 등산, 모터보오트, 모형비행기 등을 훈련시켰다(Nah, 1981).
정치인 및 체육계 인사들의 체육단체의 재건 및 창립에 대한 노력들이 있는 반면, 시대적 혼란기에 따른 부작용 또한 속속 발생하고 있었다. 체육단체장 선출, 국제대회 출전 등에서 빚어지는 문제들이 가장 컸다. 가령, 국제대회에 선수 외에 관계자가 아닌 사람들까지 포함되면서 국회에까지 소식이 알려져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이와 유사한 사건은 이미 1948년에도 발생한 바 있다. 1948년 런던올림픽 참가를 위해 7개 종목(육상, 축구, 농구, 복싱, 역도, 레슬링, 사이클) 67명 선수를 구성하였는데 해당 종목 선수를 더 포함시키기 위해 타종목을 헐뜯고, 서로 비방이 오고갔고 미군정청이 경비를 지원해야하기에 10명을 줄이라는 기록도 찾을 수 있다(KSOC, 2011). 올림픽 참가를 위한 팀 구성에서부터 대한체육회 내분은 끊이질 않는 것으로 보인다. “대한체육회를 동대문사단의 집합장소, 자기사단을 구축하는 체육회”(Ministry of Education, 1965) 등이라고 문교공보위원회 회의에서 노골적으로 지적한 만큼 이미 대한체육회 불신이 만연된 분위기로 이해된다.
문교부장관은 이 동대문사단을 완전히 개편할 용의가 있는지 만일 이것을 개편할 용의가 없으시면 여기에 지급될 보조금을 대폭소급해서 개편할 수 있는 소지를 마련할 용의는 없는지 여기에 대한 답변을 해주시기를 바랍니다(Ministry of Education, 1965).
대한체육회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은 국회의원 뿐만 아니라 당시 장관 권오병 또한 동조하며 대한체육회에 대한 비판적 의견을 제시하였다.
우리가 예산조절을 할 때에 보면 다음과 같은 점에 재고와 또는 소감해야 할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내가 보기에는 국제적으로 체육진흥책을 세울 그런 경우에는 별문제이지만 지금과 같은 체육계에 보조금을 줄 경우에는 한 번쯤 소감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체육회자체에 정신혁명을 먼저 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65년에는 5,000만원 가지고 그만한 성적을 거두었는데 정신혁명을 하지 않는 사람은 줄 필요도 없습니다(Ministry of Education, 1965).
결국 문교공보위원회 회의에서 체육 보조금 삭감은 물론 체육 관련 사업 지원에 대한 반대 의견들로 표출되고 있었다.
지금 어떤 지역에 체육관 하나를 만드는 이런 것 보다도 지금 전체 국민들의 교육 문제가 더 소중해요. 전체 국민의 교육문제를 소외하고 어떤 지방에 실내체육관을 만들기 위해 6,000만원이라는 많은 보조금을 줄 이유가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Ministry of Education, 1965).
위의 내용은 정상구 위원이 대구 실내체육관 건립 보조금에 대한 지적이다. 체육계 보조금 지원에 대한 반대의견과 함께 관련된 지역 체육관 건립비를 비판하면서 보조금 불균형적 배분에 대한 지적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국회의원들의 체육계 및 대한체육회 행태들에 대한 지적들은 어쩌면 체육계 성장과 변화를 위한 필수과정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국민체육을 어떠한 방향으로 끌고 가고 있느냐 하는 문제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본 위원이 생각하기에는 학교체육시간이라는 것은 공하나 내줘 가지고 다 채우고 있단 말이에요. 우리나라 선수를 발견하여 어떻게 육성할 것인지 방안에 대한 연구들이 필요합니다(Ministry of Education, 1965).
문교부장관(권오병) : 체육진흥개선책에 대해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면 국민체육 인구에 대한 저변 확대책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역시 학교체육이 중심이 되어가지고 체육진흥을 꾀해야 되는 것입니다(Ministry of Education, 1965).
위와 같이 대한체육회 지적 사항들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의 체력에 대해 국회에서 정부 관료들의 우려와 관심을 표출하였고, 국민 외 학교체육 역시 그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광복 직후 정치사회는 격변의 시기이면서 체육계 또한 가장 큰 변화를 맞이했던 시기로 국민을 위한 체육을 진흥하기에는 역부족이 아니었나 유추된다. 한국체육계가 재정립되는 데 매우 중요한 사안에도 불구하고 체육단체의 재건과 창립, 단체장 선출, 국내 대회 개최(전국체육대회 및 종목별 경기대회), 올림픽참가를 위한 팀구성 등 부정 행태들로 인하여 사회적 파장으로 이어졌고, 결국 부정적 인식이 이어진 것으로 이해된다.
대한체육회의 통합 과정을 논의하기 위해 세 단체에 대한 역사적 배경 및 운영 현황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다만, 대한체육회와 대한올림픽위원회는 기관의 年史, 단행본, 학술지 등에서 다수 논의되었으므로(특히 대한체육회와 대한올림픽위원회 關係史) 두 단체에 비해 크게 알려지지 않은 대한학교체육회에 대한 내용을 조금 더 알아보고자 한다.
대한체육회는 1948년 9월 조선체육회에서 대한체육회로 개칭하고, 1954년 3월 사단법인 대한체육회로 인가받았다.
해방과 동시에 한국의 체육계는 조선체육회를 재건하고 체육의 민주화·대중화로 대변되는 신체육 이념을 수용하여 국민의 체력증진과 체육을 통한 국권 회복을 위하여 노력하였다(https://www.much.go.kr/L/rYUwul4RsG.do).
사단법인 대한체육회는 체육운동을 범국민운동화하여 학교체육 및 사회체육의 진흥으로 국민의 체력향상과 건전하고 명랑한 기풍을 진작시킴과 아울러, 아마튜어경기단체를 통솔ㆍ지도하고, 우수한 경기자를 양성하여 국위선양을 도모함으로써 민족문화 발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KSOC, 1972).
광복 이후를 대한체육회는 부활기라 명명하였다(KSOC, 2011). 체육 전파를 위한 국내외 활동을 시작하는 시기였고, 해방 이후 대내적으로 해방된 한국의 정체성을 만들어 갔으며, 대외적으로 해방된 한국을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했다(Kim, 2017).
한국전쟁 중에도 부산시 창선동 1가 문화극장 옆 연락사무소를 통해 체육인들의 등록받았다(KSOC, 1990; Lee, 2000). 국제적으로는 1952년 헬싱키올림픽을 대비하기 위한 집행부 구성은 물론 국내 종목별 대회 개최를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당시 한국체육계의 전반적인 업무는 대부분을 대한체육회가 맡고 있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점차 확대되는 체육 사업들을 운영하기 위해 국민체육관 건립위원회를 구성(1954년 8월 15일) 하였고, 대한체육회의 태평로시대 개척(1955년 4월 7일 , 서울시청 앞 관재청 건물에 대한체육회 사무실 이전) 등 체육계 새출발을 위한 변화를 맞이하였다.
한편 국가올림픽위원회(NOC: National Olympic Committee)는 조선올림픽위원회가 그 효시이다. 1946년 7월 15일 조선체육회 내 올림픽대책위원회로 칭했다가 조선올림픽위원회(KOC: Korean Olympic Committee)로 출범하였다. 대한민국 NOC는 1947년 6월 20일 제41차 국제올림픽위원회 총회에서 IOC 정식회원국으로 승인을 받았다. 직후 7월 1일 올림픽참가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으며, 동월 24일 올림픽후원회를 결성하는 등 국제 무대로 진입하기 위한 적극적인 활동을 엿볼 수 있다.
대한체육회 정관 제41조에 의하면, “본 회에 대한올림픽위원회를 둔다. 국제올림픽위원회 및 아세아경기연맹의 사업에 대하여 국민을 대표하고, 올림픽 표장의 관리와 동하계올림픽경기대회 및 아세아경기대회에 한국을 대표하는 경기자와 임원의 선정 및 파견의 사업을 수행한다“고 하며 대한올림픽위원회의 임무와 역할을 제시하고 있다(KSOC, 1990; Kim, 2017).
대한올림픽위원회는 1948년 1월 생모리츠동계올림픽에 대표를 구성(임원 2명, 선수 3명)하였는데 이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보다 먼저 태극기를 앞세워 국제대회에 진출시킴으로서 한국체육계에 던지는 의미가 상당히 크다. 정부 수립 바로 1948년 9월 3일 대한올림픽위원회로 개칭하면서 결국 1948년 한 해 동안 생모리츠동계올림픽과 런던하계올림픽 참가라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64년 9월 8일 사단법인 대한올림픽위원회로 완전한 독립을 이루었다. 그러던 중 독립된 기관에 대한 예산 지출, 아시아경기대회 유치권이 반납되어야 하는 국내외 상황과 무엇보다 대한체육회는 올림픽위원회를 분리 운영한 결과라고 대응하면서 결국 두 기관의 운영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논의가 제기되면서 결국 대한체육회와 대한올림픽위원회는 “분리-재통합-완전통합”의 변천과정을 거쳤다(Kim, 2017).
대한학교체육회(大韓學校體育會)는 1956년 4월 14일 임의단체로 설립되었다. 대한학교체육회는 대한체육회 내 학도체육위원회에 참여하였던 학교체육지도자들이 주축이 되었는데 ‘학교체육에 관한 연구 조사 및 훈련 연구’ 활동을 하면서 1965년 3월에 독립된 기구로 발족하였다.
대한학교체육회는 체육교사의 자질 향상과 학원체육의 정상화를 통한 국민체위 향상과 스포츠 인구의 저변 확대라는 목표를 제시하고 있다(Lee, 2000).
대한학교체육회 조직도를 살펴보면 아래와 같으며 정부로부터 1965년 처음으로 2천만원을 지원받았다.
회장을 중심으로 이사회가 그리고 사무처, 편집위원회, 연구위원회, 시도지부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대의원총회 산하에 각급학교각종경기협의회 그리고 하부 조직으로 각시도지부 각급학교각종경기협의회를 구성하였다. 대한학교체육의 주요 사업들을 살펴보면, 학도의 체위향상, 학교체육발전책 강구, 체육연구발표 및 강습회 개최, 학도 및 교원전국체육대회, 기타 학교체육에 필요한 사항 등이다. 인력은 본부에 61명, 지부 2,232명의 회원을 보유하고 있었다(Ministry of Education, 1966). 2천여명 이라는 큰 규모의 회원을 확보할 수 있었던 이유는 1965년 3월 17일 문교부로부터 사단법인 설립인가 후 전국 중고체육총련을 흡수하였고, 전문ㆍ敎大ㆍ初大체육 연맹을 회원 가맹단체로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역별 학교를 중심으로 회원을 확보한 대한학교체육회는 특히 학도체육대회를 통해 전국 단위 사업을 확장해나갔다. 학도체육대회는 지금의 전국체육대회와 같이 중요한 대회로 파악되고 있다. 학도체육대회는 “학교체육의 정상적 발전과 경기 인구의 저변 확대를 도모하며 지역사회의 체육에 대한 관심을 드높혀, 군민의 화합과 건전한 사회 기풍을 진작시키는 것”이다(Kim, 1981). 1966년 제1회 전국학도체육대회 개막식에서는 박정희대통령이 참가하고, 치사까지 한 중요한 체육대회로 기록되고 있다.
학도체육대회는 기존 체육계의 선배였던 대한체육회와의 빈번한 충돌 요인이 되었다. 학도체육대회 뿐만 아니라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보고서도 발간하였다. 현재 국회도서관에서 유일하게 한권만이 보관되어 있는 본 보고서는 1968년 2월 발표되었다. 『한국각급학교보건체육에 관한 실태조사 보고서』는 전국 중고대 79개교, 남녀학생 총 19,750명을 대상으로 체력 및 건강상태, 놀이(운동) 환경 등에 대해 전수조사를 했던 150쪽으로 구성된 첫 번째 보고서였다.
대한학교체육회는 학교체육의 학문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연구토대의 보고서를 작성하였는데 아쉽지만 이 보고서는 대한학교체육회가 발표한 처음이자 마지막 보고서이다. 세부 내용을 살펴보면 실태조사를 위한 조사항목 등 구성을 잘 갖추고 있다. 특히 대상별(남녀 초중고대) 체육과 보건에 대한 각각의 환경에 대한 조사를 구체적으로 한 것이 가장 눈에 띈다. 체육활동의 동기부터, 재미없는 이유, 스스로의 체력 수준 등 체육 환경 관련 13문제, 매일 양치 실시 여부, 식사 횟수 등 보건 환경 관련 11문제 총 24문제를 구성하여 당시 학생들의 건강, 신체활동, 보건환경 등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대한체육회 및 대한올림픽위원회는 대회 및 선수육성을 중심으로 사업을 운영한 반면 대한학교체육회는 “학원체육의 정상화”라는 조직의 설립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학생들의 체육활동 및 보건 환경을 파악함으로써 타 기관과의 차별성을 두고 있었다.
대한체육회, 대한올림픽위원회, 대한학교체육회 각각의 역사를 살펴보았다. 광복 이후 사회정치 속에서 대한체육회 회장들의 연이은 교체, 체육의 정치적 경향 심화, 체육단체들의 창립, 문교부의 교육 분과로 한정시키는 등 체육발전의 장애는 쌓여만 갔다.
오랜 시간 동안 구심점 역할을 해오던 대한체육회로서는 타기관과 대립을 피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즉, 대한올림픽위원회와 대한학교체육회는 대한체육회와 유사 업무 수행 등으로 세 개의 단체들은 배치 상태에 놓이게 되었고, 일관성 있는 체육정책을 펼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던 것이다.
국민체육진흥은 국민보건과 국민체위 향상에 대한 시책이 선행되어야함에도 불구하고 체육계의 현실은 체육이 일반민중의 관상용으로 전락하고 있을 뿐 아니라 국내 각종 경기대회와 국제경기대회 및 파유선수 훈련에만 급급하고 법시행 후 4년이 경과한 오늘에도 국민체육진흥에 대한 법시행 및 체육단체의 체계화 등 기본시책마저 확립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에 있다(Ministry of Education, 1966).
충돌하는 사건 중 대부분을 차지하는 요인은 국내외 대회 개최로 기인한다. 국제대회로는 올림픽과 아시안게임 그리고 국내대회로는 전국체육대회와 학도체육대회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으며 구체적인 요인들은 아래와 같다.
우선 대한체육회와 대한올림픽위원회 간 관계 분열이다. 두 단체는 오랫동안 체육계 논란의 중심이 되어왔다. 대한체육회는 정관상 사업으로 국제체육경기대회의 개최 및 참가, 국제올림픽경기 및 아세아경기에 관한 사업 등이다. 반면 대한올림픽위원회는 국제올림픽위원회 및 아세아경기연맹의 사업에 관하여 한국을 대표하고, 종합 국제경기대회에 파견할 한국대표선수단의 조직구성 및 관리를 주사업으로 하고 있었다. 대한체육회와 대한올림픽위원회의 큰 마찰은 1966년 12월 제5회 방콕아시안게임으로부터 표출되었다. 방콕대회 선수단 구성이 아닌 임원 선정에서 권한을 행사하려는 대한올림픽위원회와 대한체육회의 충돌이 바로 그것이다.
대한체육회와 대한「올림픽」위원회의 분규는 「아시아」경기대회, 「유니버시아드」대회같은 국제대회에 출전할 때마다 터져 나왔고 양단체간의 싸움은 「방콕·아시아」경기대회 출전선수들의 연판장소 등으로 그 절정에 달했었다(Korea JoongAng Daily, 1968.12.14).
당시 체육회는 경기에 집중했지만 KOC는 차기 아시안게임 유치에 온 신경을 쏟으며 두 단체는 사사건건 반목했다. 손 선생은 두 단체의 반목을 삭발로 웅변하며 체육계의 통합을 무언의 메세지로 전했던 것이다(Sportsseoul, 2015.2.25).
올림픽에 파견 명단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두 기관의 싸움은 사회적으로까지 지탄의 대상이 되었던 단면을 언론을 통해 그대로 보여준 사례도 있다.
“올림픽에 어중이 떠중이 딸으지말라” 「체육은 신성하다」고하여 우리도 그렇게 명심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체육계를 볼 때 한심한 생각이 아니날 수 없다. 신성의 두 글자에 숨어서 썩어빠진 정치와 挾雜謀利(협잡모리) 행위가 감행되고 있다. 외국원정을 가게되면 그것을 奇貨(기화)로 삼아 돈버리가는 체육인이 되고 말았다. 그마나도 정치성을 띠우지 않으면 원정의 생각조차못할 정도니 이것참말 울면서 겨자먹는격이다. 금반 올림픽대회 파견문제만하여도 이 무슨 부끄럽고 쑥스러운 짓인가. 국민 전체에 얼굴을 들 염치가 없으며 깨끗이 기권이라고 하고 싶은 마음까지도 든다. 관계인사들은 우리 체육인들을 상품화하지 말라! 시골잔치집 찾아가는 거지처럼 어중이 떠중이 딸아오지 말라. 제발 役員(역원)이니하고 딸아와서 엉뚱한 사업만하고 돌아와서는 제일생색을 내는 그 따위 행동은 삼가달라.<국민에게 미안한 선수>(The Dong-A Ilbo, 1956.10.31).
국제대회를 앞두고 발생되는 대한체육회와 대한올림픽위원회의 첨예한 대립은 피할 수 없었던 현실인 듯 하다. 물론 1949년 1월, 올림픽 및 아시안게임에 출전 대상 선정은 대한올림픽위원회와 협의하는 것으로 수정하는 등 대한체육회와 대한올림픽위원회 사이 국제대회 사업 운영권에 대한 선점 다툼은 일단락되었다. 1960년 6월 개정된 대한체육회 정관은 올림픽경기대회 및 아세아경기대회에 출전하는 선수 및 임원의 선정권한은 대한체육회에, 선정된 대표단을 파견하는 파견권한은 대한올림픽위원회로 부여하는 등 조치도 있었다.
다음은 대한체육회와 대한학교체육회 두 단체 간 관계이다. 대한체육회의 설립 목적은 국민의 체위향상, 아마튜어 경기단체의 통괄지도, 우수선수의 육성 등으로 특히 학도체육에 관하여 학도 보건 및 체위향상과 체육운동에 관한 과학적인 연구지도 등 전학도체육 부문을 담당하고 있다(Ministry of Education, 1966). 그런데 대한학교체육회 또한 학교체육의 건전한 발전을 목적으로 학도의 체위향상을 위한 연구와 지도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양기관이 학도(학생)체육, 연구지도를 목적으로 하고 있어 사업의 중복을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체육교육의 현장에 종사하는 체육교사 중심으로 구성된 이 단체는 이 뒤로 전국규모의 학도체육대회를 가지며 본회 사업과 중복되는 결과를 빚어왔다(KSOC, 1990).
대한학교체육회는 서울특별시 및 시도체육위원회 교육감을 지부장으로 하는 각시도지부를 설치하였고, 본부소속의 각급(대학 중고교 및 국민교) 각종 경기협의회와 산하 각시도지부에 또한 각급각종경기협의회를 조직하는 등 대한체육회에 맞서 학생아마튜어단체인 각급 학교별 경기연맹체 조직을 조성·확장하였다. 이미 학도체육위원회가 있었고, 각종 경기연맹에 동일한 조직을 운영했던 대한체육회로서는 사업의 중복성은 물론 기존 위원회 위원들이 별도의 조직을 만든 것이다. 대한체육회의 전국체육대회와 대한학교체육회의 학도체육대회는 참가 대상의 중복(중, 고, 대학생), 규모의 유사성, 대회 개최 장소의 동일성, 지역 행사로서의 대표성 등 모든 것이 겹치는 양상이었다. 무엇보다 전국체전 개최 이전(10월 중 개최)에 학도체육대회가 개최하게 되었는데 박대통령이 참관한다는 것 자체가 대한체육회로서는 심기를 매우 불편했을 것으로 예측된다.
게다가 대한학교체육회는 학업과 운동을 병행하는 데에 있어 학생선수들의 학습권을 강조하였고, 대한체육회는 학교체육을 외면하고 학생들을 경기행사에만 동원한다는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대한체육회를 노골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하면서 두 단체간 감정의 골은 깊어지게 되었다.
대한학교체육회는 학생의 전인적 교육을 위해 수업 결손을 초대한 방지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중앙의 경기 통할단체가 주최하는 종목별 경기에 연간 출장횟수를 제한하거나 자제시키는 등의 움직임을 보였다(Lee, 2000).
당시 대한체육회를 비판할 수 있었던 배경은 전국 단위로 각 지역별 교육감, 전무이사, 보건체육과장 등을 회원으로 확보함으로써 세력의 우위에 있지 않았나 싶다.
아래 <표 1>은 당시 세 단체 운영 현황 비교분석을 한 기록이다. 대한올림픽위원회, 대한학교체육회, 한국특수체육체육회(해산)는 이미 대한체육회가 운영하고 있는 사업들과 중복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 중 대한올림픽위원회는 국제올림픽위원회와의 관계에서, 대한학교체육회는 전국교육계와의 연계를 맺고 있던 바 한국체육계의 역사성, 전통성에서 우위에 있었다고 자부한 대한체육회로서는 자존심에 상처와 미래 단체의 존립까지 위협을 느끼지 않았을까 한다.
function | ||
---|---|---|
mission | Duplicate content | |
Korean Sports Association 1920.7.4. |
-Amateur sports -Social sports -School sports -International competition |
|
Korea Olympic Committee 1947.8.26. |
-International competition | International Competition of Korean Sports Association |
Korean School Sports Association 1956.4.14. |
-School sports | Korean Sports Association School Sports |
Korea Special Sports Association 1964.4.1. |
Rowing, swimming, horseback riding, shooting | Rowing Association, Swimming Association, Horse Riding Association, Shooting Association of Korean Sports Association |
1963 | 1964 | 1965 | 1966 | |
---|---|---|---|---|
Korean Sports Association | 3,740,000 | 66,625,755 | 102,000,000 | 141,459,200 |
Korean School Sports Association회 | 20,000,000 | |||
Korea Olympic Committee | 3,340,000 | 4,075,000 | ||
Korea Special Sports Association | 15,000,000 | 24,375,000 | 10,000,000 | 5,000,000 |
Korea Recreation Association | 3,000,000 |
1961년 5월 16일, 군사정권은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는 물론 모든 정당과 사회단체를 해산시켰으며 이어 6월 10일 “사회단체등록에관한법률”을 공포하였다([시행 1961.8.3.] [법률 제671호, 1961.8.3., 일부개정]).
제2조(사회단체의 정의) ① 본법에서 사회단체라 함은 정치성이 없는 구호단체, 학술단체 및 종교단체와 국가재건최고위원회의 허가를 얻은 단체를 말한다. ②~④생략 ⑤ 제1항 국가재건최고위원회의 허가를 얻은 단체라함은 다음과 같다. 一. 반공정신을 선양 계몽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 二. 신생활과 국민도의 앙양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 三. 국제적인 유대를 가진 민간외교단체. 四. 혁명과업수행에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단체(http://theme.archives.go.kr/viewer/common/archWebViewer.do?singleData=Y&archiveEventId=0049285948).
“사회단체등록에관한법률”에 의거, 신청서를 작성하여 모든 사회단체들은 필수로 등록해야만 했다. 혁명정부는 6월 15일, 대한체육회수습대책위원을 위촉하였고, 7월 29일 혁명세력에 속한 제19대 대한체육회 및 7대 KOC위원장 겸임으로 김동하 회장이 취임되었다(KSOC, 1990). “사회단체등록에관한법률안” 은 체육계에 큰 변화를 가져온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 때까지 별개 단체였던 대한체육회와 대한올림픽위원회를 통합시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1960년 초부터 제기되어왔던 체육계 단체 통합이 현실로 실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당시 언론들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대한체육회 및 그 산하경기단체에서는 작년 四月 一九일 이후 그 기구를 개편함에 있어 대부분 자유당계의회장을 민주당계의 정계요인으로 대치한바 있는데 五 一六 군사혁명 이후 그들 회장은 사실상 회장직무를 수행못하는 실정에 있으며 체육인을 회장으로 추대한 수개 경기단체만이 정상적인 운영을 계속하고 있다. 또한 올림픽 해당종목단체 회장들로 구성된 대한올림픽위원회(KOC)도 완전 마비 상태에 놓여 있어 조속한 개편이 요망되고 있다(The Dong-A Ilbo, 1961.6.6).
1962년 국민체육진흥법 제정 이후 정부 지원은 체육단체들의 예산 확보에 대한 민감도를 높이면서 이 때 대한체육회와 타 기관들과의 충돌은 사실상 피할 수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상술했던 세 개의 단체들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으며 이러한 분위기를 배경으로 정부는 제58회 국회 회의에서 체육 유관기관 조직 개편에 대한 의지를 보이기 시작했다.
문홍주(문교부장관) : 체육행정은 지금 KOC 그리고 대한체육연합회 학교체육회 이렇게 나누어져 있는데 KOC는 특수한 사명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독립이 되어있는 것 같고 학교체육회와 대한체육회도 현재에는 각기 맡아 있는 부문이 다른 것으로 압니다. 그리고 잡음이 일고 있기는 합니다. 이것을 종합해서 일원화하도록 연구를 하겠습니다. (Ministry of Education, 1967).
문교공보위원회 회의록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국제대회에 선수단 출전 사안들은 단순한 문제가 아닌 정부의 조처가 제시될 만큼 확대되었던 것이다. 1966년 11월 12일, 문교공보위원회 위원장 이돈해를 비롯한 총 22명[출석위원: 김종호(위원장 대리), 예춘호, 이종순, 이 활, 차지철, 최영두, 최정기, 고형곤, 김상현, 류 진, 류 청, 이희승, 국무위원은 문교부장관인 문홍주, 정부위원으로는 문교부차관인 성동준, 이 외 신능순(문교부기획관리실장), 홍순철(문교부보통교육국장), 이상조(문교부고등교육국장), 이철희(문교부편수국장), 김규익(문교부장학실장), 고창식(문교부편수관)] 위원이 회의를 개최하였다. 제58회(제19차) 국회 문교공보위원회 회의록에서 체육통합과 관련된 중요한 기록을 아래와 같이 찾을 수 있었다.
김상현위원: 대한체육회에 대해서 제가 한 말씀을 드려야 되겠는데요. 이번에 아세아 올림픽대회인가 뭔가 놔두고 여러 가지 잡음이 있습니다마는 근본적으로 체육행정의 일원화... 이 체육인이라고 하면 우리가 이 「스포츠맨」이라고 하면 정치인들도 하는 말이 참 우리가 「스포츠」정신을 가져야 한다 그러는데 적어도 체육하는 사람들이 거기에도 파벌작용이 일어나가지고 中傷하고 謀略하고 이런 실정이 되어간다는 것은 나는 대단히 불행한 일이라고 봅니다.
장관께서 지금 이 KOC다 대한체육회다 학교체육회다 하고 여러 가지 체육회에 대해서 많이 있는데 이 체육회의 일원화를 위해서 장관이 어떠한 斷案을 한번 내릴 용의가 없는지 거기에 대한 장관께 소신을 제가 말씀을 드리고 또 하나는 이번 이 아세아「올림픽」대회 관계로 가는데 오늘 신문에도 났읍니다마는 뭐가 났는냐하면 연구조사비다 해가지고 조사원인가 뭔가 해가지고 KOC에서 이십명을 보내는데 대한체육회에서도 또 이십명을 오백만원으로 딱 정해가지고 보낸다고 합니다.
그런데 내용은 원래 KOC하고 대한체육회하고 합의해 가지고 단일조사원을 구성을 해서 보내려다가 그 협상이 안되어 가지고 깨저버렸어요. 그러니까 KOC에서 이십명을 보낸다하니까 또 여기서도 사람을 이십명을 보낸다 이런 실정에 있습니다.
이것은 나는 대단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오백만원이 적다면 적지만 이것 국민들이 낸 혈세인데 이것을 다시 말하면 우리가 조사원이면 조사원 이렇게 가면 우리가 학교체육회나 대한체육회나 단일화해서 가면 가지 완전히 목적이 똑같은데 조사원 단체를 둘로 해서 간다는 것은 이것은 국제적으로 큰 체면에 관계가 있는 것인데 여기에 대해서 장관께서 나는 어떠한 방법으로 이 문제를 적어도 조정하고 이 문제를 정리해야 될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장관이 직접적으로 중재에 들어가서 이 문제를 갖다가 조정해서 원만한 타협점을 발견해 가지고 이와 같은 난립을 방지하는 이러한 것을 강구할 용의가 없으신지 또한 당연히 해야 되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문제만 말씀드립니다(Ministry of Education, 1966).
이에 당시 문교부 장관인 문홍주는 김상현위원에 대한 질의에 다음과 같이 답변하였다.
특수체육회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문교부에서 강제로 해산시켜가지고 없애버렸습니다. 일원화가 언제 반드시 된다 이렇게 단언하지는 못하겠읍니다마는 여러 가지 체육회를 하나씩 해산시키고 일원화하는 방향으로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아세아「올림픽」에 이십이명을 KOC에서 보내기로 되어 있는 것은 저희들이 압니다마는 대한체육회에서 이십이명을 보낸다는 것은 실무자들의 얘기는 금시초문이라고 합니다(Ministry of Education, 1966).
위의 김상현위원과 문홍주 장관이 제기한 단체 명칭 중 대한체육연합회는 대한체육회, 학교체육회는 대한학교체육회로 잘못 언급한 것이다. 국회에서조차 체육단체들의 중복 사업에 대한 국고 지원의 우려는 이미 표출되었고, 세 단체 간의 주도권 싸움이 더욱 격렬해지면서 주무부서인 문교부는 체육단체 통합의 필요성을 인정하였다.
대한체육회와 대한올림픽위원회의 분규는 「아시아」경기대회, 「유니버시아드」대회와 같은 국제대회에 출전할 때마다 터져 나왔고, 양단체간의 싸움은 「방콕·아시아」경기대회 출전선수들의 연판장 소동으로 그 절정에 달했었다. 이 같은 북새통 속에서도 학교체육회는 「학교체육연구」라는 본래의 목적을 잊은 채 전국체육대회와 비슷한 규모의 전국학도체육대회를 개최하는 한편 선수등록마저 주장함으로써 체육행정을 일대위기로 몰아넣었다(Korea JoongAng Daily, 1968.12.14).
세 단체의 통합은 1968년 2월부터 시작되었다. 우선 9인통합전권위원회 구성하고, 회의를 갖았는데 9인통합전권위원회 구성원은 다음과 같다(KSOC, 1990).
9인통합전권위원회의 거듭된 회의를 거쳐 1968년 2월 27일 대한체육회, 대한올림픽위원회, 대한학교체육회의 통합이 이루어졌다. 이틀뒤인 2월 29일 대한체육회 회장 및 KOC위원장으로 민관식이 선출되면서 대한체육회의 첫 번째 통합을 이루게 된 것이다.
체육기구 통합은 1968년 「스포츠」계의 가장 큰 소득이었다. 체육단체간의 마찰과 알력이 통합의 주요인이었다(Korea JoongAng Daily, 1968.12.14).
민관식은 “과거 우리나라 체육의 발전을 저해한 가장 주된 요소의 하나가 인화 문제, 특히 파벌의식아로 일컬어지니, 여기에서 빚어진 가지가지 불협화음이 국민의 빈축과 실망을 자아낸 전철을 다시 밟지 않기 위해서, 형식적인 단체의 통합이 아닌, 모든 체육인 개개인의 양식과 자세가 혼연 일치된 통합이라야 한다”고 강조하였다(Min, 1966).
멕시코올림픽을 앞둔 1968년 당시 그는 흔들림 없이 한국체육의 정통성을 주장한 결과 통합회장으로서 올림픽 기능과 학교체육 영역까지 통합할 수 있었다. 그는 생활체육도 엘리트 울타리 안에서 얼마든지 상생의 길을 찾을 수 있으며 오히려 시너지효과가 크다고 늘 주장하곤 했다(Lee, 2015).
통합 직후 국내외 체육계 운영에 대한 논의가 신속하게 재개되었다. 우선, 국제 업무로는 제6회 아시아경기대회 개최권 반환 정식 결의, 국내에서는 산하 단체들로 가입되어 있던 대한체육회 가맹단체의 시도 지부 학교체육회, 경기단체 시도지부를 흡수·통합하였다. 이 때 기존 전무이사 제도를 폐지하는 대신 사무총장 제도를 도입하였는데 당시 대한체육회 이사였던 김성집이 초대 사무총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대한체육회 내 세 개(사회체육위원회, 학교체육위원회, 경기력향상위원회)의 위원회를 구성하면서 대한학교체육회의 기능을 이관하였다. 한일 고교교환경기개최, 체육교사 강습회, 학교체육 우수논문 선정 등 학교체육과 관련된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면서 30인 이사 가운데 5인 이상을 반드시 체육교직계에서 선임하는 규정을 마련하였다(Lee, 2000).
대한체육회, 대한올림픽체육회, 대한학교체육회 세 단체의 통합 역사를 살펴보았다.
광복 직후 대한체육회의 재정비와 다수 체육단체들의 설립은 일제 치하에서 작동하지 못했던 체육 행정 체계를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긍정적 신호탄이라 할 수 있다. 전국 각지에서의 대회 개최, 코리아라는 국기를 내걸고 광복을 되찾은 나라를 알릴 수 있었던 국제무대에 참가는 대한민국 체육계의 급속한 성장과 발전을 공식적으로 엿볼 수 있는 증거이다. 국내외 체육의 성장은 곧 유관기관들의 임무와 역할이 확대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한국체육계의 중추적 기관이라 할 수 있는 대한체육회는 국제 활동이 확장되면서 대한올림픽위원회와의 갈등이 그리고 학교체육 및 학도호국단 대회 운영에서 대한학교체육회와의 불화가 발생되었다. 즉, 대한체육회와 대한올림픽위원회는 국제대회 참가를 둘러싼 대표팀 구성, 국가대표 선발 및 파견으로 그리고 대한체육회와 대한학교체육회는 학생운동 선수들의 대상으로 한 전국 대회 운영, 특히 전국 단위의 교육계 임원들의 네트워크를 확보하고, 학도호국단 체육대회 운영을 맡은 대한학교체육회의 위세가 높아지면서 지속적인 마찰이 발생되었다.
세 체육단체의 불협 화음은 국회 회의에도 논의되어질 만큼 사회적 문제를 일으켰다. 1966년 12월 행정개혁조사위원회는 『체육행정의 개선을 위한 조사보고서』에서 문제점의 핵심을 세 단체의 중복 사업으로 인한 충돌이라고 지적하였다. 이를 근거로 1968년 2월, 박정희 대통령은 체육단체 일원화를 지시하였고, 대한체육회, 대한올림픽위원회, 대한학교체육회가 사단법인 대한체육회로 통합되었던 것이다. 대한체육회의 첫 번째 통합은 단체간 중복 사업을 지양하고, 국가 예산 낭비를 줄이며 단체들 간 알력 싸움을 없애는 등 체육계의 안정된 환경을 만드는데 의의를 둘 수 있다.
하지만 광복 이후 급속하게 팽창했던 체육단체들 특히 대한체육회와 유사 사업을 수행했던 대한올림픽위원회와 대한학교체육회를 흡수 통합하면서 대한체육회 중심 체제로 조직을 정비하였다. 이는 기존 세력에 대한 신생 체육단체의 견제를 ‘통합’으로 대한체육회가 위력에서 승리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2016년 3월 대한체육회와 국민생활체육회가 통합되었다. 체육계 선진화를 위한 필수 조건이라하며 시작된 통합은 이미 이루어졌고, 현재까지도 화학적 통합을 위한 노력 중이다. 지금으로부터 52년전 대한체육회의 첫 번째 통합은 최근의 통합과는 사뭇 다르다. 사업 중복 및 조직간 파벌싸움이 주요인이었으며 이러한 문제점이 정부 기관에까지 보고되면서 대통령 명령하에 통합이 빠르게 진행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첫 번째 통합은 필요에 의한 작업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결국 대한민국의 체육이 대한체육회를 중심으로 권력이 재구성되었던 한국체육사의 큰 사건이라 할 수 있다.
1) 이학래(2000)에 의하면 수영, 레슬링, 빙상, 사이클 종목이 각각 국제경기연맹에 가입절차를 밟은 것으로 기록되었다(Lee, 339).